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아인 Oct 12. 2023

어디서든, 아남네시스

_마르세유


어디든 성당에 들어서는 건 ‘죽음’을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성당에는 누군가의 묘가 있다. 누군가의 유해가 있다. 예루살렘에서 가장 거룩한 기억의 장소는 예수의 무덤 성당이다.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은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에 지어졌다. 유럽의 오래된 성당 지하에는 아예 묘지로 쓰이던 크립트가 있다. 성당 안에 무덤이 있다는 건 어떤 죽음을 기억하는 일이다. 죽음을 기억한다는 건 지금 이 순간을 새삼, 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미사 역시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이다. 유다인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되던 파스카를 기억하며 구원의 하느님을 찬미하듯이 미사는 예수가 희생제물이 되어 인류를 구속했음을 상기한다.

기념하고 기억하고 희망하는 미사 전례의 핵심 개념인 아남네시스(ἀνάμνησις)는 더 오래전에 플라톤의 개념이었다. 이데아에 대한 상기. 플라톤은 우리가 자신 안에 내재된 이데아를 상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거대한 성벽처럼 보이는 수도원에 들어서서 또 죽음의 자취를 찾았다. 프랑스에 세워진 첫 번째 수도원이다. 이집트 사막의 순결한 사랑, 고대로부터의 영성이 갈리아 지방에 이식됐다. 그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또 한 가지는 ‘칠죄종’의 원류였다. 그의 스승 에바그리우스가 사람들을 죄에 빠지게 하는 여덟 가지 근원을 정리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수도승들을 괴롭히는 나쁜 생각에 관한 것이었다. 나중에 그레고리오1세 교황이 이를 ‘칠죄종’으로 정리했다.   

 

탐식과 색욕, 탐욕과 분노, 낙담(슬픔)과 나태, 자만(허영)과 교만. 에바그리우스가 뼈대를 끄집어낸 이 여덟 요소는 사람의 생득적 조건이다. 사람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양면을 갖고 있다. 잘 쓰면 선물이고 덕이 되지만 잘못 썼을 때는 죄의 이유도 된다. 잘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죄의 근거를 성찰하는 일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건 필요한 어떤 것을 찾아가는 일이다. 그래서 패인 곳을 메우고 모난 것을 둥글게 만들어보려는 일이다. 그래서 ‘뼈를 깎는’ 것 같은  통증이 수반되는 일이다. 그 길도 안내자가 있어야 조금 덜 헤맨다. 요한 카시아누스가 그 일을 해주었다. 죄로부터 벗어나라고, 그래서 행복해지라고, 1500년도 전에 그가 우리에게도 알려주었다. 그 오래된 이름이 오래전 그 시간과 나를 이어주었다.


그 옛날 이집트 사막에서 오직 한 가지에 마음을 집중해 살던 이들이 들려주는 영원에 대한 이야기, 한 번뿐인 인생의 가치에 대한, 의미에 대한 귀한 이야기가 칠죄종에도 담겨 있다.

아주 낯선 바람이,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서걱였다. 머물고 싶었다. 지하에 이집트의 바람을 묻어온 요한 카시아누스의 묘지가 있다고 했지만 찾지는 못했다. 참, 마리아 막달레나의 오빠 라자로도 여기 묻혀 있다고 한다.


이전 09화 마르세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