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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담일기 Sep 07. 2024

X에게 전과가 있나요?


변호사가 요청한 서류를 전달하기 위해 잠깐 변호사 사무실에 들렀다. 각종 서류와 두 장의 탄원서를 건넸는데 변호사는 나는 왜 탄원서를 쓰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도 써야 되는 줄 몰랐다. 아니, 사실 알고 있으면서도 쓰기 싫어서 짐짓 모른 척했는지도 모르겠다. 알겠다고 하고 걸어 나오는데 변호사는 나에게 X에게 다른 전과는 없는지 물었다. '없다'라고 말하려다가 문득 X의 과거가 떠올라 하려던 말을 멈췄다. 왜 그 사건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걸까. 


X는 나와 연애할 때 자신의 전여자친구를 몰래 만난 적이 있었다.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았던 모양이다. 늦은 밤 그녀가 X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때 일이 터졌다. 나는 늘 습관처럼 자기 전에 X에게 연락을 했었는데 X는 울면서 자신이 지금 경찰서에 와 있으니 데리러 와주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는 나에게 X는 얼굴 보면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가서 경찰서 앞에서 X를 기다렸다. 한 시간쯤 기다렸을까. X는 터덜터덜 경찰서에서 걸어 나오며 상황을 이야기했다.


자신이 자고 있는데 밤늦게 X의 전여자친구가 X의 집을 말없이 찾아왔단다. 다시 잘해보자는 그녀와 말다툼을 벌이다가 그녀가 X의 뺨을 힘껏 때렸는데 X 역시 참지 못하고 그녀의 뺨을 치다가 그녀가 옆으로 넘어졌다고 했다. 그녀는 그 즉시 그 집에서 나와 병원에 갔고 진단서를 떼 경찰에 신고했다. 자신은 그것 때문에 경찰서에 왔고 벌금형을 선고받았다고 했다. 그녀는 합의조건으로 X에게 천만 원을 요구했다. X는 며칠 내내 그녀에게 빌었고 결국 5백만 원을 주는 조건으로 합의를 끌어냈다. 


나는 당시 X가 그녀에게 된통 당해 불쌍하다고 생각했었다. 정당방위로 서로 치고받은 것일 뿐. X의 행동이 크게 잘못된 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애초에 나와 사귀고 있었으면서 전여자친구와 몰래 연락하고 있었다는 것. 그녀가 X의 집을 드나들 정도로 그녀와 깊은 관계였다는 것. 정당방위일지라도 여자를 때렸다는 것. 모든 지금 생각해 보면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지만 그때는 이상하게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내가 이 사람을 보호해 주고 구해주어야겠다는 어리석은 마음뿐. 


그 후 X는 몇 달 뒤 그녀의 페이스북 댓글에 욕설을 남겨 또 경찰서에 가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내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X를 쳐다봤을 때 X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면서 우겨댔다. 억울하다고 눈물을 보이며 자신은 절대 이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때 역시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겠다며 뜬금없이 대학교 때 받았던 봉사활동증명서를 찾아보겠다고 했던 것이 생각이 난다. X에게 있어 봉사활동증명서는 자신이 얼마나 착하고 정직한 지를 나타내주는 증거자료였던 것 같다. 결국 X는 또 벌금을 냈다. 


X는 묘하게 정상적인 생활과 기묘한 이중생활을 반복했다. 줄타기하듯 그 스릴을 즐기는 처럼 보였다. 한 때 얼떨결에 X의 핸드폰 속 사진을 넘겨보다가 X가 지하철 안 여자 다리를 찍은 사진을 보게 되었다. 5~6장쯤 됐었던 것 같은데 보자마자 너무 놀라 소리 지르면서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냅다 소리를 질렀었다. 이거 범죄인 거 아냐고, 당장 지우라고 뭐라고 하니 자신도 실수였다며 부랴부랴 지웠었다. 본인도 그 자체가 범죄인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자신은 언제나 그 법 망을 피해 갈 수 있을 거라 단언했었다. 자신은 정상적인 사람이고 그냥 단순 장난이었을 뿐이라고.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떠오르면서 내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이미 나는 연애 때부터 X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기억 속에 묻고 묻고 또 묻었다.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연애 때 벌어졌던 작은 사건들은 결혼과 동시에 풍선만큼 커져 내 목을 죄어왔다. 그런 X를 위해 탄원서를 쓰려고 하니 내가 너무 비참했다. 구치소에서 내보내달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거기서 썩으라고, 오랫동안 썩어서 제발 인간이 좀 되어서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X와 헤어지지 않으면 이런 일을 몇 번이고 더 겪을 것 같았다. 이젠 좀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X를 위해 탄원서에 그렇게 적었다.


X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아주셔서 감사하다고. X는 누군가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남편으로서 참 잘해왔다고. 직장에서도 능력이 출중해 인정받으면서 살아왔다고. 순간의 실수로 이런 자리까지 오게 됐지만 X는 이미 그 충분한 벌을 다 받았으니 용서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X는 이미 나를 잃었다고. 그러니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달라고. 




이미지 출처 : Unsplash의 Jen Theod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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