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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담일기 Sep 08. 2024

부모에게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이사 가자마자 집을 부동산에 내놓았지만 집은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한 구석에는 아직 풀지 않은 X의 짐이 한 무더기였는데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다. X는 자신은 바로 풀려날 수 있을 거라 장담했지만 나는 X의 말을 믿지 않았다. X의 죄가 가벼운 게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X에게는 이미 부동산에 집을 내놓았고 이혼도 차근차근 진행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은 상태였다.


집이 빠지면 X의 짐을 모두 지방에 있는 X의 부모님 집으로 보내고 남은 가구와 가전제품들은 재활용센터에 넘길 것이다. 그 어떤 것도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 내 옷 이외에는 다 버리고 갈 것이다. 전세 보증금은 서로 반반 준비해서 시작했으니 헤어질 때에도 반반 나누어가지면 그만이다. 돈 관련해서는 싸울 것도 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빈 방에 앉아있는데 오랜만에 아빠가 전화를 했다. 모든 상황을 알고 있던 아빠는 꽤 어색한 말투로 잘 지내고 있냐고, 밥은 잘 먹고 지내냐며 걱정의 뜻을 내비쳤다. 엄마와 꽤 오래전 이혼을 한 아빠에게는 내 소식을 가장 늦게 알렸다. 아빠는 나를 안쓰러워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아빠는 문득 집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집은 이미 부동산에 내놨다고 했다. 다시 같이 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고 못 박았다. 아빠는 나에게 그럼 가구와 가전제품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곧 처분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내게도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그런데 아빠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럼 그거 나 줘.

마침 쓰던 냉장고가 고장 나는 바람에 필요해졌다며 냉장고와 침대와 밥통을 달라고 했다. 물건에 대한 미련은 요만큼도 없었지만 사실 그것들은 내 신혼살림이었다. 결혼할 때 심혈을 기울여 고르고 골랐던 것들. 달라고 하는 사람한테 안된다고 못준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알았다고 주겠다고 말했더니 내일 택배차를 부를 테니 바로 보내달라고 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다시 또 한 번 전화가 왔다. 부품도 잊어버리지 말고 잘 챙겨달라고 했다. 다시 전화를 끊었다.


한숨이 나왔다. 나에게 전화를 한 목적이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인지, 냉장고가 필요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정신이 혼미했다. 애초에 아빠에게 뭘 기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때문이다. 이혼하기 전에도 아빠는 늘 자기 자신이 우선인 사람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는데 또다시 알게 됐다. 그래서 더 씁쓸했다.


아빠와 엄마가 나를 보호해 주길 바랐다. 시어머니와 시아버지가 X를 목숨 걸고 지켜내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엄마는 자신이 이혼한 사람이라 당당히 그들 앞에 나서서 한 소리 못하겠다고 뒤로 물러났다. 아빠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X의 잘못은 그만 덮어두고 나만 잘 참고 지내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다. 그 모두에서 나는 빠져있었다. 아빠는 그걸 몰랐다.


하지만 나는 아빠가 어떤 뜻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잘 알았다. 한국에서 이혼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꽤 힘든 일이다. 아빠는 그 상황을 너무나 잘 알기에 딸이 이혼해서 고생하지 않기를 바랬을 것이다. 이혼 만은 막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꾸준히 직장생활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내가 나이가 들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난 지금 혼자서도 참 잘 살아가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이제 부모에게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태어나게 해 주신 것만으로도, 키워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제부터 내 행복은 누구를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만들어 가겠다고 결심했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의 Kelly Sikk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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