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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의 그늘 Mar 08. 2021

가난의 역사

가난의 역사는 길었고 그리고,



어릴 때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팔다리 몇 개 부러지는 정도가 아니라 그가 죽네사네 할 정도의 큰 사고였다.


의사들이 기적이라 부르던 보름 만의 의식 회복. 깨어난 엄마는 다친 머리가 회복되지 않아 가족은 물론 자기 자신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런 엄마를 보살피기 위해 아빠는 잘리듯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고, 엄마의 병원비와 네 가족의 생활비는 빌린 돈으로 충당했다.


수입 없는 지출의 연속. 빚은 차츰 늘었다. 늘어나기만 하다가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은행에서는 더 이상의 대출을 승인해주지 못했다. 급한 대로 이곳저곳에서 되는대로 빌리다 보니 대부업체를 낀 빚이 4억을 넘기고 만다. 그래도 한계 없는 빚은 계속 늘었다.



각각 대학과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와 동생을 포함해 네 가족이 매 달 버는 돈 보다 갚아야 할 이자가 더 많았다. 이자를 갚기 위해 또 빚을 늘리는 실정이었으니 말 다했지 뭐.


업체마다 다른 입금 기한을 지키지 못하면 전화가 미친 듯이 왔다. 처음엔 한 시간에 한 번씩, 다음엔 삼십 분에 한 번, 받지 않으면 받을 때까지 줄기차게. 지금도 나는 휴대폰이 두렵다. 어쩌다 무음 모드를 해제해야 할 때면 벨소리가 울릴 때마다 심장을 쿵 떨어뜨린다. 일부러 우스운 동물소리로 벨소리를 바꾸어두었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악몽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호흡이 거칠어진다. 당장이라도 그 벨소리가 날 어찌할 것만 같은 영겁의 시간들이 실은 공황발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해일 속에서 겨우 수면 밖으로 입을 내밀고 뻐끔뻐끔 숨을 쉬는 지경의 우리가 법과 제도를 알아볼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다행히 개인사채를 쓰기 직전, 은인의 도움으로 개인 회생 제도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사이 보이스피싱, 지인 사기, 가족과의 마찰...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도무지 슬퍼할 새가 없었다. 마지막 남은 잔액을 박박 긁어모아 온 가족이 개인회생을 신청했다. 얽히고설킨 보증관계 때문에 꽤나 애를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청 서류를 살펴보니 연 이율 약 40% 짜리 무시무시한 계약서가 열세 장이 넘더라. 가족이 진 빚은 총 8억 원, 거의 절반은 이자로 이루어진 지독한 금액이었다.






개인회생은 5년짜리 계약이다.


내 월급이 얼마이던 간에, 국가에서 지정한 최저생계비 (당시 약 90만 원 정도)를 제외한 금액을 정해진 계좌에 매달 입금하면 된다. 그것을 햇수로 5년 동안 하면 ‘너는 빚을 안 갚은 게 아니고 못 갚은 거였구나!’하고 남은 채권을 국가에서 털어준다. 그러니까, 법무사의 말에 따르면, 개인회생을 하게 된 후에는 최소 90만 원 정도를 생활비로 쓸 수 있게 된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어서는 안 되었는데.



당시 버는 돈보다 갚아야 할 금액이 더 많았던 우리 가족에게 이 사실은 그야말로 가뭄 끝 단비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최저 생계비용일 그 금액은 우리가 누구보다 바랐던 인간다운 삶, 그 자체였을 것이다.


내 경우 개인회생 신청 시 포함시키지 못한 채무가 꽤 많았다. 친척들에게 진 빚, 너무 복잡하게 얽혀있어 법률사무소에서 처리하지 못한 채권, 회사 복지의 일부인 주택자금 대출 등. 이런저런 협의를 통해 생활비로 남은 90만 원 중 60만 원을 할애하기로 한다. 이제 30만 원이 남았다. 너무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개인회생만 인가받으면 사람처럼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공과금, 월세, 교통비.... 하고픈 많이 많지만 그래도 이렇게 살아남았으니 상황이 좋은 편이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절망의 와중에도 죽으란 법은 없는지 직장은 꾸준히 다녔다. 알바도 꾸준히 했다. 나는 자타공인 성실맨이었다. 야근을 하면 나오는 야근 식대로 밥을 사서 다음 날 점심까지 나누어 먹고, 9시쯤 일이 끝나면 집에 돌아가기 전 작은 호프집에서 짧은 아르바이트를 했다. 간식거리를 종종 (꽤 자주) 사다주시던 사장님은 어렴풋이 내 사정을 눈치챈 어른이었으리라. 평일과 주말을 쪼개어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몸은 피곤해도 통장에 생활비가 채워져 있어 좋았다.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다음의 할 일이 정해져 있었다. 나는 그저 몸만 움직이면 되었다. 머리를 비우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면 그래도 상황은 좋았다. 좋은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은 너무 배가 고파서 식당용 당면을 사다가 맹물에 끓여먹었다. 밍밍한 면수를 숭늉이라 생각하고 마시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신은 있을까? 모르긴 해도 인간의 선악으로는 그를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5년. 영원과도 같았던 그 5년이 이번 달이면 끝이 난다. 실은 얼마 전 조금 무리를 해서 마지막 입금을 했다. 4억 원을 내 힘으로 전부 갚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 신용점수 빵점짜리 인간에서 보통의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이제 엄마 몫으로 남은 2억 원 정도는 이제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샘솟는 시기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또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 신이라는 존재가 내게서 희망을 빼앗아가더라도, 나는 잠시 주저앉을지언정 악착같이 살아남을 거다. 반드시.





실은 마지막 입금일에 너무 실감이 나지 않아 종종 들어가곤 했던 인터넷 카페에 익명의 글을 남겼다. 그냥 아무렇게나 글을 쓰는 게시판이라 혼잣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글을 썼는데, 그날 밤 무음 모드였던 휴대폰을 뒤집었더니 3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려있었다.


수고했어. 행복해. 고생 정말 많았어.


하루 종일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던 감정이 그 순간 몰아치고 말았다. 눈 앞이 흐려 잘 읽히지도 않는 댓글을 하나하나 읽고 또다시 곱씹어 읽으면서 세상은 아직 따듯하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고마운 익명들.



세상을 나 홀로 견뎌냈다고 생각했다. 누구 하나 의지할 데 없이 혹독하게.


그러나 세상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으로 정을 나누는 존재들이 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무너져가던 내 손을 꽉 움켜쥐어주는 어떤 것들이 너무나 많다. 사람이 힘들 때엔 시야가 좁아져서 그런 것들을 알아채기 쉽지 않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난다. 미안하고 감사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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