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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의 그늘 Jan 17. 2020

생명보험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뛰어내리지 못하게 했다

나는 결국 빌라 옥상 문을 열었다. 관리가 허술한 옥상문은 참 쉽게도 열렸고,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옥상으로 들어섰다. 시선을 따라 한눈에 들어오던 단출한 풍경은 지금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 키만 한 식물이 말라죽어가던 갈색 플라스틱 화분은 디딤돌로 안성맞춤이었다. 그것에 다리를 올리자마자 온 몸이 후들거렸다. 고작 5층짜리 건물의 옥상일 뿐이었다. 건물 외벽을 훔쳐본 나는(그 바깥 조차 내다보지 못했다) 여기서 뛰어내려봤자 죽지도 못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머리가 박살난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다시 떨어지기 위해 옥상에 올라간다는 어떤 귀신 이야기처럼 될 까 봐 무서웠다.


결국 화분 아래로 조심스레 내려왔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계단을 내려와 침대 위에 쓰러져 입을 틀어막았다. 죽지도 못하는 나는 겁쟁이 었다. 쓰레기였고, 무의미한 존재였다. 죽고 싶지도 않은데 죽고 싶어 하는, 자기 연민에 빠진 최악의 인간이었다.





이후로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몇 번 옥상 문을 덜컥였다. 문은 나의 의도를 전부 알고 있는 양 열리지 않았다. 그런 날에는 효과가 미미한 자해를 시도했다. 멍청했던 나의 시도들은 흉터조차 남기지 못하고 전부 사라졌다.


죽음을 생각하는 일마저도 지겨웠다. 나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아둔한 인간인데, 죽는 것이라고 제대로 해낼 리 없었다. 드디어 모든 것을 포기했다. 놀랍게도 죽고 싶음을 포기했을 때 가장 큰 용기가 났다.



첫 번째 옥상에 진입했을 때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기억이 옅다. '안 열리면 말고'라는 마음으로 문고리를 돌렸는데 덜컥 문이 열렸다. 두렵지도, 기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전에 있던 화분은 사라지고 없었다. 주인을 잃은 지 꽤 오래되어 보이는 양말에 검댕이 묻은 채 굴러다녔다.


옥상 외벽에 올라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낑낑대며 난간에 오르는 동안 내가 준비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오르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임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했던 것 같다. 한 층 아래 남겨질 나의 고양이에게 미안했다. 가족들에게 미안했고, 친구들에게 미안했다. 이전에는 준비했던 유서도 없었다. 즉흥적인 죽음이었다. 미안했지만 홀가분했다. 이것으로 나의 짐은 아스라이 사라질 것이다. 나와 함께.



'효도도 못했는데 생명보험이나 들어 놓을 걸'하던 아무개의 농담이 생각난 것은 순간이었다. 내게 생명 보험이 없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가난에 목 졸리고 있을 가족들이 생각났고, '보험이라도 들고 올라올 걸 그랬나'하는 멍청한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고민 끝에 나는 난간에서 다시 내려왔다.






물론 자살에 보험금이 나올 리 무방한데 당시에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다. 그저 보험이라도 들어놓고 죽어야겠다는,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엉뚱한 생각만이 나를 지배했다. 그 날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그냥 돌아왔고, 울지 않았고, 다음 날 출근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물론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그게 끝이다. 이후로도 나는 끝없이 죽고 싶었다. 멍청한 나 자신과 썩어버린 인생 사이에서 점점 가라앉았다. 마음은 곪아들었고 삶은 고독했다.


어느 날 혀를 씹으면 정말 고통 없이 죽을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다가 실행에 옮기기로 했는데, 혼자서는 못할 것 같아서 어떤 물리적 방법을 쓰기로 했다. (바보 같아서 적지는 않을 것이다) 물리학에 재주가 없었는지 이번에도 용기가 없었는지 혀 대신 아랫입술을 대차게 씹었다.


피가 줄줄 나는 와중에 죽지 않았다. 당연하지. 비린 맛을 연달아 삼키는 동안 이렇게 살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


용기도 재주도 없어 죽지 못할 거라면, 빌어먹을,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 죽는 대신 아랫입술이나 씹어대는 그런 바보짓을 하는 것보다야 생각을 고쳐먹는 게 훨씬 있어 보이지 않는가. 퉁퉁 불은 입술로 알라딘 서점에 갔다. 꼬깃한 비상금으로 심리학 책을 두 권 골라서 돌아왔다.






이것이 우울증에 시달리던 나와 활자의 첫 만남이다. 물론 많은 것을 생략하긴 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엔 너무나 부끄러운 이야기이다. 결국 자기 연민에 취해 죽음 언저리를 서성이기만 하던 어느 비겁자의 일기가 아닌가.


하지만 이것으로 누군가 위로를 받는다면. 이 허접하고 멍청하고 엉망인 인간의 일기가 옥상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는 누군가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면 기꺼이 글을 적어야겠다. 어쩌면 그게 그 날 난간에서 나를 붙잡았던 것의 정체일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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