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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의 그늘 Mar 08. 2020

우리는 아파도 될 만큼 힘든 걸까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나는 우울하지 않았다. 힘듦의 시기가 정점을 찍은 후 어느 정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서야 힘들어하기 시작했다. 슬픔의 감정이 아무 때나 터지고 무기력이 불쑥 튀어나오는 증상은 그보다 훨씬 이후에 시작되었다.


아주 많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과연 내가 힘들어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고민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 우울하고 힘들었을 때 증상과 원인을 양 손에 들고 두 개의 시기가 맞지 않음을 가지고 또 우울해했다. 나 자신은 힘들어할 자격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두 배로 힘들었다. 나는 과연 '우울증'이라는 진단명에 자격이 있을까?





거의 1년 정도를 내가 '진짜로' 힘든 게 맞는지 계속해서 확인하는 데에 허비했다. 어느 날에는 아파해도 될 것 같았는데, 다음날 눈을 뜨면 이 정도의 고통도 버티지 못하는 내가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몇 번의 끔찍한 시도가 있은 후에야 처음으로 무료 상담소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인터넷에 올라온 후기만큼 속 시원하고 통렬한 자아성찰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선생님의 한마디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예상되는 원인이 가볍다고 증상까지 가볍게 여기면 안 돼요."



상담소의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다. 운동을 하다 걸려도 감기이고, 집에서 놀다가 걸려도 감기이다. 감기에는 감기약을 처방받으면 된다. 감기에 걸리기 위해 맨몸으로 얼음산을 등반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심플한 설명을 듣고 나니 우울증이라는 진단명을 받기 위한 스스로의 자격을 검열했던 지난 순간들이 너무 부끄러웠다.



'힘들어해도 되는 사람'은 지금 자신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파도 되는 사람'은 지금 당장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다. 고통에 자격은 없다.



이런 글을 쓰고서도 나는 여전히 나의 나약함에 기가 찬다. 고작 이 정도도 견디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의가 해주었던 '증상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말은 위급한 순간에 구명조끼처럼 작용한다. 원인에 대한 검열은 나를 돌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너보다 내가 더 힘들어'를 뽐내는 시대이다. 일명 불행 배틀이 만연한 이 시대에 현대인은 자신의 고통의 급이 어느 정도인지 자신도 모르게 계산한다. 기준치에 미달하는 고통은 무시당한다.


만약 나처럼 나의 고통의 척도를 계산하느라 진짜 고통을 등한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손을 잡아주고 싶다. 그럴 수 없으니 글로나마 위로를 전한다. 당신의 고통은 이미 충분하다. 거기에 자격은 없다. 수치는 더더욱 없다. 고통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므로,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사람 또한 자신뿐임을 모두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세상에 '아파도 될 만큼 힘든 정도'라는 건 없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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