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 앞에 임시로 만든 재활용 박스가 넘칠 정도로 소주병이 쌓여버렸다. 처치 곤란한 소주병을 세어보니 하나, 둘, 스물 두 병이다. 미쳤군. 손으로 이마를 찰싹 때렸다. 미쳤어.
역시 정신과에 가보는 게 좋겠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병뚜껑을 치우면서 다짐한다. 인터넷에 ‘알코올 의존증 증상’을 검색하고 꽤나 고점을 득점한 다음 침대에 드러누워버렸다. 병원을 방문하라고? 이 내가? 알코올 의존증이라니? 그럴 리 없지. 그냥 조금 술을 많이 마신 것뿐이야. 요즘 약간 우울했으니까.
멍청하고도 뻔하게 나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끊을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무엇보다 병원비가 아까웠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쓸 돈이 없었다.
딱 오늘까지만 먹고 술 끊자. 그러면 병원비도 아끼고 술값도 아끼는 거야.
냉장고를 뒤져 남아있던 소주를 얼른 냉동실에 옮겨 넣었다. 배달 어플을 켜고 치킨을 주문한다. 두어 시간 뒤면 어김없이 소주 두 병을 꼴딱 마셔 헤롱대는 손으로 휴대폰을 붙잡는 것이다. 연락처 목록에 뜨는 엄마덜과 아빠덜 위에 손가락이 머뭇대었다.
그다음 기억은, 꺼진 휴대폰과 부서진 면도칼과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는 나.
빈 초록색 병. 반도 먹지 못한 치킨 박스.
32살쯤 되면 집에서 혼자 우는 일은 없을 줄 알았다. 무릇 여자란 태어나 3번만 우는 거라고 했는데, 요즘의 나를 보면 어른이 되긴 글러 먹었다. 매일매일 술에 취해서 울고나 있다니.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냥 힘들었다. 다 그만두고 싶지만 동시에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이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지 고양이가 자리를 피해버린다. 좁은 방 안에서 더더욱 혼자가 된 나는 쓰러진 술병에서 새어 나온 알코올을 닦으며 또 울었다.
왜 이렇게 살아야 돼. 어떻게 해야 해. 그냥 싫어. 뭘 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이런 내가 너무 싫어.
손목의 상처는 그저 따끔했을 뿐인 상처들. 자해는커녕 주저한 흔적에 가까운 것들. 피가 송송 맺혀있을 뿐 흉터로도 남지 못할 나약함의 증거들. 그날도 나는 죽지 못한 채 방 안을 서성였다. 서서히 물든 취기에 기대어 겨우 잠을 잤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베개도 제대로 베지 못하고 바닥에 구겨져서 그렇게 생각했다.
전부 끝난 줄 알았지. 안일했던 내게 가해지는 벌은 너무 가혹하다. 나는 또다시 죽고 싶지만 죽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현실을 부유하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겨우 근무시간을 채우고 나면 침대에 엎어져 나쁜 생각만 한다. 그러다 기분이라도 좋아져보자 싶어서 또 술을 먹는다. 잠깐이나마 좋았던 기분은 형체도 없는 주제에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따라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친다. 전보다 더 깊고 어두운 곳을 비집고 들어가 몸을 뉘인다.
그렇다. 또다시 고통의 시간이 왔다. 다신 안 올 줄 알았는데.
이 고통과 무기력과 우울이 한 데 뭉쳐 목을 조르는 이 시기는 뜬금없이 나를 찾아왔다가 홀연히 떠나곤 한다. 어느 때에는 괜찮았다가도, 또 어느 때에는 격렬히 죽고 싶다. 언젠간 지나갈 시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없이 고통스럽다. 누군가 일부러 잡아 늘린 테이프처럼 길게 늘어져 좀처럼 흐르지 않는 나의 시간. 언제쯤 익숙해질까. 또 그 시간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