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낮의 그늘 Feb 18. 2020

15만 원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검사비였기에 망정이지

184,000


키오스크 화면에 뜬 결제 금액을 보고 당황했다. 20만 원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머릿속으로 재빨리 마지막 잔액을 계산한다. 어제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남은 금액이 5만 원 정도였는데.


잠시 벙쪄있자 등 뒤에서 누군가 길게 한숨을 쉰다. 이크, 여기 병원이었지. 나는 줄지어선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취소' 버튼을 눌렀다.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허둥지둥 지갑을 챙겨 키오스크 앞의 대기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걸 어떻게 하나. 깜빡이는 눈꺼풀 아래에 도움을 요청할 사람들의 목록이 지나갔다. 친구들, 가족들, 직장 동료들....



이런 일로 좀처럼 부모님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데, 그 날 만큼은 창피를 무릅쓰고 고민 끝에 메시지를 보냈다.


‘아빠 나 15만 원만 보내주라.’


아니나 다를까 곧장 전화가 울렸다. 파도처럼 넘실대는 수치심을 꾹 참고 전화를 받았다.



“당장은 15만 원이 없는데 어떡하지? 엄마가 집에서 좀 찾아볼게. 급한 일이야?”



예상은 했던 일이다. 우리 가족에게 여윳돈 15만 원이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나는 결국 짜증을 참지 못했다. 아냐, 됐어. 별일 아니니까 알아서 할 게. 더 할 말을 찾지 못한 통화는 끊겼다.





림프종 확진을 받으려면
이비인후과에서 검사 먼저 받으셔야 해요.


그게 내가 키오스크 앞에서 서성이던 이유였다. 나는 림프종 의심 환자였는데 대학병원에서 검사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극복했다 생각했던 자기 연민이 다시 발목을 잡았다. 4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어쨌든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잔액부족’ 현상을 지겹도록 겪어본 사람은 대안을 만들어두기 마련이다. 곧장 은행으로 가서 적금 하나를 깼다. 체크카드가 풍족해졌다.


검사비를 지불하고 나니 기분이 나아졌다. 동시에 부모님께 짜증 낸 일이 마음에 걸렸다. 손이 절로 통화 목록에서 ‘아빠덜’을 찾아 누른다.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



그래도 네 덕분에 집안을 싹 뒤져서 용돈을 벌었지 뭐냐. 그걸로 엄마랑 나들이 가는 중이야.



이 발칙한 긍정주의자는 미안하다는 내 사과에 그렇게 대답했다.


암만 그래도 그렇지 나 주려고 했던 돈으로 나들이를 가? 분노한 나는 적금을 깬 기념으로 엄마 아빠 체크카드에 10만 원을 더 넣었다. 더 재미있게 놀아버려라.


깔깔 웃는 부모님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타고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웃기만 해, 다른 생각 할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리하야 나도 ‘그래, 치료비도 아니고 검사비였는데 뭘.’ 하며 히히 웃어버렸다.



이전 02화 우습지 가난과 그 인간을 동등하게 혐오한다는 사실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