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낮의 그늘 Mar 23. 2021

세 번째 유서

고마워, 사랑해, 미안해.


예전 어느 심리 상담 프로그램에서 유서 쓰기를 제안한 적이 있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때때로 유서를 쓴다. 유서를 쓰고 나면 내가 어느 부분에서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지, 왜 이런 기분이 되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것 같다. 오늘은 내가 세 번째로 완성한 (늘 쓸 때마다 울음이 터져서 완성하지 못한다) 유서를 발행해볼까 한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정말이지 가상의 죽음을 생각하고 쓴 유서이다.





나의 작은 고양이야. 널 두고 먼저 떠나게 되어 미안해. 감히 내가 너보다 먼저 죽었다는 것은 피치 못할 어떤 사고가 있었다는 것이겠지. 늘 죽어야지, 죽고 싶다를 입에 달고 살더니 결국 입이 방정임을 증명하고 떠나버렸구나. 다시 한번 미안해.


나의 고양이야. 나는 내가 태어난 날이나 처음 내 동생이 태어난 날이나, 처음 친구를 사귀었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너를 처음 만났던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한단다. 인터넷에 안락사를 하루 앞둔, 사람을 좋아한다는 어느 성묘의 임보처를 급히 찾던 그 글도 함께 기억해. 아직 고양이를 키울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자신을 알면서도 나는 욕심을 부렸어. 어쩐지 너를 잃을 수가 없었거든. 지구에서 너처럼 예쁜 고양이가 머물 곳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떠나게 된다면 그건 너무 슬플 것 같았거든.


너를  월세방으로 데려왔던 은인의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네가 어떤 표정으로  선반의 마지막 층에서 잠들었는지를 기억해. 나는  폭신한 얼굴을 일컫어 ‘부처님 같다 표현했어. 친구들도 물론 동의했었단다.   나는 내가 너를 구해주었다고 자만했고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알게 되었어. 실은 네가 나를 구해주었다는 것을. 죽고 싶은 마음에 면도칼을 치켜들 때마다 네가 밟히었다는 것을.


너는 내가  때마다  품을 파고드는 동화  고양이와는 달랐지. 내가 울고 있으면 너는  자리에서 끔뻑끔뻑 눈을 깜빡이며 나를 관찰하곤 했잖아. 종종 너의 무심이 서운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고양이들이 건네는 인사라는 것을, 세간에서는 ‘눈키스라고 불릴 정도로 로맨틱한 어떤 것이었다는 것을, 무척이나 뒤늦게 깨달았어. 너의 모든 호의를 눈치채지 못해서 또다시 미안해.


이렇게 눈치코치 없는 나이지만 필요 이상으로 너를 사랑했어. 격렬히 죽고 싶었던 나의 모든 마지막에서 기어이 너를 떠올리며 생을 택했으니까.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없다면 대체 무엇이 사랑이라는 거니?)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너는 나를 살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이었어. 독처럼 퍼진 자살을 해독하는 유일무이의 해독제였어. 고작 20 남짓을   있을 뿐인 고양이  마리. 네가 가진 물리적 가치가 하잘  없다 하더라도, 네게 모든 가치를 물려줄게. 네가 나를 10 넘게 살게 했잖아. 너의 평생을 책임지고 싶어. 누군가 이런 행태를 미친 짓이라고 비웃는다면 지옥에서 되려 그를 비웃을게. 생의 모든 추접한 것들을 내가 가져갈게. 너는 아리따운 것들만 취해 누릴  있는 모든 것을 누리고 떠나. 기다리고 있을게. 그러니까, 네가 원한다면 말이야.



안녕  가족들. 고양이 하루가 먼저였다고 해도 너무 서운치 말아.  삶의 나머지  부분은  가족이었으니까. 내가 없더라도 강인하게 살아낼  가족을 믿어. 엄마는 이미  시련을 많이 겪었고, 아빠도 마찬가지잖아. 나의 부재 정도는 그리  시련이 아닐 거야, 장담해.  엄마 아빠가 나를 사랑한다는, 그러니까 사랑했었다는 것을 하루도 빠짐없이 체감했었어. 부디 부채감을 갖지 말아 . 엄마 아빠의 딸로 태어나서 정말이지 행복했어.


난 천성이 못된 딸이라 늘 모진 말을 했었지. 용서받지 못할 걸 알고 있으며 부디 용서하지 않길 바라. 나를 용서하는 대신 자신의 삶을 살아줘. 늘 내 가족을 응원하니까. 아, 제발 매년 건강 검진 좀 받고. 의료원 피검사 말고, 엠알아이며 씨티며 죄다 찍으란 말이야.


 가족은 필요 이상의 시련을 겪었잖아. 그러니 내가 없는 것쯤이야 가뿐히 뛰어넘을 거야. . 뛰어넘겠다고 해줄래? 내가, 연락이 되지 않는 어떤 곳으로 여행을 갔다고 여겨주고 부디 자신의 삶을 찾아서 누리고 즐기고 끝내는 만족한 뒤에야  보러 왔으면 . 가족의 행복을 마냥 바라고 있을 나를 생각하면서.


내가 과분한 사랑을 받았음을 알고 있어. 오직 나만의 행복을 좇던 30세의 . 같은 나이의 엄마는 가족을 선택했고  낳았잖아.  무서운 혼수상태를 겪고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잖아. 아빠 역시, 지옥 같은 현실을 등지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주었잖아. 준혁이도 물론.  힘든 시기를 모두 겪으면서도  소리   내지 않았지. 실은 모두  눈치를 보느라  소리     없었는지도 모른다는... 그런 끔찍한 생각에 많은 후회를 하곤 했어.     모양이었는지. 부디 용서해줄래?  너무 어리석었고  용기가 없었어.  끔찍한 자기 연민과 후회가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어. 그러니 지금이라도 내게 용서하겠다고 말해줘. 부디 내게 자격을 .


이렇게 내가 글을 못쓰는 사람이었나. 우리 가족을 덮은  시련들을 함께 겪으면서   번도 가족을 원망하거나, 후회한  없음을 기억해줘. 항상  가족을 사랑했고 후회하지 않았어.  가족도 그러길 바라. 제발 행복하게 남은 생을 즐기면서. 이제 행복만 남은 여생을 즐긴 다음에  보러 . 뭐가 제일 재미있었는지 물어볼 거야. 묻고 묻고  물을 테니까, 진정한 행복을 만끽한 후에 찾아와 주라.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줘.



마지막으로  친구들. , 00이랑 00.  여기에 차마 이름을 부를  없는, 나는 소중히 여겼으나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감히 확인할  없었던  사람들. 진심으로 너흴 사랑했어. 그걸 알아주길 바라.


 사정을 자세히 설명한  없었지. 거기에 서운함을 표현했던 너희를 기억해.  미안했어. 말재주가 있는  보이면서도 말할 용기는 없는 사람을 친구로 두어서  많이 답답했겠다.


 두려웠어. 일방적인 애정을 쏟아놓으면 너희가  부담스러워할까   불안했어.  고요히 입을 닫고 있으면 너희가 화를 낼까 두려웠어. 어쩌면  자신에게 확신이 없었는지도 몰라. 아냐, 확신이 없었던 거야. 나는 끝까지 내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었고 너희는  옳은 길을 비추는 북극성이었는걸. 끔찍하게 어두운  하늘에서 환히 불을 밝히는  어떤 것이 바로 너희였는걸. 나는  누군가의 무엇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는데, 가끔은 누군가의 친구였다는 점이  삶의 위안이 되곤 했어. 너에게만 털어놓는 건데, 하는 말의 서두가 나를 여기까지 살게 했어. 정말 고마워. 그렇게 말해준 너희를 상상도 하지 못할 규모로 사랑했어. 서운한 점이 없었느냐고 물으면 당연히 있었지. 하지만  모든 순간을 잊을 정도로 사랑했어.  삶의   되는 따듯한 낮이었어. 그늘을 모두 잊게 하는.


아무리 해도 끊기 어려운 혈연과는 달리 너희는 언제든 잃을 수 있는, 내게서 떠나갈 준비가 되어있는 존재들이야. 그래서 더욱 애틋한지도 몰라. 나라는 족쇄에서 언제든 벗어날 수 있음에도 끝까지 곁에 있어준 너희가 내겐 구원이었던 거야. 물론 너흰 체감하지 못했을 지도. 나조차 이렇게 유서를 쓸 때가 되어서야 느끼고 있는걸. 그야 우린 자주 안부를 나누지 않아도 어제 만났었던 것 같은 그런 사이인 걸. 사랑해. 이 감정을 사랑이 아니라고 하면 무엇이라고 일컫어야 하니? 나는 끝내 해답을 얻지 못하고 떠나는구나. 답을 알게 된다면 부디 내게 알려줘.





 번도  사람들(그리고 고양이를) 원망한  없어.  고맙고 미안했으며  해줄  있는  없어 슬펐어. 내게 조금만  말주변이 있었더라면, 여유가 있었더라면,  용기가 있었더라면. 지금이 되어서야 후회하는 거야.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진부한  말들이  노랫말에 흔히 쓰이는지   같아. 더는 표현할 말이 없거든. 시인이 아니라 더는 아름답게 표현할  없어   있는 말을 줄이고 줄였거든.   마디는 도무지 무게를   없을 정도로 무겁거든. 빽빽한 질량이  나를  막히게 . 내가 한평생 이렇게 많은 존재들을 사랑했구나. 벅차오르는 감정을 어떻게 전달할  있을까?  사람들.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다가 만나자. 나는 비록 여기서 지쳐 스러지지만 당신들은 부디 그러지 않기를 바라. 내가 지켜보고 있을 거야.


장례절차에 필요한 금액은 모두 모아두었어. 그게   번째 목표였으니 말이야. 크고 화려한 비석은 필요 없어. 나를 자유롭게  . 바다와 . 어디든 상관없어. 나를 흩뿌리고 금세 잊어줘. 대신 나를 위해 나무  그루를 심어주래? 혹은 집에 작은   송이를 심어줄  있겠어? 어느 방식으로든 나를 향한 그리움을  틔워줘. 그리고 그것이 아름답게 시들도록 도와줘. 꽃이 시들면 깨끗하게 잊어주길 바라. 우리의 이별을 그렇게 담담히, 꽃이 시들듯 그렇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주길 바라.


아무래도 말이 너무 길었나 . 눈물이 멈추질 않아. 나는   떠나고 싶었을까? 후회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아. 마침내  시간을 향해 떠나는 거야. 고마워. 사랑해. 미안해.


안녕. 안녕.












이전 03화 15만 원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