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가? <1>
이 동네로 이사 왔을 때 가장 눈길을 사로잡았던 퓨전 중국집 간판.
금빛 유리 모자이크 타일은 햇빛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반짝반짝 빛을 발하며
오래된 간판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이른 아침
가계빚 1,000조의 시대
소상공인들의 탄식과 비명소리가...
탁한 아침 공기를 흔들며 울려 퍼졌다.
내게는 황금빛 모자이크 타일 간판의 쇠락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마치 1,000년의 암흑기를 이끌었던 중세 가톨릭교회가 무너지는 느낌이랄까...
처음 중국집 황금 모자이크 타일 간판을 보았을 때 떠올랐던 장면은...
황금빛 모자이크의 황홀함을 처음 보았던 곳은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였다.
그도 그럴 것이 1, 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이었고,
그 파급력은 전 지구적이어서 아비규환의 살상 지옥을
살아서 뜬 눈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1차 대전 때 사상자가 5천150만을 넘었다.
그 가운데 민간인은 최대 1천9백만 명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1차 대전이 끝난 지 겨우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았는데 또다시 전 세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2차 대전으로 목숨을 잃은 전사자는 약 5,500만 명이다.
그중 민간인 희생자가 약 3천만 명이라니... [위키백과] 참조.
압도적인 숫자만으로도 전쟁의 참상이 그려지지 않는가?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전쟁 속 한 복판에서 벌어졌을
인간 군상들의 비참함과 참혹함이...
1차 대전에서 미국과 영국의 편을 들어 승전국이 된 일본 제국은
손 쉽게 미크로네시아와 비스마르크 섬과 칭다오를 점령했다.
일본 기업들은 전쟁을 이용해서 물건과 약을 팔아 돈을 긁어모았다.
전쟁에 재미를 본 일본 제국은 2차 대전 때는 독일 나치와 동맹을 맺고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을 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식민으로서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전쟁터와 노역장에 강제로 동원됐다.
일본과 만주 등 조선 밖으로 동원된 사람이 150만명,
조선 내 작업장에 동원된 사람은 약 200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일본군 위안부로 징용되거나 납치, 매매된 여성들의 수도 20만 명이라니... [위키백과] 참조.
독일과 달리 일본은 아직도 제대로 된 사과와 반성은 커녕
전범국이면서 희생자인양 기만하고
역사를 왜곡해서까지 전쟁을 합리화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거기에 동조하는 몇몇 한국 언론과 지식인들은 잊을만하면 망발을 일삼고 있는 현실...
아직도 일제 식민사관을 벗어나지 못한 기사 밑에 달린
댓글 가운데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부끄러움은 왜 내 몫인가?"
폭격 맞은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의 1층은 기념관으로 개조해서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고 있었다.
교회 안 곳곳에 여전히 금빛으로 찬란하게 남아있는 천정화와 벽화들
폭격의 후유증으로 쩍쩍 갈라져 보수한 흔적들이 남아있었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의 영롱함을 가로막지 못했다.
우와!
넋을 빼놓을 만큼 반짝거리면서 아름다웠다.
시간의 지배를 받는 유한한 인간이 왜
빛나는 황금에 집착하는지 알 것 같았다.
겉모습의 독특함은 내부의 환상적인 예배당에 비하면 단순하고 소박할 정도다.
예배당 안 벽들은 2만 개가 넘는 스테인드 글라스를 박은 벌집 모양이었다.
전체적으로 천지창조의 첫 하늘을 연상케 하는 듯 눈이 부신 파란색이 주요 바탕색이다.
거기에 에메랄드 그린, 루비 레드, 노란색을 군데군데 섞어
프랑스 스테인드글라스 화가인 가브리엘 루아르(Gabriel Loire)가 디자인하여 완성했다.
무엇보다 푸른 스테인드 글라스 아랫부분 중앙에
황동 예수상이 중력을 거슬러 떠 있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 보는 순간,
세상의 모든 잡다한 소리들을 단숨에 침묵시킬 만큼 압도적이었다.
몇 해 뒤 스페인에 갔을 때
인간의 금빛 욕망을 또 한 번 제대로 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