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탐구서
동사무소에 새로운 바람이 분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팀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휴직·복직으로 인해 작은 인사이동이 생기면서 팀 내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묵묵히 엄청난 양의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차석이 다른 팀에 생긴 공석으로 옮기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동안의 노고를 인정하기에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요구였다. 동시에 팀 내 다른 직원도 차석이 가는 팀으로 가고 싶다 하였다. 애초에 사례관리를 위해 채용된 직원이기에 이 또한 명분이 있는 요구였다. 그렇게 순식간에 팀원이 바뀌게 되었다.
두 사람이 나가고, 새로운 두 사람이 왔다. 이로 인해 분주해지는 건 기존 직원들이다. 함께 민원을 치던(표현이 다소 과격하다면 죄송하지만 정말 그런 기분이다.) 동지가 없어지고 새로운 사람과 다시 손발을 맞춰야 한다는 건 불편한 부담이다.
이러한 부담 때문인지 업무 분장의 새로운 조정이 생겼다. 많은 양의 업무를 홀로 하던 차석이 떠난다니 그동안 그 덕을 보던 사람들이 초조해졌는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러쿵저러쿵 한동안 소란스럽더니 슬며시 나를 부른다.
조촐한 회의가 열렸다. 업무 재분장의 명분은 그럴싸했다.
1. 기존 차석이 어마어마한 일을 혼자 하고 있었고, 새로 오는 사람은 그걸 다 할 수 없다.
(애초에 한 명이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왜 지금까지는 묵인하고 있었던 것인지.)
2. 새로운 차석이 적응할 동안 옆에서 도와줄 직원의 업무도 상당하다.
3. 그래서 그 직원의 업무를 내게 떼야만 한다.
본인이 직접 해보지 않으면 상대방의 업무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고 조촐한 회의를 시작할 때 팀장님이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내가 하고 있는 업무는 적다고 하신다. 근거 데이터 없이 타 읍면동과 비교하며 업무가 적다고 하신다. (다른 읍면동 담당자들과 연락할 때면 이 업무들을 혼자 다하고 있냐며 놀라는 반응을 종종 보인다.)
화가 나면 정신이 또렷해지고 문장 구사력이 더욱 정확해지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부류가 아니다. 화가 나면 우선 심장부터 빨리 뛰고 머리는 멍해진다. 평소 잘하던 말도 잘 안 나온다. 분명 이상한 논리에 화가 났는데 왜 화가 났는지 요목조목 정리가 안 된다. 조리 있게 말하고 싶은데, 명확하게 반박하고 싶은데, 말이 잘 안 나온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난리 치는 이유. 너는 새로 오는 직원이 힘들길 바라냐며 한 적도 없는 말로 순식간에 나쁜 사람 만드는 이유. 우리 동에 발령 났으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말을 여기 온 지 이제 6개월 된, 자기 업무를 나에게 떼려고 하는 사람에게 들어야 하는 이유. 다른 사람 업무는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면서 근거 없이 내 업무는 적다고 하는 내로남불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이유. 이런 난리를 피우는 이유를 뒤늦게야 깨달았다.
회의 아닌 회의가 끝난 후. 잠 못 이루는 괴로운 밤을 보내며 생각하고, 생각하고, 되뇌고, 또 되 뇌었다. 뭐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자꾸 그 상황이 떠오르고, 심장은 빠르게 두근거리고, 들은 말들이 마음을 후벼파서 고통 속에 허우적 거리다 서서히 알게 되었다.
새로운 사람들에게 부담 줄 거냐, 니가 진짜 원하는게 그런거냐 라며 자신의 업무를 어떻게 해서든 나에게 주려고 나를 몰아붙인 한 명은 결국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타 읍면동과 근거 없는 비교를 하며, 협조라는 명목 하에 통보를 한 한 명은 어떻게 되든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서. 자의로 팀을 떠나는 와중에도 자신의 업무에는 도저히 하나의 일도 더 얹을 수 없다고 한 한 명은 그간 자신이 해온 업무에 대한 자존심으로.
그럴싸한 이유들을 붙였지만, 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라고 했지만, 결국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이지 결코 본인들이 말한 타인을 위한 마음은 아니었다.
같은 일을 하는 언니에게 겪은 일을 하소연하고 위로를 받으며 마음의 위안을 얻고, 주말엔 이런저런 개인적은 일들로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조금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며 요동쳤던 마음을 다시 가라앉혔다. 그 당시에는 너무 화가 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신이 점차 또렸해져갔다. 상황을 인지하고 파악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머릿속에서 상황 정리가 되니 마음에 굳은 결심이 생겼다. 그간 해이해졌던 공부를 다시 독하게 해야겠다고. 목표했던 일을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고. 그래서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말겠다고.
서재방 책상에 쌓여있던 짐을 정리했다. 자주 사용하지 않으니 결국 짐이 쌓이고 말았는데 주말 동안 싹 정리했다. 각 짐들의 자리를 찾아주고, 버릴 건 버리고 나니 깔끔한 공간이 생겼다. 공부할 책을 책상에 올리고 당장 펜을 잡았다. 안일해졌던 마음의 고삐를 이렇게나 바로 잡게 해주다니 이거 고마워해야 하나.
주말이 지나고, 다시 그 끔찍했던 순간들이 있는 곳으로 출근했다. 지난주, 업무 분장으로 치열하게 대치하던 팀장님과 팀원들에게 환히 웃으며 인사하고 대화를 나눴다. 마치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니 어쩌면 전보다 더욱 사이가 좋아졌다는 듯이 평소보다 더욱 환하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상처받은 마음은 숨기고, 프로의 웃음을 짓는 것. 그것이 바로 직장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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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며칠 뒤 퇴근 직전 화장실에서 팀장님을 마주쳤다. 나를 부르시더니 대뜸 미안하다고 하셨다. 내 의견을 물어보는 자리를 가졌기에 절대 강압이 아니라던 팀장님이 강압적으로 업무를 넘기게 되었다며 미안하다고 하셨다. 팀장님의 말에, 팀원들의 말에, 심장 떨려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지만 아니라고 괜찮다고 했다. 직장 생활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