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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토 Aug 26. 2022

집순이의 변심

익숙한 동네가 보이자 순간 가슴이 갑갑해졌다

희한한 일이다. 2박 3일의 여름휴가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익숙한 동네가 보이자 순간 마음이 갑갑해졌다. 모름지기 집순이라면 우리 동네가 보이면 안심하고 역시 집이 최고야를 외쳐야 하는데. 자타공인 집순이인 내가 왜 갑자기 마음이 갑갑해졌을까.






이 이야기를 하려면 지난번 코로나19에 걸렸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년 7개월간 잘 피해 다닌 코로나가 결국 나에게도 와버린 그때. 의무적인 자가격리 덕분에(?) 집에만 콕 박혀 일주일을 보냈다. 원래도 집을 좋아하는 집순이인지라 자가격리가 내심 반가웠던 건 사실이다. 몸이 아픈 것만 제외하면 갑자기 일주일의 휴가가 생긴 기분이었다.


몸이 아파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 보냈지만, 그 와중에도 깨달은 바가 있다. 한 가지 놀라웠던 건, 세상이 이토록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현재 내가 근무 중인 행정복지센터는 하루 종일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큰소리가 오가고 욕설도 난무하는 그런 곳이다. 1년 넘게 이곳에서 일하다 보니 늘 정신없고 산만한 분위기에 익숙해졌는데, 코로나 자가격리로 인해 집안에만 있다 보니 세상이 이토록 조용한 것이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아무도 내게 화내지 않고, 짜증 내지 않고, 무례한 요구를 하지 않는 평온한 하루.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하루하루가 평온하게 지나가는 것에 새삼 놀라며, 동시에 지난 1년간 안팎으로 정신없는 행정복지센터에서 매일을 버티며 견뎌온 내가 보였다. 나 정말 필사적으로 열심히 악으로 깡으로 버티고 있었구나.


안팎으로 정신없는 행정복지센터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 이유는 무례한 민원인뿐만 아니라 무례한 직장동료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어폰을 끼고 하루 종일 뭘 하는지 모르겠는 팀장, 윽박지르며 자신의 업무를 내게 넘기는 선임, 자신의 병가로 인해 한 달간 업무대행을 해준 나에게 까칠한 동료, 이런 팀이 싫어 훌쩍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 다른 선임까지. 여러모로 팀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상처받은 마음으로 그래도 웃으며 지내려고 노력한 나 자신이 너무 대견하고 한편으론 서글펐다.


그래서 더욱 이번 여름휴가를 기다렸다. 코로나 자가격리를 하면서 느낀 점들을 다시 한번 찬찬히 생각해보고 싶었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온 지난날들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원하는 건지 고민해볼 시간이 필요했다. 또 한편으로는 이런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그저 벗어나고도 싶었다. 직장이고 나발이고 그냥 쉬고 싶었다. 지친 것이다.






일주일간의 여름휴가 동안 2박 3일은 여행, 그 이후 시간은 집에서 휴식을 가지기로 했다. 여행은 그리 멀지 않은 인근 도시로 떠났다. 차로 1시간 3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다. 비행기를 탄 것도 아니고 배를 탄 것도 아니지만 익숙했던 지역과 공간을 벗어나, 낯설고 새로운 곳에 간 것만으로도 충분히 여행의 느낌을 누릴 수 있었다.


특히 여행지에서 숙소를 잡아 그곳에서 며칠 지내고 온 것이 매우 좋았다. 작가 김영하 님께서 어느 티브이 프로그램에 나와 사람들이 호캉스를 가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작가님이 말씀하시길 사람들이 호텔에 가는 이유는 그곳에는 우리 일상의 근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집에 있으면 세탁기만 봐도 저걸 돌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설거지를 해야 하나? 레인지를 닦아야 하나? 하는 등 일상의 여러 가지 근심이 있다고.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오래 살아온 공간에는 상처가 있다는 이유였다. 오랜 시간 지내온 공간에는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이 아니라 힘든 기억과 아픈 기억이 공존하기에, 훌쩍 떠나고 싶다라고 느낄 경우 굳이 먼 나라가 아니어도 일상의 상처와 기억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가까운 호텔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너무나도 공감한다.


호텔에서 지내며 집이 아니어서 불편함도 있었지만, 집이 아니어서 편한 점도 있었다. 하루 종일 밖에서 활동을 하고 온 후 지친 몸을 그저 뉘이기만 하면 되니까. 너른 욕조에 따뜻한 물을 담고 푹 들어가서 여행의 피로를 풀기만 하면 되는 곳. 그곳에는 내가 해야 할 설거지, 빨래, 청소 등의 집안일은 있지 않았다. 더불어 일상의 고민마저 없는 곳이다.






물론 여행도 좋았다. 나는 내가 새로운 시도와 변화를 썩 즐기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다. 미리 계획하고 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선호하고, 중간중간 생기는 변수에 스트레스받고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을 어려워하는 것이지, 새로운 시도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번 여름휴가 때 처음으로 서핑을 배웠다. 수영도 못하는 내가 서핑이라니. 남편은 걱정을 했지만 꼭 한 번 배워보고 싶었다. 20살에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을 때, 바다만 가면 보이던 서퍼들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파도를 타고 시원하게 바다를 가로지르던 모습. 내내 동경만 하다 이번에는 꼭 한번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서핑을 배우기로 한 날 비가 와버렸다.


서핑을 배우는 날 아침, 숙소에서 창 밖을 보니 비가 오고 있었다. 파도가 너무 거세면 어쩌지, 비가 와서 서핑 수업이 취소되면 어쩌지 걱정을 했다. 서핑을 배우기로 한 곳에 전화해보니 다행히 수업은 진행한다고 하였다. 오늘 파도가 좋다는 말에 마음이 다시 설레었다. 비가 오든 말든 서핑을 즐겨보기로 했다.


난생처음 서핑 보드를 들고 바다로 들어갔다. 날이 흐려 그런지 바닷물을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매일 바다에 들어가는 강사님도 오늘은 마치 겨울 바다 같다고 하였다. 추위를 무릅쓰고 서핑 보드에 올라갔다. 첫 파도는 느낄 새도 없이 그대로 바다에 풍덩 빠져버렸다.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바다에 빠져본 적이 언제였던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바닷물의 차가움에 왠지 모를 해방감이 들었다.


그렇게 몇 번 바다에 빠지고 나니 더 이상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초보에겐 다소 거친 비 오는 바다에서, 흔들리는 서핑 보드에 올라타고, 온몸으로 중심을 잡고, 짧은 시간 파도를 느끼고, 결국 바다로 풍덩 빠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왠지 모를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평생 해보지 않은 일을 처음 하며 재미를 느낀 것에 대한 쾌감이었을까. 서핑은 너무나도 정말 너무나도 재밌었다.






새로운 경험과 자극은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 같다. 특히 그 경험이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다면 더욱이 그렇다. 이번 여행을 통해 경험했던 새로운 것들은 나에게 좋은 자극으로 다가왔고, 이번 여행을 너무나도 만족스럽고 흡족하게 만들어주었다.


여행지에서 경험했던 새로운 음식, 새로운 풍경, 새로운 경험 이 모든 것이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오며 내 시각을 새롭게 열어준 것 같다. 특별히 남편과 단 둘이 낯선 곳에서 이것저것 헤쳐나가는 게 꽤나 즐거웠다. 길을 잘못 들기도 하고, 야심 차게 찾아간 맛집은 하필 휴무이기도 하고, 길을 헤매 같은 장소를 두 번 가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비가 오기도 했지만 둘이서 이 모든 걸 함께 겪으며 해결해가며 정말 즐거웠다. 꽤 조합이 좋은 콤비 같은 느낌이었달까.


그렇게 2박 3일의 짧다면 짧은 여행이지만, 하루하루 매일 새로운 자극으로 충분히 채워지는 것을 경험한 날들이었다.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 길 마저 여행처럼 즐거웠다. 물론 운전하는 남편은 고생을 했지만. 그렇게 1시간을 넘게 달려오니 드디어 저 멀리 우리 동네가 보이기 시작했다.






익숙한 아파트들, 상가들, 거리들.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고 사랑하는 우리 동네이다. 쉬는 날에는 동네 마트에 가고, 동네 맛집에 가고, 동네 산책하는 것을 제일 좋아할 정도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곳이다.


그런데 저 멀리 익숙한 우리 동네가 보이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갑갑해졌다.


지난 2박 3일간 잊고 지냈던 일상의 고민과 걱정거리가 다시 머릿속에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오만가지의 걱정이 떠올랐다. 돌아온 것이다. 나의 상처와 괴로움, 고통과 번뇌, 그리고 일상의 노동이 있는 곳으로.


평소 같으면 가까운 대도시만 다녀와도 우리 동네가 보이면 안심이 된다. '아, 드디어 우리 동네로 왔다. 집으로 왔다. 역시 집이 최고야. 집 나가면 개고생이지.'라는 마음이 우선으로 든다. 멀리 갈 필요 없이 동네에서 모든 걸 해결하는 것을 선호하고, 집에서 모든 걸 해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내가 동네가 보이자마자 약간의 반가움과 동시에 아쉬움, 갑갑함, 심지어 돌아가기 싫다는 마음까지 들다니. 양가감정이었지만 반가움보다는 싫은 감정이 더욱 컸다.


여행을 처음 출발할 당시만 해도 내 마음의 이런 변화는 상상도 못 했다. 사실 여행을 위해 집을 나설 때만 하더라도 '아유, 괜히 여행을 간다 했나. 집이 제일 편할 텐데. 사서 고생을 하는 건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차를 타고 멀리 가는 것도 피곤한 일이고, 낯선 곳에서의 짧은 생활마저 부담으로 느껴졌다. 여행지에 도착했을 때도 설렘과 신남보다는 피곤함이 더 컸다. 매일 업무에 찌들어 살다 보니 체력도 떨어져 그저 소파나 침대에 누워 쉬는 것이 최고인 여느 직장인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새로운 경험은 신선한 자극이 되었고, 낯선 곳에서의 생활은 나를 자유롭게 했다. 일상의 고민과 노동이 있던 장소를 벗어난 것만으로도 해방감이 들었던 것 같다. 일시적인 해결이고 해방이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렇게 점점 우리가 탄 차는 동네 입구로 들어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조명이 켜진 거리를 지나가며 또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그건 바로 그동안 내가 너무 공무원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바라봤다는 점이다. 직장에 가면 앞에도 공무원, 옆에도 공무원, 뒤에도 공무원이 있다. 심지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동기들조차도 공무원이다. 그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공무원화 되어버린 것 같다. 모든 것을 공무원의 시선으로 보는 공무원화 말이다.


또한 그간 공무원 조직 내의 일에만 너-무 몰두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곳에서의 나의 존재감과 보람을 얻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 것 마냥. 세상엔 다양한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에게 서핑을 가르쳐준 서핑 강사만 해도 그렇다. 멋지지 않은가. 매일 바다를 보며 사는 삶. 매일 바다를 가르며 파도를 타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삶. 


물론 저마다의 고충이 있겠지만, 내 말의 포인트는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다는 거다. 그런데도 나는 너무 공무원 조직 내의 일이 세상의 전부인 양, 이 일에 화내고 저 일에 분노하며 너무 일희일비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내가 이번에 깨달은 이런저런 생각들을 남편과 언니에게 말하니, 언니는 나보고 어디 멀리 유럽 여행이라도 다녀왔냐며, 순례길이라도 걷고 왔냐고 했다. 어디 외국의 먼 나라라도 다녀오며 깨달음을 얻은 것 마냥 말하니 조금 웃겨 보였 나보다. 내가 생각해도 참 웃긴 일이다. 차로 1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는 인근의 도시를, 그것도 고작 2박 3일 다녀왔을 뿐인데 이런저런 깨달음을 얻었다니. 웃기지만 사실이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경험, 새로운 시도, 새로운 음식들이 나에게는 새로운 자극이 되어 일상의 생각을 깨 주고 그 생각 속에 갇혀 있던 나의 시선 또한 자유롭게 해 주었다. 이렇게 어제와는 조금 다른 내가 되어 있는데, 어제와 같은 장소로 다시 돌아오니 이전의 괴로웠던 감정들이 다시 떠올라 순간 갑갑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숱한 고민들을 하던 장소, 매일 반복되는 노동이 있는 곳, 가끔은 눈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뜬눈으로 새벽을 맞이하기도 한, 악으로 깡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매일 아침 출근을 하던 그곳. 그곳이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우리 집이라는 사실이 조금 슬프지만, 좋은 기억들과 함께 아픈 기억도 공존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마음을 달리 먹어보려고 한다. 장소는 같지만 사람의 마음은 다를 수 있지 않은가. 이전에 고민하던 많은 걱정거리들, 스트레스들, 안 좋은 기억들. 모두 지워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마인드로 살아가 보려 한다. 편협했던 시선을 깨고, 좁디좁았던 세상을 넓히고, 새로운 경험으로 채워가는 삶. 이런 휴가 버프가 얼마나 갈지 모르지만, 그래도 좋은 경험이 쌓이고 또 쌓이다 보면 점차 변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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