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 타데마_애원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푸트니크의 연인』은 ‘스미레’에 대한 혼자만의 사랑에 빠져있는 ‘나’, 그리고 17세 연상의 동성 여인에 대해 역시 혼자만의 사랑에 빠져있는 ‘스미레’에 대한 이야기다. 짝사랑이라 하면 안타깝거나 애틋한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너무 쿨하다. ‘나는 널 사랑하지만,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 것을 개의치 않아.’ 뭐, 이런 투다. 마치 그 유명한 ‘투르게네프와 폴린 비아르도의 사랑’을 연상케한다.
너무 쿨한 사랑.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사랑한다면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려서라도 곁에 두거나, 혹은 무릎 꿇고 애원이라도 해서 곁에 머물 수 있어야 되는 것, 아닐까?
런던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아주 작은 미술관인 ‘런던 길드홀 아트갤러리’가 나온다. 밖에서 보면 그냥 오래된 런던의 건물인 듯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단정하면서도 화려한데 그렇다고 사치스럽지는 않은 작은 미술관이다. 그리 유명하지 않아서 관람객도 적고, 규모도 작아서 돌아보기에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미술관이었다. 지하실에는 로마의 원형 극장 유적도 있고, 그림들은 대부분 빅토리아 시대 유화들이 있다. 미술관에서 내 시선을 끌었던 건 로렌스 알마 타데마의 ‘Pleading(애원)’이라는 찌질한 현실의 사랑을 묘사한 그림이다.
‘Pleading(애원)’은 고대 로마의 의상을 입은 연인이 등장한다. (정면을 보고 있는) 황금빛 곱슬머리 여성은 왼쪽 다리를 살짝 올려 놓은 상태로 무언가의 생각에 빠져있는 듯하다. 왼손으론 턱을 괴고 있는데 가운데 손가락과 약손가락을 입술에 살짝 대고 있다. 반면에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은 누운 체로 왼손으론 여성의 옷깃을 살짝 잡고, 오른손으론 턱을 괴고 다리는 엇갈려놓은 상태다. 살짝 올려다보고 있는 남성의 두 눈엔 여성에게 무언가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런데 여성은 남성의 눈을 외면한 체 정면을 응시하고 있어, 살짝 긴장감마저 돌게 한다.
여성의 무릎에는 꽃이 보이는데 아마도 방금 전 남성이 사랑을 고백한 듯 하다. 그런데 여성은 남성의 고백이 왠지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른다. 꽃에게도 눈길이 주지 않고, 한 송이는 아예 무릎 밖에 떨어져있기까지 하다. 멋진 콧수염의 남성이 매력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낡은 옷과 헤진 신발이라니, 어쩌면 이 남자는 가난할지 모른다. 그래서 달갑지 않은 고백이었을까?
이 그림이 재밌는 것은 남자는 귀여운(?) 애원이다. 왼손으로 여자의 팔꿈치 옷자락을 소심하게 잡아당기고 있다.
‘어서 내 사랑을 받아줘요. 제발 날 사랑한다고 말해요. 그대가 날 떠난다면 난 죽을지도 몰라. 그러니 제발!’
애처로운 남자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고작 옷소매나 잡으면서 사랑이 이뤄지길 바라니 잘될 턱이 있나. 그런데 가난한 남자의 현실에서 생각해보면, 특별히 뭐라 말할 게 또 있을까? 애원하며 내 곁에 머물러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
나도 뭐 크게 다르지 않았다. 쥐뿔도 가진 게 없었던 난 지금의 아내에게 결혼하자고 애원했다. 조금 다르다면 뻥을 좀 쳤다는 것? ‘매년 금반지 정도는 하나씩 사주겠다, 그리고 가끔 명품백도 사주겠다.’라고. 그래서 애원이 통했는지,‘뻥’에 넘어갔는지 확인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명품백은 커녕 반지도 결혼한 지 16년이 지난 올해가 되어서야 겨우 하나를 사줬을 뿐인데도 살아주고 있는 걸 보면 애원이 통했던 것 같다.
이런 현실적인 사랑이 느껴져 웃픈 알마 타데마의 ‘Pleading(애원)’. 사랑은 결코 쿨하지 않다. 사랑한다면‘Dream With Me.’라 말해서라도 꼭 붙잡길. 그냥 그렇게 지나가고 나면 평생 후회할지 모른다.
■ 참고
1. 투르게네프는 1843년 <세비야의 이발사>에 출연한 폴린 비아르도의 공연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런데 이미 폴린 비아르도는 루이 비아르도와 결혼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린에게 연서를 보내기도 하고 그녀의 남편인 루이와 친구도 된다. 루이는 투르게네프가 폴린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같은 집에서 셋이 지내기도 하고, 폴린과 투르게네프 둘이 파리로 가는 것을 이해해주기도 한다. 결혼으로 결실을 맺지는 못하지만 투르게네프는 폴린 곁에서 1883년 숨을 거둔다.
2. 세인트폴대성당은 1981년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찰스 왕세자가 결혼식을 올린 곳으로도 바티칸 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성공회)성당이다.
3. 알마 타데마는 네덜란드 출생으로 1870년 런던으로 건너가 주로 고대 그리스, 로마, 이집트 등을 주제로 작품을 많이 그렸다.
4. 이 글의 제목 ‘Dream with Me’는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의 뮤지컬 <피터팬(Peter Pan)>에 삽입된 곡으로 주인공 피터팬을 지키는 웬디 요정을 위해 작곡된 것이긴 하지만 꿈속에서라도 만나고 싶은 간절함이 담겨있다. 혹시 사랑하는 여인에게 고백하고 싶다면 조수미의 ‘Dream With Me’를 배경음악으로 깔고 도전해보자. 달달한 음악에 혹! 사랑이 이뤄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