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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회 Jan 08. 2021

15. 두 달에 400만 원

어휴.. 어휴... 어휴...!!

김 조카는 경제관념이 없었다. 단순히 돈 절약하는 법을 모르는 게 아니라,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와 지금 자신이 아껴야 하는 상황인 것조차 몰랐다.


녀석의 시력이 안 좋다기에 라식수술을 권했다. 같이 안과병원에 가서 코디네이터를 통해 각종 수술과 비용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과거에 내가 수술을 받았을 때보다 금액이 많이 비싸서 조금 놀랐다. 괜한 걸 추천했나 싶어 내심 걱정이 됐는데, 조카는 해맑게 웃으며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제일 비싼 200만 원대의 수술을 골랐다. 이런 상황에 해맑은 웃음이라니..  


물론 김 조카에게 수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와 다른 후원자들이 열심히 모아준 디딤씨앗통장 예치금으로 2,000만 원 넘는 목돈이 있었고, 정부의 정착지원금 500만 원, 용돈 통장에도 수백만 원이 있었다. 거의 3천만 원가량 가지고 있었으니 스무 살짜리가 가지기에는 큰돈이었다. 내가 수술시켜 주는 게 아닌 데다가 몸에 칼을 대는 일인데, 의료지식 없는 내가 싼 걸 기준으로 권하기는 부담감이 있어서 반대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김 조카는 200만 원이 얼마나 큰돈인지와 이 돈이 앞으로 살아가는데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자신의 경제적 상황을 전혀 몰랐다. 


물건을 구매할 때는 그랬다.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선물용 케이크를 구매하는데 조카는 고민 없이 제일 큰 5만 원짜리 케이크를 골라서는 바로 현금으로 계산하려 했다. 내가 통신사 할인을 받지 않느냐니까, 그럴 필요 있냐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통신사 할인에 특별한 노력이 드는 것도 아니고, 할인받으면 10%인 5천 원이나 할인이 된다고 얘기했지만 조카는 귀찮아하며 5만 원을 바로 현금 결제해버렸다. 물건을 살 때 조카는 가격을 따져 보지 않고 할인이나 적립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경제관념도 부모의 절약과 소비습관을 따라간다. 7살 무렵 나는 매일 어머니께 “엄마, 100원만 주세요.”하고는 하루 100원씩 용돈을 받아 갔다. 어머니는 내 별명을 ‘백 원만’으로 지어주셨다. 하루에 나를 불러 매일 100원씩 가져간다면 일 년에 36,500원이라는 큰돈을 쓰게 된다고 하셨다. 내게는 한 번도 가져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큰 금액이었다. 그런 얘기를 들으니 내가 낭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2주에 1,000원씩 용돈을 받았다. 어머니는 나를 농협으로 데려가 통장을 만들고 저축하는 법을 알려주셨다. 나는 용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2주마다 은행을 찾아가 저축했다. 당시는 은행 이율이 10%대 였기에 원금에 고금리 이자까지 통장에 찍히는 게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래서 용돈을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세뱃돈까지 모두 모으니 2년 만에 10만 원이 생겼다. 그 후로 나는 돈 모으는 계획에서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오히려 1년에 25만 원을 모으기로 계획했다면 35만 원을 모았고, 일단 계획을 세우면 다른 지출을 줄여서 (심지어 배를 굶어서라도)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하지만 김 조카는 부모 곁에서 그런 경제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이 부분에서 나와 다른 후원자들의 소비하는 모습이 김 조카나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하게 되었다. 후원자들은 대개 경제적 여유가 있기도 하고, 아이들에 대한 동정심이 있어서 비싸도 맛있는 음식이나 좋은 물건을 사주려고 노력한다. 검소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도 아이들 앞에서 싼 음식점을 찾아 돌아다니거나, 아이를 옆에 세워놓고 가격을 가지고 열심히 흥정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시간이 지날수록 챙기는 아이들이 늘어서 김 조카 외에도 초등학교 저학년 조카까지 다섯 명을 데리고 다녔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이동하기도 했고, 편하게 돈을 쓰는 모습을 보였다. 후원자들의 여유로움이 아이들에게 돈은 이렇게 폼나게 쓰는 거라는 착각을 심어주는 게 아닌지, 소비습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닌지 고민하게 되었다.



당신 나는 통영에서 근무하고 있었기에 김 조카의 정확한 생활모습은 알 수 없었지만, 음식물 쓰레기와 종량제 봉투의 배출양으로 봤을 때 김 조카가 돈을 아끼지 않고 음식을 시켜 먹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녀석은 주말에도 종종 친구들이랑 놀고 늦게 들어왔다. 코로나로 인해 학교를 가지 않으니 대학생들에게는 남는 게 시간이었다. 거기다가 김 조카는 다른 스무 살들과 다르게 돈도 많았다.


김 조카가 목돈을 다 써버릴까 봐 걱정되어 아르바이트를 구하라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코로나 때문에 알바 자리가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내가 구직 사이트에 찾아보면 아르바이트는 넘쳐났다. 정부에서 매달 꼬박꼬박 85만 원을 통장에 입금해 주고, 생활비도 내가 부담하니 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공부라도 하면 다행일 텐데. 김 조카는 열심히 놀러만 다녔다. 


다른 보육원에 후원하는 조카 Y를 보러 간 날, 그 시설에서 올해 퇴소한 아이들을 만났다. 김 조카와 동갑인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 퇴소하고 6개월 동안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를 얘기했다. 한 아이는 수영강사로 새벽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히 생활하고 있었다. 다른 아이는 현장일을 하면서 월 300만 원 정도를 벌었고 월급을 거의 다 저축했다. 다른 한 명은 내가 현실 시계에서 본 인간 중 가장 몸이 좋았다. 마치 터미네이터 같았는데 운동 특기생으로 대학을 다니며 보디빌더로 전국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얘기를 듣고 있으니 ‘아빠 친구 아들’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올랐다. 김 조카와 다른 아이들의 삶의 모습이 비교되자 부럽기도 했고, 한편으론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 방임으로 김 조카의 삶이 망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되었다.



김 조카는 아침 10시가 넘어서 겨우 일어났다. 12시가 넘어서 일어나는 경우도 많았다. 일어나자마자 하는 일은 드라마 시청이었다. 점심 먹은 후엔 잠깐 대학교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틀어만 놓았다. 그러고는 딴짓을 했다. 새벽까지 드라마 시청과 게임을 번갈아 했다. 생산적인 일이나 자기 발전을 위해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자주 나가 놀았다.


안 되겠다 싶어 녀석의 통장을 가져오라고 했다. 혹시나 어떻게 지출을 하는지 확인해 봐야 했다. 다행히 디딤씨앗통장까지는 손이 닿지 않았지만, 이미 정부지원금과 용돈 통장은 거의 다 사용하고 없었다. 라식수술에 200만 원 넘게 들어간 건 그렇다 쳐도, 유흥비로 두 달 동안 400만 원을 썼다. 김 조카를 어찌 된 일인지 물었다. 친구들이랑 내기 게임을 했는데 지는 사람이 술값을 다 낸다고 했다. 처음에는 내기에서 이겨 술 값은 안 낸 적이 많았는데, 뒤로 갈수록 내기에 져서 자신이 다 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하.. 한 숨이 나왔다. 녀석에게 설명했다.


“삼촌이 너와 이렇게 가까워지고 같이 살게 될지 몰랐을 때, 네가 보육원을 퇴소하면 방을 잡아야 하니까 보증금이 없을까 봐 디딤씨앗통장을 만들어서 매달 8만 원씩 모았어. 그렇게 3년을 꼬박 모아서 만들어진 돈이 300만 원이란다. 그런데 네가 두 달 동안 노는데 400만 원을 썼네? 삼촌이 너를 위해 노력한 3년의 시간보다 1년을 더 사용한 거야. 두 달 동안 술값으로.”


김 조카는 이후에 밖으로 덜 나가게 되지만, 그건 디딤씨앗통장 외에 돈이 없어서였다. 정부지원금 85만 원이 들어오는 날이면, 직장인이 월급날을 기다렸다는 듯이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다 왔다. 주말에 부산으로 돌아올 때마다 짜증이 났다.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과 한숨도 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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