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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회 Jan 20. 2021

20.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당연했던 것들을 당연하지 않았다

퇴근하면 집이 너무 따뜻한 것 같아 가스계량기 수치를 확인한 후, 김 조카에게 지난달 가스 점검 수치를 물었다. 혼내려고 물어본 게 아닌데 녀석이 뜨끔 했는지 얼마 안 틀었다며, 지난여름에도 에어컨 얼마 안 틀었는데 전기세가 많이 나왔다고 했다. 이번에도 전기세 많이 나오는 거냐고 물었다(녀석은 여름에 자기 방에 틀어 박혀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었다).     


그래서 집집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개 보일러•온수는 가스비이고 전기세와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녀석은 가스계량기 사진을 보며 어느 부분이 전기고 어디가스 수치인지 물었다.  


어이가 없었다. 가스계량기를 보면서 빨간색과 검은색을 가스 검침표와 전기 검침표로 나눠서 생각한 것이다.    


조카는 가스계량기의 검은색을 가스, 빨간색을 전기 수치로 생각했다. 그래서 전기계량기와 LPG 가스통까지 보여주며 설명했다.


스물한 살. 김 조카. 가스비와 전기세를 구분하지 못한다. 두 계량기가 다르다는 것도 모른다. 그래서 계량기를 구분해서 보여주고 가정용 가스에 대해서도 LPG와 LNG로 나눠서 설명했다. 너무 당연하게 알 거라고 생각하는 걸 20년 넘게 산 인간이 모른다는 놀라웠다. 문득 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 스무 살. 보육원에서 독립한 아이가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40만 원의 방을 잡았다. 기초생활수급비와 자립 수당으로 매달 85만 원이 나왔다. 매달 큰 용돈이 생기자 아이는 일도 안 하고 사고 싶은 물건도 사고 먹고 싶은 것도 먹으며 마음껏 자유를 누렸다. 1년의 임대차 계약 기간이 끝나자 집주인이 나가라고 했다. 아이는 어설프게 임대차 보호법을 들먹이며 1년 더 있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곤 당당하게 "그럼 내 보증금 돌려주세요."라고 말했다.      


돌려받은 보증금은 20만 원. 월세를 내야 한다는 기본적인 것조차 몰랐다. 1년 치 월세 480만 원을 공제하니 남은 게 그것뿐이었다. 1년 동안 놀기만 했기에 모아둔 것도 없다. 아이는 생각했다. 왜 나에게 이런 당연한 것조차 알려줄 사람이 없었을까? >   



김 조카를 보면서 생각한다. 어릴 때 엄마를 따라나가 음식물과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가스 밸브 잠그라고 신신당부를 듣고, 설거지가 끝나면 싱크대 정리하라는 잔소리를 들은 기억. 여행 갈 때 리스트를 만들어서 줄을 그어가며 물건을 준비하고 이른 새벽에 일어나 상을 펴 놓고 조용히 책을 읽던 아빠의 습관들. 편식을 하고 아침에 혼자 못 일어난다고 혼내시던 아빠와, 그런 나를 아침마다 깨우고 편식을 하니 오히려 좋아하는 미역국을 3개월간 끓여주던 엄마. 그렇게 잔소리를 듣고 보살핌을 받고 어깨너머로 겪었던 부모님과의 사소한 일상들이 모두 배움의 순간이었다는 걸.     


서점에 책을 사러 간 날. 죄와 벌을 선택했으나 어렵다며 읽지 못했다 / 김 조카와 조카 S, S 남동생까지 세 명의 조카와 함께 한 생일


나라는 사람은 그런 부모님의 수많은 습관과 가르침과 보호 아래서 하나의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해 갔다는 것. 부모의 어깨너머로 배우지 않았으면 껍데기만 성장한 어른이 될 뻔했다는 사실. 김 조카를 볼수록 내가 작아지고 부모님의 존재가 크게 느껴진다.


내 조카들처럼 책임감 없는 부모를 둔 아이들이 있다. 사회적 이슈로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산 정인이의 양부모처럼 비정상적인 이들도 있다. 하지만 대개 우리는 성인이 되기까지(성인이 된 후에도)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사소한 것 하나까지 부모를 통해 전수받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너무 당연하게 알고 있는 것들은 사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가족들끼리 둘러앉아 밥을 먹는 것처럼 너무 사소한 기억들이라 추억 삼지도 못했을, 그 수많은 순간들이 모여 나를 한 명의 사회인으로 성장시켰다.



나를 처음 아빠라고 불렀던 중학교 졸업식


어쩌면 누군가의 부모가 되고 누군가의 자식이 된다는 것은 기적일지도 모른다.

부모님의 걱정과 두려움을 녀석을 통해 느끼고 보람과 기쁨 또한 녀석을 통해 얻는다. 조카를 통해 현 제도와 금전적 지원 내지 봉사활동 만으로 아이들의 사회정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 수 있는지,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부모님께 어떤 자식이었을지도 녀석을 통해 알아간다.


김 조카를 통해 나는 그렇게 아버지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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