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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회 Jan 19. 2021

19.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김 조카에게 모진 말을 한 다음 날부터 다시 출근을 했다. 트레이너 선생님을 통해서 간간이 소식을 들었고, 집에 오면 냉장고와 음식물 쓰레기통을 열어보며 녀석이 밥을 잘 챙겨 먹는지 뭘 먹고 지내는지를 확인했다. 내가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고 있으면 녀석도 늦어도 7시 반에는 일어났다. 아침 일찍 조카의 방 안에서 뉴스 소리가 들렸다.


첫날엔 뉴스 내용을 내가 물었는데 10분보다 졸았다고 허허거렸다. 그래서 하는 척만 하지 말고 제대로 하라고 혼냈다. 다음 날은 졸지 않고 끝까지 봤다고 했다. 그런데 뉴스의 내용을 묻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나는 책을 한 권 가져와서 처음부터 끝까지를 펼쳐 넘겼다. 책은 ‘촤라락’ 소리를 냈다. 처음부터 끝까지 넘어가는데 2초도 걸리지 않았다.


“자, 방금 삼촌이 책을 한 권 다 읽었어. 내용을 알고 있을까? 없을까? 당연히 모르겠지. 눈으로 넘기기만 했으니. 내용을 모르면 한 게 아니야. 하는 척만 한 거지. 삼촌이 뉴스를 보라고 한 건 네가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야. 얼마 전에 수능 응시생 숫자와 출생아 감소에 대한 뉴스가 있었어. 삼촌 세대에 수능 응시생은 80만 명이었어.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은 40만 명이네. 그리고 지금 연 출생아수는 20만 명대야. 20년마다 절반씩 줄어들고 있지. 이게 왜 중요할까? 네 꿈은 사회복지사잖아. 아이들이 좋아서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은 거잖아. 그런데 미래에는 노인인구는 많고 애들은 적어. 사회복지사가 취업할 시설은 노인요양시설도 있고 장애인시설도 있고 보육원도 있어. 아이들이 적고 노인들이 많아진다면 너는 보육원에 취업하기 힘들 거야. 보육원은 경쟁이 치열할 테니까. 그럼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 사회복지사들 사이에서 너의 경쟁력을 높여서 보육원에 취직하든, 아니면 아예 아이들만 상대하는 유치원 선생님 같은 쪽으로 진로를 바꾸든. 삼촌이 뉴스를 보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가 앞날을 설정하고 살아가는데 이런 정보들이 도움을 주기 때문이야. 그러니 눈만 두고 보는 척하지 말고 제대로 내용을 알아야 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뉴스를 시청한다.

다음 날 뉴스의 내용을 물어봤더니 녀석은 꽤 기억을 해내었다. 그리고 내가 퇴근해서 집에 오면 예전과 다르게 시사적인 것을 물어보기도 했다. 물론 나도 녀석과 얘기에 답해줘야 하니 새벽 6시에 러닝머신에 올라 한 시간씩 뉴스를 시청했다.


조카는 내가 시킨 대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뉴스를 보고 나면 운동을 했다. 이제 다른 것도 시켜보고 싶어서 책을 한 권 주며 읽어보라고 했다. <은하영웅전설>이라는 SF 판타지 소설이었는데, 유치한 제목과 다르게 사회·정치체제에 대한 설명이나 인간의 심리에 대한 묘사가 잘 되어 있었다. 만약 시황제가 다시 탄생해 분서갱유가 일어나고 모든 책을 불태울 상황이 발생한다면, 이 책을 숨겨서 후세에 남겨주고 싶다고 평가할 정도로 내가 애장 하는 작품이었다.



김 조카가 며칠 뒤에 내게 물었다.

“삼촌, 왜 황제가 공화주의자들을 공격해요? 공화주의랑 공산주의랑 같은 거 아니에요? 황제와 공산주의자들은 같은 편 아니에요?”

조카는 중국이나 북한을 통해본 공산주의의 독재 이미지와 황제의 전제정치를 같은 것으로 헷갈려하는 듯했다. 황제로 상징되는 전제주의와 공화주의를 비교 설명했다. 공산주의는 경제 운영 방식으로 대비되는 것은 자본주의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점.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정치 운영 방식으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같은 개념은 아닌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북한이라는 존재의 특수성 때문에 많이 혼동한다는 점까지 설명했다. 조카가 책과 뉴스를 보게 되면서 우리의 질문과 대화 내용이 확연히 달라졌다.


그리고 조카는 내 독설을 들은 다음 날 바로 아르바이트를 구해왔다. 하나는 친구에게 소개받은 뷔페 주말 알바였고, 다른 하나는 평일 저녁에 하는 시내 술집 서빙이었다. 찾을 수 있는데 기초생활수급자의 안락함에 젖어 알바 찾기를 회피하며 변명하고 있는 것이라는 내 예상이 맞았다. 집에서 놀면서도 85만 원이 나오니까 일하기 싫었겠지. 하지만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뉴스 시청 후 PT를 받는 김 조카. 하체 운동을 제일 힘들어 한다.

뉴스 시청과 운동, 독서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일상의 다른 모습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예전에는 분리수거 쓰레기 배출이나 빨래 등을 내가 시켜야 하거나 정말 잔뜩 쌓이기 전에는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내가 퇴근해서 처리하려고 하면 이미 정리되고 없었다. 음식물도 전보다 덜 버리게 되고 시켜먹지도 않았다.



저녁 때는 자유시간을 줬기에 내가 퇴근하고 들어오면, 조카는 자기 일을 마친 후 방에서 드라마를 보거나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럼 내가 노크를 하고 문을 열고 안부를 물었다. 특별히 할 말도 없으면서 내가 매일 퇴근하고 자기 방을 찾는 걸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언젠가는 “삼촌, 하실 말씀 있으세요?”라고 물었다. 그래서 웃으며 대답했다.


“가족이 할 말 있어야 문 열고 인사하는 사이냐? 집에 어른이 들어오면 자식이 나와서 ‘다녀오셨어요’라고 인사하는 게 정상이다. 내가 퇴근해도 네가 방에서 안 나오니까 너 얼굴 보러 들어오는 거다. 이 배은망덕한 놈아.”


그 이후로 조카는 게임을 하다가도 문 소리가 나면 후다닥 달려 나와 인사를 했다. "삼촌 이 게임만 하고 다시 나올게요."라며 급하게 게임을 하러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게임이 끝나면 거실로 나와 오늘의 이슈나 보육원의 현재 상황, 다른 조카의 상황, 자신의 오늘 하루의 일과와 앞으로의 계획 등을 30여 분간 얘기했다. 그리고 밤 10시 반쯤이 면 자러 들어가겠다며 인사를 하고 방에 들어갔다.



우리 아이가 이렇게나 달라졌다. 아직 나의 눈에는 성이 안 차는 것도 많지만, 김 조카는 이제 독립해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청년이 되어 가고 있고 우리도 서서히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를 띠어 가고 있었다. 내 동의도 얻지 않고 자식 하나를 맡기신 어떤 신이, 이 상황을 엉망으로 방치할 만큼 그렇게 무책임하지는 않았나 보다. 내가 아이를 망쳐가는 게 아닌가 걱정한 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극적인 반전이었고 조카의 긍정적인 변화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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