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키색 수의를 입고 짧은 더벅머리를 한 채 법정에 서 있는 이 청년. 참 왜소하고 볼품없다고 생각했다. 20대 초반이라는 나이라면 뭘 입고 있어도 빛나고 활력이 느껴질 것 같은데, 처음 그가 법정에 들어올 때 꼽추가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육안으로도 기록상으로도 문제는 없었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도 잠시 의심했지만 그 역시도 아니었다. 이 왜소한 남자는 무슨 죄를 지어 법정 앞에 선 것일까. 기록을 들여다본다.
절도죄. 아직 이십 대 중반인데 전과가 상당하다. 건강해 보이지는 않지만 팔다리 멀쩡한 친구가 왜 이렇게 젊은 나이에 나쁜 분야 하나에 집중하고 있는 것일까?
조금 더 기록 속으로 들어가 본다. 가족이 없다. 어린 시절 보육시설에서 자랐다. 보육시설에서 학대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시설을 탈출했다.
지금이야 세상이 좋아져서 학교도 어린이집도 보육시설도 모두 아이들의 학대를 막는 감시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지만, 내가 어린 시절에도 학교에서 비인격적인 모욕과 체벌이 심했다. 짐승처럼 에너지와 반항기가 넘쳐나는 시기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일부 선생님들은 학생을 정말 짐승 다루듯 심각하게 대했다.
중학교 1학년 기술 시간이 떠오른다. 첫 대면 때 선생님이 야구방망이를 어깨에 걸치고 교실로 들어왔다. 야구방망이는 4면이 매끄럽게 깎아져 있었다. 그리고 그 깎인 면에는 자랑스러운 듯 이름 석 자가 빨간 매직으로 적혀 있다. “최ㅇㅇ”. 중학교를 졸업한 지 20년이 더 지난 지금도 그 이름 석 자가 잊히지 않는다. 그 후 비인간적인 체벌과 고통은 아직까지 그 야구방망이에 빨갛게 적힌 이름과 함께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학대를 못 이겨 시설을 탈출한 중학생.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미성년자다. 보호자도 없다. 학위도 없다. 특별한 지식이나 기술이 없을 것도 당연하다. 왜소해서 몸 쓰는 일도 할 수 없었을 거다. 그가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는 거다.
가장 가까이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은 편의점. 배고픈 그는 편의점에 가서 삼각김밥과 빵을 주워 든다. 하지만 돈이 없다. 편의점을 그냥 빠져나온다. 배우지 않았어도 달리기는 할 줄 안다. 열심히 달린다. 주인이나 아르바이트생의 눈에 띄지 않았으면 다행이다. 설령 들켰다고 해도 운이 좋으면 잡히지 않는다. 미성년자라 지문이 등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경찰이 CCTV로 추적에 실패한다면 그에게는 성공이다.
그렇게 며칠은 운이 좋았을 거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아직 미성년이니 소년재판을 받는다. 운이 좋으면 보육시설로, 나쁘면 소년원으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또 보육시설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한다. 그러고는 이런 상황이 반복적으로 돌아간다.
시간이 흘러 보호와 교화의 대상으로 관리되었던 소년범은 처벌의 대상인 성인범이 된다. 가족도 돈도 학위도 지식도 기술도, 가지지 못한 그에게 한 가지 늘어난 것이 있다. 바로 수회의 절도 전과. 세상은 전과자를 손가락질하고 성인이 되어 스스로의 의지로 활동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이제 그 누구도 이 소년이었던 남자를 써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한 남자가 오늘 이 법정 앞에 서 있다.
“피고인에게 이미 수차례 동종 전과가 있고 피해자들의 피해를 회복하지 못한 점의 양형에 불리한 사유가 있으나, 피고인이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왔고 깊이 뉘우치고 반성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형을 선고합니다. 피고인을 징역 1년에 처한다.”
그가 훔친 것은 고작 삼각김밥과 빵, 우유 몇 개. 만 몇천 원 정도. 그럼에도 무거운 실형 선고에 연거푸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이고는 구치소 직원들에게 이끌려 법정을 떠났다. 회삿돈 수백억 횡령한 재벌 회장님은 집행유예로 풀려나는데 장발장같이 고작 빵이나 삼각김밥 조금 훔친 사람이 실형이라면 대중들이 납득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재판을 마치고 담당 판사께 피고인이 ‘전과가 꽤 있긴 하지만 형량이 센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판사도 이런 판결을 하는 게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했다. 다만 발견되어 기소된 게 만 몇천 원일뿐이고 발견되지 않아 처벌되지 못한 금액은 훨씬 클 것이다. 또 피고인은 일자리를 찾을 능력이나 사회에 보금자리가 없어 추운 겨울에도 길거리에 노숙하며 계속 도둑질을 할 것이고, 그러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편의점주 등 자영업자들이 떠안게 되니 차라리 피고인을 교정시설에서 보내는 것이 자영업자의 피해를 막고, 그도 먹고 자는 것 걱정을 안 하게 될 거란 얘기를 했다. 오히려 수백억 횡령한 재벌 총수는 최소한 자기 사재를 털어서라도 횡령자금을 되돌려 놓을 테니, 피해는 회복되지 않느냐는 얘기도 했다. 피해당하는 쪽에서는 상대를 강하게 처벌하는 것보다 내 피해가 회복되는 게 더 중요할 테니까.
판사의 논리에 설득당했다. 현재 이 사람을 사회가 구원할 방법은 마땅치 않다. 징역 1년의 실형이 당장 그에게는 의식주를 해결하는 최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이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이러한 불행한 사이클로 평생을 살아가는 장발장이 계속 나오는 것을 사회가 막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한 번 범죄자가 평생 범죄자가 되어야 하는 세상이라면 범죄자가 되기 전에 뭔가 조치를 취해줬어야 하지 않나? 그는 왜 장발장이 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