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만이 살아남는다

- 2025년 8월 28일 목요일 -

by 최용수

♡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 1844~1908)

<세헤라자데 op.35 / Shekherazada op.35>


https://www.youtube.com/watch?v=7Q32vGH2Fzw (2악장)


제목의 배경영상 속 고릴라는 내가 어제 AI 영상제작 실습과정에서 OpenAI의 Sora로 만든 고릴라 영상이다. 전문 사진가가 아주 공들여 찍은 사진보다 더 사실적으로 보인다. 자연다큐멘터리 제작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가 동물 피사체를 찍을 때이다. 특히 멸종 위기종의 동물을 찍으려면 먼저 생태에 대한 충분한 학습부터 이뤄져야 한다. 주요 서식지, 번식 시기, 이동 경로, 먹이 습성 등 충분히 해당 피사체에 대해 공부를 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영상으로 담아내기까지는 오랜 기다림과 행운(幸運)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전에 환경스페셜을 제작하며 '삵'을 찍기 위해 그 흔적을 쫓은 적이 있는데, 철저한 사전 조사와 준비가 이뤄지지 않아 삵의 배설물만 실컷 찍었다. 몇 주를 산에서 허비하고도 삵에 대해 쓸만한 한 컷도 만들지 못했는데, 이제 세상은 AI 도구를 활용해 고작 2분도 안 되는 시간에 이런 결과물을 만들어낼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AI 도구를 통해 예제 영상을 만들어놓고 나니 영 마음이 불편하다. 내가 삵의 영상을 찍기 위해 몇 주를 산속에서 헤매고 다녔던 것처럼 AI가 만든 고릴라 사진의 원본은 그동안 수많은 동물학자와 생태학자, 사진작가와 카메라 감독들의 노력을 통해 확보된 사진이나 영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AI가 짧은 시간에 만든 영상이 오랫동안 공들여 찍은 영상보다 더 높은 화질로 내 마음대로 연출까지 가능하다니...


장 보드리야르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그의 책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바로 이런 '원본 없는 복사본의 세상'을 예견한 적이 있는데, 실제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채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를 창조할 수 있는 세계는 행복한 세계일까? 과연 이 AI 기술은 더 발전되는 게 맞는 걸까?

2019년에 개봉한 영화 <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에서 레아 공주 역의 캐리 피셔(Carrie Fisher)는 안타깝게도 2016년에 사망해 버렸다. 그래서 영화에서 묘사된 레아 공주는 생전의 캐리 피셔의 영상과 레아 공주의 딸 역할을 했던 빌리 로드(Billie Lourd)가 몸연기로 재연한 것이다. 2020년에 개봉한 영화 <에이리언: 로물루스> (Alien: Romulus, 페데 알바레즈 감독)에서도 이미 사망한 배우인 이안 홈이 AI 기술로 영화에 다시 출연( 안드로이드 '룩'의 역할)해 화제를 모은 적이 있는데, 이제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존재하는 것처럼 표현되는 상황이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게 되었다. (TV에서도 AI를 통해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이들을 영상으로 소환하고 있다.) 처음에는 호기심과 그리움 때문에 이 기술을 고도화시켰지만, 문제는 이를 단순히 기술적 혁신만으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만약 이 기술이 상용화된다면, 우리는 과거와 현재,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인식체계의 혼돈과 전복을 겪게 될 수도 있다.


최근 딥페이크(Deep Fake) 기술을 이용한 범죄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뉴스도 종종 보게 되는데, 특히 악질적인 보이스 피싱 범죄자들이 이 딥페이크 기술을 자유자재로 활용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우리는 과연 이런 기술들이 범죄에 이용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이제 방송현장에서도 AI 도구 사용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그런데 배우면 배울수록 AI에 대해 부정적인 사례들이 자꾸 노출이 되니 참 당황스럽다. 그리고, 아무리 영상을 현실보다 더 현실감 있게 잘 만든다 한들 결국 그 영상들을 묶어줄 이야기의 진실성이 없다면 AI 영상제작기술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일 뿐임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된다.


현재의 AI는 인간의 언어(말과 글)를 학습하면서 발전했다. 인간의 말과 글은 항상 진실만을 담지 않는다. 그리고 AI는 최대한 인간의 요구에 맞춰 답을 만들어주려고 한다. 결국 돌고 돌아 AI가 복제하는 세상의 원본, 인간들의 문제다. 같은 딥페이크 기술이라도 인간의 용기와 사랑을 위한 이야기를 위해 쓰일 수도 있고, 사람을 속이기 위한 범죄로도 활용될 수 있으니.

사실 방송과 인터넷 모두 시뮬라크르(복제)의 기반 위에서 발전한 미디어들이다. AI는 그 시뮬라크르로 구현된 세계의 진실을 더 극명하게 드러내줄 뿐이고. 결국 원본이 사라지고 복제품들이 원본이 되는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과 진실을 지키기 위해 애써 온 인간들의 도전과 용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인류가 사라지더라도 이 우주 어딘가에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세헤라자데'는 <아라비안 나이트(천일야화)>에서 매일 밤바다 왕(술탄 샤 리아르)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1,000일 동안 들려줘 자신과 동생(두냐 자드)의 목숨을 건진 지혜로운 페르시아 여성이다. 이 지혜로운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아라비안 나이트>는 18세기 영문판 번역본에 사용된 제목이며 페르시아어의 원 제목은 '천일야화(千一夜話)'다.(제목의 한자를 보면 '1000일(千日)'이 아니라 '1001(千一)'이다. 퀴즈쇼의 단골 출제문항!)



관현악 모음곡 '세헤라자데'는 1888년 러시아 국민음악파를 대표하는 림스키코르사코르의 대표작으로 풍부한 색감의 오케스트라 연주로 동양의 신비감이 잘 표현된 명곡이다.

1844년 러시아 귀족집안에서 태어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6살 때부터 피아노, 9살 때에는 작곡을 배우는 등 당시 귀족집안의 자제들에게 주어진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당시 귀족집안 자제들에게 의무처럼 부여된 사관학교 입학도 해야 했다. 그렇게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3세에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해 나중에 해군 장교로 복무하며 음악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그리고 모데시트 무소륵스키가 그랬던 것처럼 밀리 발라키레프(1837~1910)와 세자르 큐이 (1835~1918)와의 운명적 만남을 통해 러시아 국민음악파를 대표하는 작곡가가 되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당시 함께 교류했던 '러시아 5인조(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알렉산드르 보로딘, 세자르 큐이와 밀리 발라키레프)' 중에서는 가장 어렸지만, 그들과 함께 작곡과 관현악법을 공부하면서는 5인조 중에서는 가장 장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게 된다.

당시 러시아 5인조는 동양적 소재에 러시아 음악의 색채를 넣어 곡을 만드는 데 관심이 많았는데, 1887년 겨울 알렉산더 보로딘이 오페라 '이고르 공(12세기 러시아 이고르 장군의 원정기)'을 유작으로 남기고 사망하자, 이를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가 완성하게 되는데, 이때 림스키코프사코프는 '아라비안 나이트'를 소재로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 그가 구상한 형식은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4가지 이야기의 소재를 바탕으로 각각 프렐류드, 발라드, 아다지오, 피날레로 명명하여 구성하려고 하였으나 주변 친구들의 제안으로 제1악장 `바다와 신밧드의 항해', 제2악장 `칼랜더 왕자의 이야기', 제3악장 `젊은 왕자와 젊은 공주', 4악장 `바그다드의 축제-바다, 청동기마명으로 가득한 절벽에 부딪힌 배'와 같이 표제적 형식의 곡으로 만들었다.


림사키코르사코프는 이 곡에 대해 "내가 원했던 것은, 만약 음악을 듣는 사람이 내 작품을 교향악으로서 좋아했을 때 단지 하나의 주제에 의한 네 개의 악장이나 독립된 작품들을 듣는다는 느낌이 아닌 다양한 동화 속 신비로운 세계에 대한 오리엔탈적 서사의 인상을 받는 것"이라며 곡의 통일성을 강조했는데, 이를 위해 그는 세헤라자드와 샤 리아르 왕을 상징하는 주제선율을 모든 악장에서 사용했다.


이 곡은 또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사후 2년 뒤 1910년, 당대 러시아 최고의 안무가 미하일 포킨의 안무로 디아길레프가 이끌었던 발레뤼스의 발레작품 <세헤라자드>의 음악으로 사용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는데, 이때 원곡의 4악장 중 한 악장만 빼고 3악장만 공연에 사용되는 바람에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미망인에 의해 고소를 당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우리에게는 2009년 ISU 세계피겨선수권 대회에서 김연아 선수가 '세헤라자데'를 안무음악으로 사용하면서 좀 더 친숙해졌다.


■ 현재 유튜브에서 '세헤라자드' 연주 영상 중 가장 많은 조회수를 자랑하는 세게르스탐 지휘의 갈리시아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감상해보고,

- https://www.youtube.com/watch?v=zY4w4_W30aQ&t=967s


■ 푸틴과의 친분으로 요즘은 그 이름을 보기 힘든 게르기예프와 빈 필의 연주로 시아 음악적 느낌을 최대로 살린 연주로도 감상

- https://www.youtube.com/watch?v=BwOtZkxcr4U&t=3s



♥ 동그란 길로 가다


- 박노해


누구도 산정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누구도 골짜기에

오래 있을 수 없다.


삶은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을 지나

유장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가는 것


절정의 시간은 짧다.

최악의 시간도 짧다.


긴 호흡으로 보면

좋을 때도 순간이고

어려울 때도 순간인 것을


돌아보면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게 나쁜 것이 아닌 것을


삶은

동그란 길을 돌아나가는 것


그러니 담대하라.


어떤 경우에도

너 자신을 잃지 마라..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위엄을 잃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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