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망각(妄覺)'과 '왜곡(歪曲)'을 넘어

- 2025년 8월 22일 금요일 -

by 최용수

♡ 레이프 본 윌리엄스 (Ralph Vaughan Williams, 1872~1958)

<토마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 Fantasia on a Theme by Thomas Tallis>


https://www.youtube.com/watch?v=C3nxOF8wnMk


눈을 떠서 마주하는 아침이 어느 아름다운 여행지에서 일출을 바라볼 때처럼, 마치 영화의 한 순간을 마주한 듯 장엄한 감동으로 다가오길 바라지만, 대개의 아침은 반복되는 일상의 리듬에 휩쓸려 매일매일의 그 새롭고 낯선 아침의 시간조차 깨닫지 못하고 잃어버리기 일쑤다.

일상을 깨는 갑작스러운 일들이 터지고 나서야 기계적으로 반복되던 시간은 균열이 생기고 그 빈틈으로 잊고 있었지만, 결코 사라지진 않았던 여러 기억들이 밀려 들어온다. 가족과 친구, 그리고 소중한 인연들과의 추억 같은 것 말이다.

장인어른께서 쓰러지셨다. 내 일상도 잠시 멈춰졌다. 병원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 가시는 사이 각종 검사, 응급 수술과 수혈, 그리고 합병증을 예방하기 위한 여러 조치들이 있었다. 아내와 처남이 장인어른 옆을 지키고 계실 때 난 꽤 긴 시간을 장모님과 함께 응급환자 대기실에 있었다.

아내와 결혼한 지 26년, 장인어른을 처음 뵌 때도 벌써 28년 전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장모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장인어른과의 50년도 더 된 기억들을.

오랜 기억들이 이야기로 바뀌게 되면 대부분 흐릿한 기억의 윤곽을 붙잡기 위해 여러 기억 중에서도 강력한 감정들이 함께 새겨진 기억들이 이야기의 뼈대가 된다. 그렇게 감정이 우선한 기억들은 실제 과거에서 벌어졌던 여러 가지 일들을 왜곡하기 마련이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우리 뇌의 가장 놀라운 기능은 어쩌면 '망각(妄覺)'과 '왜곡(歪曲)'일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두 세기를 걸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특정 시대나 학파로 치부할 수 없으나 모든 시대의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을 사로잡는 환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본 윌리엄스의 '토마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이 1910년 9월, 영국의 글로스터 성당에서 초연된 다음날 영국 '타임스'에 실린 기사의 한 부분이다. '토마스 탈리스'(Thomas Tallis, 1505~1585)는 16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영국 교회음악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이다. 본 윌리엄스는 '영국 찬송가집'을 편집하던 중 1567년 토마스 탈리스가 당시 파커 대 주교를 위하여 작곡한 곡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곡이 너무 마음에 들었던 본 윌리엄스는 토마스 탈리스의 주제를 그가 활동하던 당시 대위법적 선율과 그만의 악기조합으로 재탄생시키게 된다.

현악 합주단 전체의 소리와 그 안의 소규모 앙상블, 특히 독주와 4중주를 배합한 소리의 구성은 엄숙한 고요와 장엄한 울림을 절묘하게 함께 느낄 수 있도록 하여 통찰과 감동의 시간을 선사한다.

초연 당시 청중들은 본 윌리엄스의 다소 생경한 이런 작곡기법과 화성의 구성이 빚어낸 감동의 실체에 대해 혼돈스러워했지만, 이내 이 새로운 음악이 담고 있는 신비롭고 환상적인 경험에 열광했다.

당시 17세의 나이로 이 초연무대에 참석했던, 훗날 교회음악 작곡가로 명성을 얻은 허버트 하웰스(Herbert Howells, 1892~1983)는 "음악을 좋아하는 17세의 젊은이에게 그것은 너무 벅찬 저녁이었고, 충격과 감동 속에서 본 윌리엄스에게 사인을 부탁해 받아냈다"며 그날의 감동을 무려 71년 뒤 그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예술은 기억이 왜곡하는 시간과 공간을 '망각'과 '왜곡'이 아닌 '새로운 해석'과 '창조'의 관점으로 바로 보는 독특한 영역이다. 그리스의 조각과 건축, 중세 성당의 벽화, 그리고 악보로 남겨진 중세와 근대의 음악들은, 추구하는 예술적 지향은 달랐을지언정 우리에게 큰 감동과 깨달음을 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미적(審美的)인 어떤 것들이 있다. 말과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음악의 감동은 그래서 시대와 공간적 경계를 넘어선다.


본 윌리엄스는 에드워드 엘가(Sir Edward Elgar, 1857~1934), 구스타브 홀스트(Gustav Theodore Holst, 1874~1934)와 함께 영국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마지막 낭만주의 음악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평생에 걸쳐 영국의 민요를 채록하고 영국민요를 기반으로 많은 작품들을 쓰기도 하고 이를 '민족음악'이란 책으로 남겨 20세기 영국 음악의 부흥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는 일찍이 독일 베를린에서 막스 브루흐(Max Karl August Bruch, 1838~1920), 프랑스 파리에서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 등을 사사하며 당시 유럽 음악을 두루 섭렵했지만, "작곡가는 스스로를 결코 닫지 말고 예술을 생각하며, 동시대의 사람들과 같이 살고 호흡하며 자신의 작품을 모든 삶의 표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신조대로 과거 르네상스 시대(영국 튜더 왕조시대의 교회음악)의 음악적 전통에서부터 고전주의, 낭만주의를 아우르고 영국의 민요에 이르기까지 당시 대중들에게 예술적 감동을 남길 수 있는 다양한 분야의 음악을 공부하고 작품으로 만들어 냈다.

9편의 교향곡, 6편의 오페라, 3편의 발레음악과 함께 관악 합주곡, 합창 음악(주로 교회음악), 그리고 수많은 협주곡과 실내 기악곡까지 타개하기 1년 전까지 왕성한 활동을 이어간 본 윌리엄스는 1935년 영국왕실로부터 메리트 훈장(Order of Merit, OM)을 수훈했다.


■ 2007년 세계선수권 프리스케이팅 대회에서 김연아가 화려한 무대를 빛내 준 본 윌리엄스의 곡 '날아오르는 종달새(The Lark Ascending)'를 놀란의 바이올린, 버논 핸들리의 지휘의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감상해 보고,

- https://www.youtube.com/watch?v=ZR2JlDnT2l8



■ 우리에겐 'green sleeves'라는 팝송으로 유명한, 본 윌리엄스가 영국 민요를 바탕으로 작곡한 '푸른 옷소매 환상곡(Fantasia on Green sleeves)'도 함께 감상해 보자.

- https://www.youtube.com/watch?v=oWz-Hfw4fnk



♥ 내 가난한 여행


- 한용섭


추억이라는 열차에 동전을 넣는다

좌석표에는 몇 가지 이름이 있다

아픔, 미련, 향수, 고독, 가난, 열정, 웃음

추억이라는 이 열차에는 그래서

일등석이 없다

모든 좌석들이 희미하게 열려진

풍경들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


흔들거리며 추억의 깊이까지 저려온다

어두운 터널을 두 개를 지나서야

승무원이 추억을 검표하러 걸어오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멈추어야 할 정류장을 지나

너무 멀리까지 추억을 보고 오는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나의 추억은 가난했다

매일 하루하루가 그렇게 세상에 빚을 졌다

그런 나의 여윈 추억이 검표원에게 건네진다

그는 나에게 미련이라는 좌석으로

옮겨 앉으라고 말한다

왜 추억은 향기가, 웃음이, 침묵이

더욱 간절했던 것일까?

깊은 잠이 온다

추억을 사랑했던 지친 피곤들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이제 막 오늘이 어제라는 추억의 입구를 지나며,

아주 긴 눈물이 흐르고 있다

멈추어야 할 정류장을 벌써 두 정거장이나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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