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9월 9일 화요일 -
♡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교향곡 7번 가장조 Op.92 / Symphony No. 7 in A major, Op. 92>
■ https://www.youtube.com/watch?v=KbNGklNz8Yk (2악장)
우주의 시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구의 오늘 아침을 만드는 것 같지만, 우리가 우주적 시간의 스케일로 이 현상을 바라보면 138억 년 전 '우연히' 시작된 빅뱅으로 '우연히' 만들어진 은하계, 그 은하계에서 다시 우연히 형성된 우리의 태양계, 그 태양으로부터 생명체가 살 수 있을 정도로만 기가 막히게 적당한 거리의 궤도를 가지고 태양을 돌고 있는 행성 지구, 그리고 그 지구가 거의 24시간(정확하게는 23시간 56분 4초)에 한 번씩 자전하는 우연들이 겹쳐 오늘이 시작된 것이다. 우주적 스케일을 양자 수준의 스케일로 줄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마치 태양계처럼 모델링한 원자는 핵 속 양성자와 전자의 크기가 너무도 작아 원자의 대부분은 텅 빈 공간(물론 이 공간은 핵과 전자가 내뿜는 엄청난 에너지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인 데다 전자의 위치는 오직 확률적으로만 추정가능할 뿐이다.
더 기가 막힌 우연은 지구와 거의 동시에 만들어져 지구를 돌고 있는 달이다. 태양은 달보다 약 400.78배 크지만, 하필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는 지구에서 달까지의 389.17배 정도라 지구에서 보면 두 천체는 거의 비슷한 크기로 보인다는 점이다. 우리 태양계는 물론이고 전 우주에서 항성과 행성, 위성이 이런 관계로 구성될 확률은 거의 '0'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불가능에 가까운 '우연'이다.
우리는 매일 그렇게 불가능할 것만 같은 우연들의 연속으로 오늘 아침을 맞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운(運)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대개 그런 무수한 우연들의 결과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불확실성을 불편해하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결코 우리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줄이기 위해 점술(占術)에 의지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삶은 예정된 운명처럼 움직이지 않으며 수많은 우연들이 '운명처럼' 얽혀 만들어져 나갈 뿐이다.
이런 세계의 불확실성과 우연은 우리에게 항상 까닭 없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주기도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미지의 영역을 사유할 수 있는) 생각의 힘과 미처 다 인식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겸손을 배우게 되었다.
『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들』의 저자 슈테판 클라인은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 현대인들이 우연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현대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실패를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태어나는 환경, 예기치 못한 사고, 자연재해 등 개인이 제어할 수 없는 요인들이 삶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계획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신념 대신, 예측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우연을 친구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오히려 우리는 우연을 '기회'로 받아들여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창의성 또한 높일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운(運)'이라 믿는 것들은 실로 우연들의 복합적인 결과일 뿐이며, 이를 운으로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심리적, 사회적 적응 방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자신은 항상 운이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불운했던 시간들만 기억하고 자신이 행복했던 때는 쉽게 잊어버리듯이.
오늘은 자주 듣는 곡이긴 한데, 타고난 말더듬이 왕자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과 형의 뜻하지 않은 퇴위로 왕위를 계승하게 되면서 말더듬증을 고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다해야 했던 조지 6세,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킹스 스피치(King's Speech)에서 흘러 나왔던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을 골라봤다. 이 곡이 왜 하필 이 영화에 쓰이게 되었는지 그 우연적 개연성은 이 곡이 쓰여질 당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혁명의 깃발을 들고 전 유럽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고 결국 스스로 황제가 되어버린 나폴레옹. 그가 패배했다.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이 초연된 1813년 12월 8일, 빈은 유럽 역사상 가장 극적인 변곡점 중 하나를 맞고 있었다.
1813년은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의 참패 이후 독일에서 벌인 마지막 대규모 전투들의 해였다. 독일 전역(German Campaign)에서 봄부터 시작된 전투는 나폴레옹이 뤼첸(5월 2일), 바우첸(5월 20~21일), 드레스덴(8월 26~27일)에서 승리를 거두며 여전한 군사적 재능을 과시했다. 하지만 운명의 전환점은 10월 16~18일 벌어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찾아왔다.
'민족들의 전투(Battle of the Nations)'라 불릴 만큼 다양한 민족들이 나폴레옹과 프랑스 군대에 맞섰던 라이프치히 전투는 오스트리아의 슈바르첸베르크가 이끄는 연합군 34만 명, 프로이센의 블뤼허가 지휘하는 실레지아군, 그리고 스웨덴의 베르나도트가 이끄는 북부군 등이 나폴레옹의 40만 대군을 포위하며 시작됐다.
이 전투에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등 3명의 군주도 직접 참전했다. 9시간 이상 계속된 치열한 전투 끝에 나폴레옹은 참패했고, 이는 나폴레옹의 독일 지배 종료를 의미했다.
라이프치히 승전 소식이 빈에 전해졌을 때 시민들의 환호는 하늘을 찔렀다. 23년간 계속된 끊임없는 전쟁이 마침내 끝을 향해 달려 가고 있었다. 빈은 해방의 기쁨과 평화에 대한 열망으로 들끓었고,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베토벤의 7번 교향곡이 빈에서 울려 퍼진 것이다.
1813년 12월 8일, 빈 대학에서 열린 교향곡 7번의 초연은 그 자체로 하나의 드라마였다. 이 연주회는 하나우 전투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위한 자선 공연이었고, 베토벤 자신이 지휘를 맡았다. 당시 베토벤의 친구 이그나츠 슈판치히가 오케스트라를 이끌었고, 바이올리니스트 루이스 슈포어, 작곡가 요한 네포무크 훔멜, 자코모 마이어베어, 안토니오 살리에리 등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이 함께했다. 특이하게도 이탈리아의 기타 거장 마우로 줄리아니가 첼로를 연주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 날 베토벤의 열정적인 지휘는 여러 사람의 기록에 남겨져 있는데, 특히 슈포어는 자서전에서 "스포르찬도(sforzando, 특히 세게)가 나오면 베토벤의 팔은 격렬하게 벌어졌고, 포르테가 시작되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라고 썼다. 청력을 거의 잃은 상태에서도 온몸으로 음악을 표현하는 베토벤의 모습에 관객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관객들의 반응 또한 폭발적이었다. 특히 2악장 알레그레토의 연주가 끝나자 흥분한 청중들이 즉석에서 앙코르를 요구했고, 베토벤은 같은 악장을 다시 한번 연주해야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19세기 일부 지휘자들은 이 2악장의 인기에 힘입어 다른 교향곡 공연에서도 이 악장을 삽입해 연주하기도 했다는 웃지 못할 기록까지 남아있다.
하지만, 나폴레옹과 프랑스 군대가 전 유럽을 들끓게 했던 계몽의 이념 또한 그의 패배와 함께 사그라들고, 이후 '빈 체제'라고 불릴 반동의 유럽 질서가 새로 등장할 즈음이었다.(사실 그전에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은 이미 보수 반동의 등장을 예고한 거나 다름없었다.)
이 거대한 역사의 분기점에서 베토벤은 오히려 불굴의 인간 정신과 희망을 그의 7번 교향곡에 담아냈다. 역사는 반동과 또 다른 반동의 힘으로 도도한 흐름을 만들어 간다.
교향곡 7번은 '춤의 전당(Apotheosis of Dance)'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데, 리하르트 바그너가 이 곡을 감상하고 나서 붙인 별명으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리듬적 활력을 잘 표현하고 있다. 베토벤은 이전 작품들과 달리 이 교향곡은 멜로디보다 리듬에 중점을 둔 혁신적 접근을 시도했다.
1악장은 포코 소스테누토(Poco sostenuto)로 시작하는 긴 서주부가 특징이다. A장조의 큰 화음으로 시작해 오보에가 애절한 선율을 노래하면 클라리넷, 호른, 바순이 가세한다. 특히 비바체(Vivace) 부분으로 넘어가기 전에 E음이 무려 61번이나 반복되는 부분은 긴장감을 극도로 고조시키는 베토벤만의 기법이 사용됐다.
2악장 알레그레토는 a단조로 쓰였고, '알레그레토(Allegretto, 조금 빠르게)'라는 지시어에도 불구하고 진중한 속도를 유지한다. 베토벤은 처음에 '안단테 콰지 알레그레토(Andante quasi Allegretto, 걷는 속도(Andante)와 거의 비슷하게 (quasi) 약간 빠르게 (Allegretto)')'로 표기할까 고민했을 정도로 이 악장이 너무 빠르게 연주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비올라와 첼로가 제시하는 주제는 원래 라주모프스키 3번 현악사중주곡을 위해 작곡되었으나 결국 이 교향곡에서 완성되어 사용되었다.
3악장은 F장조의 스케르초로 활기찬 도약하는 리듬이 인상적이다. 특이한 점은 D장조의 트리오 부분이 오스트리아 남부의 순례자 찬송가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베토벤은 이 고요한 트리오 부분을 두 번 연주하도록 지시했는데, 이는 A-B-A-B-A 구조로 당시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볼 수 있는 특징이다.
4악장은 알레그로 콘 브리오(Allegro con brio)로 베토벤의 음악 중 보기 드문 fff(포르티시시모) 강약 표시가 등장한다. 조지 그로브는 이 악장을 "세상을 불태울 만한 불을 배에 품고 있는 칼라일의 영웅 람 다스를 연상시킨다"라고 표현했다.
베토벤은 그 스스로 이 작품을 "나의 최고 작품 중 하나"라고 자평했고, 베토벤 연구의 권위자 안토니 홉킨스는 "진정한 자발성을 느끼게 해주는 교향곡으로, 마치 음표들이 페이지에서 날아오르는 듯하다"라고 극찬했으며, 차이콥스키는 피날레 부분에 대해 "절제되지 않은 기쁨과 삶의 즐거움으로 가득한 이미지들의 연속"이라고 묘사했다
교향곡 7번은 아마 현대에 가장 많이 활용되는 클래식 음악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특히 2악장 알레그레토는 수많은 영화와 TV 프로그램에서 사용되었다. 2010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킹스 스피치>의 클라이맥스 장면, 2016년 <엑스맨: 아포칼립스>, 2018년 드라마 <웨스트월드>, 2015년 <미스터 로봇> 등에서 극적 효과를 위해 활용되었다.
(* 영화 킹스 스피치의 OST 클립을 다시 감상해 보자.
- https://youtu.be/XJ45tVkUefo?si=md4NvDPTwjK7tmW4)
1934년 <검은 고양이>부터 시작해 1961년 <롤라>, 1984년 <행성들의 행진>, 1994년 <불멸의 연인>, 1995년 <홀랜드 선생님>, 1997년 <요정 사진사>, 2002년 <돌이킬 수 없는>, 2006년 <더 폴>, 2007년 <지구에서 온 사나이>, 2008년 <사랑의 폭발>, 2009년 <노잉> 등 무려 80여 년에 걸쳐 16편 이상의 영화에서 교향곡 7번의 2악장이 사용되었다.
■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여러 평론가들의 의견으로도 베토벤 7번 교향곡 연주는 지휘자들의 지휘자로 불린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연주가 좋다라는데 큰 이견이 없는 듯하다. 유튜브에도 여러 버전이 올라와 있는데, 오늘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지휘와 바이에른 국립가극장 오케스트라 연주버전으로 전곡을 감상해보자.
- https://youtu.be/JJSS1uMRhyY?si=o4EaK8zN_1QugQ4q
♥ 서시
-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