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時代)는 그대를 버렸을지라도...

- 2025년 6월 27일 금요일 -

by 최용수

♡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 1838~1875)

< 오페라 『진주조개잡이』 중 '귓가에 들리는 그대의 목소리' 외 / Opera 『Pearl Fishers』 , "Je crois entendre encore" and other works>


* 그림이미지 : 스칼라 극장,『진주조개잡이』 홍보 삽화 (출처 : 위키피디아)


https://youtu.be/1eGDGw6HZcE?si=dw7FWRfWU5DtZih5


한 번 듣게 되면 오랫동안 귓가를 맴돌다 가슴에 내려앉는 이 아리아는 비제의 오페라『진주조개잡이』 중 '귓가에 들리는 그대의 목소리(Je crois entendre encore)'다. 음악학자 라콤(Lacombe)은 "이 아리아를 듣는 사람은 혼(魂)이 노래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고 할 정도로 감동적인 아리아다.

1막의 마지막 즈음 오페라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나디르가 과거의 추억(여주인공인 브라만 사제, 레일라에 대한 그리움)과 현재의 감정(친구 주르가에 의해 레일라가 있는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가 다시 돌아와 우연히 듣게 된 레일라의 목소리에 흔들리는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며 부르는 독창이다.




이 오페라를 작곡한 조르주 비제는 37년 간의 짧은 생애 동안 오페라『카르멘』을 비롯해서 '아를의 여인' 모음곡 등 우리가 사랑하는 많은 명곡들을 남겼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비범한 재능은 당대에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비운의 작곡가다.

1838년 10월 25일, 파리 근교에서 성악 교사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조르주 비제의 어린 시절은 꽤 유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제의 아버지 아돌프 비제(Adolphe Bizet)는 이발사이자 가발제작 장인 출신으로 비록 정식 음악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독학으로 성악을 공부해 성악교사가 될 정도로 음악에 대한 재능과 열정이 있었으며, 어머니 에메 델사르트(Aimée Delsarte) 또한 성공한 사업가의 딸로 교양과 음악적 재능을 겸비하고 있었다. 특히 그녀의 오빠 프랑수아 델사르트(François Delsarte)는 루이 필립과 나폴레옹 3세의 궁정에서 공연하는 저명한 성악가이자 교사였고, 그의 아내 로진 또한 13세에 파리 음악원의 솔페주 조교수가 될 정도의 음악 신동이었다고 한다.


조르주 비제의 음악적 재능은 천부적(天賦的)이었던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재능은 불과 4살 때부터 나타났는데, 아버지로부터 피아노 악보를 읽는 법을 배우자마자 악보를 보고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으며, 고작 10살의 나이에 프랑스 최고의 음악학교 파리 국립음악원에 입학(1848년)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비제는 입학한 지 6개월 만에 솔페주(Solfège, 음악의 기초능력인 시창력, 독보력, 청음 능력 등을 평가하는 시험)에서 1등을 하며 파리음악원의 교수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특히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교수 피에르 짐머만(Pierre Zimmerman 1785~1853)은 비제의 재능을 높이 사 그에게 대위법과 푸가를 개인 교습 해줬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위 샤를 구노(Charless Gounod, 1818~1893)에게도 비제를 소개해주면서 어린 비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짐머만 교수는 그의 곁을 오래 지켜주지 못하고 1853년 세상을 떠나게 되고 이후 비제는 자크 알레비(Jacques Élie Halévy, 1799~1862)를 사사했는데 나중에 그의 딸과 결혼까지 하게 된다. 짐머만의 사위, 샤를 구노 또한 비제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 당시 구노의 문하에는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ëns, 1835~1921)도 있었다고 한다.


파리음악원에서 비제의 재능은 남달랐는데, 1852년 피아노 1등 상, 1855년에는 오르간과 푸가로 1등 상을 받았고, 파리음악원을 졸업하던 1857년에는 칸타타 '클로비스와 클로틸드(Clovis et Clotilde)'로 로마대상까지 수상하여 상금으로 로마와 독일로 유학을 다녀왔다.

비제의 피아노 연주실력은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리스트도 인정할 정도였는데, 1861년 파리의 어느 작은 공연장에서 리스트가 자신의 신곡을 피아노로 연주한 후 "이 작품을 정확하게 칠 수 있는 사람은 나와 한스 폰 뷜로뿐이다"라고 말하자, 당시 함께 공연장에 있었던 24살의 젊은 비제는 자신도 해보겠다며 무대에서 리스트의 신곡을 능숙하게 연주해 보였다. 그 연주가 끝나자 리스트는 "내 곡을 정확하게 치는 사람이 세 사람이 되었고 그중 자네가 가장 뛰어나네"라며 극찬했다고 한다.

프랑스 국립 오페라 극장 전경

하지만, 비제의 이런 뛰어난 재능은 로마 유학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의 매력에 빠져 오페라 작곡가로 진로를 바꾸면서 시대의 불운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 시작은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갑작스러운 비보였다. 이탈리아에서의 생활을 접고 파리로 돌아온 비제는 쓰러진 어머니 병구완에 온 정성을 다했다. 그런데, 비제의 어머니에 대한 헌신적인 간호는 결국 그가 오페라 작곡에 온전히 쏟아부어야 할 시간과 정력을 뺏기게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무려 14편의 오페라를 써서 극장을 찾아다니며 그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보려고 했지만 어떤 극장도 오페라계의 신인이자 무명인 비제의 오페라를 받아주지 않았다.


19세기 프랑스 오페라계는 매우 복잡하고 특수한 위치에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파리는 유럽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었다. 모든 야심 찬 오페라 작곡가들이 자신의 실력을 시험하고 싶어 하는 무대가 파리였다. 그 시작은 로시니였다. 일찍이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을 평정한 로시니는 1824년부터 프랑스 왕실이 관리하고 있던 파리의 3대 극장 중 하나인 이탈리앵 극장(다른 두 곳은 파리 오페라,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해 프랑스 오페라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탈리앵 극장은 "오로지 이탈리아 레퍼토리만 공연하는 극장"으로서 우아한 사교의 장 역할을 했던 곳이다. 여류 소설가 조르주 상드,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 등이 이탈리앵의 단골 고객이었을 정도로, 이탈리앵 오페라는 파리 지식인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로시니의 성공 이후 독일 작곡가 마이어베어(Meyerbeer)가 등장하며 프랑스 오페라계는 혼란에 빠졌다. 이탈리아 오페라가 주도하던 프랑스 오페라계에 독일 오페라계의 거장이 등장하면서 프랑스 오페라는 설 자리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마이어베어는 1831년 파리에서 《악마 로베르》로 일약 "유럽 오페라계의 새로운 슈퍼스타"로 부상했는데, 그는 당시 유럽에 거세게 불고 있던 로시니 열풍을 잠재우며 이탈리아 오페라 일색이던 유럽에 독일 오페라의 위용을 보여주었다. 비제가 작곡한 오페라들이 무대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바로 여기 있었다. 당시 독일 오페라로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던 마이어베어의 작품과 이탈리아 오페라들이 장악한 극장들이 무명의 비제 작품을 올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연기회조차 잡지 못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비제는 그의 탁월한 피아노 연주실력으로 돈을 벌려고 하지 않았다.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경력을 포기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일은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이나 인기있는 오페레타의 곡들을 피아노와 성악 또는 피아노 연주 버전으로 편곡하는 일이었다. 이 일은 단순 반복의 기계적인 작업이었지만, 비제는 꿋꿋이 이 얼마 안 되는 벌이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을 허송하고 난 후 1863년 마침내 비제는 리리크 극장장 레옹 카르발료(Léon Carvalho)로부터 오페라 위촉을 받게 된다. 카르발료는 오페라 애호가인 바레우스키 백작의 후원금으로 비제에게 기회를 준 셈인데, 그의 첫 작품이 오늘 소개한 아리아 '귓가에 들리는 그대의 목소리'가 포함된 오페라『진주조개잡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안타깝게도 촉박한 제작일정과 허술한 대본 문제로 - 당시 대본가들은 유진 코몽 (Eugène Cormon, 1810-1903)과 미셸 카레 (Michel Carré, 1821-1872)로 꽤 유명한 작가들이었는데, 비제의 재능을 잘 몰랐기 때문에 대본을 공들여 쓰지 않았다고 나중에 고백했다. 그들은 오페라 리허설에서 비제의 음악을 듣고 나서야 그들이 비제의 재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 아쉬워했다고 한다 - 무대에 오르긴 했지만, 대중들의 외면과 독일과 이탈리아 오페라에 경도되어 있던 평론가들로부터 혹평받으며 흥행에 실패한다. 어머니 병구완과 첫 작품의 실패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가중된 비제에겐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성공 유혹이 들 법도 했겠지만, 그는 결코 오페라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그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 1872년 조르주의 재능을 이미 알고 있었던 보드빌 오페라극장의 지배인 L. 카르발로는 조르주에게 알퐁스 도데의 소설을 극화한《아를의 여인》의 부수음악을 부탁하게 되는데, 비록 오페라는 아니었지만 비제는 기쁜 마음으로 모두 27곡에 달하는 극의 부수음악을 작곡해 주었다. 프랑스와 프로이센 전쟁의 아픈 기억이 담겨있는 이 연극은 대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고 비제의 부수음악도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오페라가 아니라 연극에 딸린 부수음악이었지만,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얻게 되자 비제는《아를의 여인》의 부수음악 중 4곡을 뽑아 모음곡을 만들어 따로 연주회도 열었는데, 이 또한 성공적이었다. 이에 다시 힘을 얻은 비제는 또다시 오페라 도전의 기회를 엿보게 된다.

https://youtu.be/l7Imi69GJTc?si=_l1K-HHjlS4nS_Yr ('아를의 여인' 모음곡 2번)


《아를의 여인》의 성공 덕분인지 1872년, 비제는 오페라 코미크로부터 드디어 오페라 제작의뢰 위촉을 받게 된다. 예전에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단편소설《카르멘》을 읽고 감명받았던 비제는 이 소설을 각색해 오페라로 만들고 싶어 했고, 그가 가진 모든 열정을 쏟아부어 1874년 마침내 완성한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현재에도 가장 많이 무대에 오르는 걸작 오페라 『카르멘』이다.


『카르멘』은 비제가 평소 해보고 싶었던, 이탈리아와 독일 오페라와는 다른 느낌의 오페라, 사실주의적 표현과 화려한 음악, 그리고 열정이 결합된, 당시로서는 보지 못한 혁신적인 작품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875년 3월 3일 오페라 코미크에서 『카르멘』이 첫 무대에 올랐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극장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기존 오페라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카르멘』은 불쾌함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익숙하지 않은 노골적인 사실주의적 표현, 하층민 집시 카르멘에 대한 관능적 묘사, 그리고 비극적 결말까지, 관객들은 경악했고, 비평가들은 "불쾌한 음악, 저질스러운 내용, 평범한 음악에 아무런 특색이 없는 하류 드라마, 도덕성을 결여한 작품"이라며 상상을 초월한 악평을 퍼부었고 심지어 가수들은 무대에서 담배 피우는 장면을 연기할 수 없다며 거부하는 등 이 공연은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카르멘』의 작곡을 마치고 비제는 너무나 기뻐했지만, 첫 공연의 엄청난 실패와 평론가들의 상상이상의 혹평은 가뜩이나 심장이 약했던 비제에게 너무나 큰 충격을 주었고, 결국 1875년 6월 3일 비제는『카르멘』초연 이후 3달 만에 고작 36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ㅠㅠ


아이러니하게도 오페라『카르멘』은 비제가 세상을 떠난 지 또 몇 달도 되지 않아 입소문을 타고 흥행몰이를 시작하게 된다. 처음에는『카르멘』을 낯설어하던 사람들이 그 사실주의적 묘사가 주는 긴장감, 화려한 음악이 주는 매력, 그리고 집시여인 카르멘의 관능미와 마음을 울리는 비극적 결말에 점차 매료되면서 입에서 입으로 이 오페라의 매력이 전달되기 시작한 것이다. 비제가 오페라 작곡가로 출발하고자 했을 때 견고한 아성처럼 그의 진입을 막았던 이탈리아와 독일 오페라, 하지만 오페라『카르멘』은 독일 오페라의 고장, 독일에서 독일어로 번역된 공연을 보며 독일 국민들이 환호하게 하고 이탈리아어로 번역된 공연은 이탈리아와 러시아의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렇게 오페라『카르멘』은 영국, 헝가리, 뉴욕, 멕시코 등 유럽을 넘어 세계 각국으로 뻗어나갔고, 이런 성공에 힘입어 마침내 고국인 프랑스 파리에서 다시 무대에 올려지는 등 세계적인 오페라가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연을 관람했던 차이코프스키는 "10년 뒤 이 오페라는 세계 최고의 오페라가 될 것이다"라고 평가했는데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당대에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시대를 앞서간 천재, 조르주 비제! 이제 음악역사에서 그는 "사실주의 오페라, 베리스모 오페라의 선구자"라고 불린다.




오늘은 비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길어졌다.(쓸 얘기는 더 많지만 ㅠㅠ), 앞서 오페라 『진주조개잡이』가 작곡된 배경에 대해서 잠깐 언급했지만 이 작품은 조르주가 25세가 되던 1863년, 무대에 오른 그의 첫 작품이다. 아시아의 신비한 섬 '실론(Ceylon, 현재의 스리랑카)'을 배경으로 하는 3막의 오페라로 프랑스 인기 극작가 미셀 카레(Michel Carré, 1821~1872)와 유진 코몽 (Eugène Cormon, 1810-1903)이 대본을 맡았다.(두 대본가들이 좀 더 빨리 비제의 재능을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오페라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진주조개 채취로 생계를 이어가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어부들의 마을의 족장 주르가와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온 주르가의 친구 나디르, 그리고 이 두사람이 동시에 사랑했던 레일라의 안타깝고 비극적인 3각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구성된다. 레일라는 브라만교의 여사제로 마을의 가장 중요한 업인 진주조개잡이의 성공과 어부들의 무사와 안녕을 기원하는 역할인데 그녀가 여사제가 된 것은 그녀를 동시에 사랑한 청년 주르가와 나디르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녀의 이런 선택은 주르가가 그의 권력으로 나디르를 마을에서 내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마다 열리는 기도회에 참석한 레일라가 우연히 고향으로 돌아온 나디르의 목소리를 듣게되고, 두 사람은 서로 만나 이내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여사제의 정결서약을 깨뜨린 형벌로 레일라와 나디르는 결국 사형에 처하게 되는데, 한때 레일라에 대한 사랑으로 친구 나디르를 쫓아보냈던, 족장 주르가는 두 사람을 위해 마을에 불을 지르고 두사람을 탈출시킨 후 그는 방화범으로 잡혀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는 내용이다.


■ '귓가에 들리는 그대 음성(Je crois entendre encore)'을 카를레스 부도의 감미로운 프랑스어 버전으로도 들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yHWoX77jTAE


■ 『진주조개잡이』에서 '귓가에 들리는 그대 음성(Je crois entendre encore)' 못지 않게 자주 연주되는 바리톤의 주르가와 테너 나디르가 부르는 이중창 "Au fond du temple saint"를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니콜라이 기아우로프의 연주로도 감상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jQCReBQGrrU


■ '귓가에 들리는 그대 음성(Je crois entendre encore)'은 2000년 영국의 여성 감독 샐리 포터(Sally Potter)가 각본과 연출을 맡은 영화 <The Man Who Cried>의 OST로도 쓰이기도 했는데, 영화에서 이 아리아는 오프닝에서 아버지와의 기억을 이어주는 음악으로, 극 중간에 다시 여주인공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피아노 연주로, 그리고 실제 주인공이 등장하는 오페라 무대에서 연주되는 곡으로, 그리고 마지막 엔딩에서 아버지와의 조우하는 장면 등 메인 테마같이 사용되고 있다. 크리스티나 리치(Christina Ricci), 케이트 블란쳇(Cate Blanchett), 조니 뎁(Johnny Depp), 존 터투로(John Turturro) 등이 출연하여 영화 자체도 화제를 모았던 덕분에 이 곡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 함께 높아졌다. 짧은 영화 OST 클립으로 감상해보자.(이 클립은 '귓가에 들리는 그대 음성(Je crois entendre encore)'과 함께 'Close Your Eyes'가 함께 나오는 8분 짜리 클립으로 '귓가에 들리는 그대 음성(Je crois entendre encore)'은 3'45"부터 나온다.)

- https://youtu.be/gKL8GCn_zgA?si=GYe7IFfA7Q-NYTJQ



박각시 오는 저녁


- 백 석


당콩밥에 가지 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횅 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다람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한울에 별이 잔콩 마당 가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우리나라의 천재 시인들이 많았지만, 백석 시인은 특히 향토적인 정서와 민족혼을 잘 표현하셨던 그리고, 평안 방언을 비롯한 다양한 언어를 시어에 담아 한국 시의 영역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 시인으로 해방 후 북으로 가 안타까운 삶을 사셨던 분이라 이 시를 골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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