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후회는 하지 않기로 했다
선택을 내린 후에는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 것, 그것을 나의 철칙이라 여기며 살아왔었다. 그 선택의 댓가가 힘이 들더라도 어쨌든 한 번 내린 선택 뒤엔 절대 후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가 정한 일종의 내 삶의 룰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선택은 좀 달랐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표준치료를 선택하고 자궁적출술을 하기로 결정을 내린 후에도 내 마음 속에서는 갈등이 계속 되고 있었다.
정말, 그래도 될까?
다른 수술도 아니고 이건 '자궁적출술'이다. 아무리 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표준 치료라 한다지만 30대 여성에게 이 수술이 주는 의미는 그 이상이었다. 수술 후 찾아올 갱년기 증상들,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특히 남편에게 나는 이제 어떻게 비추어지게 될까, 이런 우려들이 내가 내린 선택을 자꾸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 이유 모를 알러지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온몸을 벅벅 긁어대며 하루 하루 시간은 나를 수술 날짜로 데려 가고 있었다.
수술하기 며칠 전 친정에 가서 저녁 식사를 했다. 수술을 앞둔 딸을 위한 밥상을 앞에 두고 결국 부모님은 눈물을 보이셨다. 병원이 왜 이렇게 머냐고, 수술 날짜는 왜 이렇게 잡았냐고, 당신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평소 잘 부리시지도 않는 억지를 부리며 눈물을 보이는 엄마의 마음을, 안다. 당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병원이 아니라, 수술 날짜가 아니라, 딸의 건강이라는 것을. 내가 아픈 것이 당신의 잘못 때문이라 여기는 엄마의 부채감이 쌓여 이렇게 표출되고 있다는 것을. 잘 하고 오겠다고 했다. 병원이 멀지만 의사 선생님이 좋기 때문에 잘 될 것이라고, 다시 건강해질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내 마음 속에 일어나는 수십, 수만가지 갈등을 이제 놓아주고 오롯이 그 선택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잘 내린 결정이었다. 더 이상 후회는 하지 않기로 했다.
분당 서울대병원은 우리집에서 꽤 먼 거리에 있었다. 출근한 남편은 퇴근 후 병원으로 오기로 하고 혼자 병원으로 향했다. 두 번째 입원이라 그런지 아니면 새로운 병원으로 가서 그런건지 마냥 두렵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가볍게 여행을 가는 느낌까지 받았다. 입원 수속을 하고 병실을 배정받아 올라갔다. 이번 병실은 2인실이었다. 큰 유리창으로 산과 나무와 꽃이 보이는 병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런 곳이라면 회복도 거뜬히 해낼 수 있겠다 싶었다. 5월을 앞두고 있는 자연의 풍경이 이렇게 위로가 되어줄 줄이야.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수술 전에 필요한 여러 검사들을 받는 동안 남편이 도착했다. 수술 동의서에 싸인을 하고 있는 남편의 얼굴을 보고있자니 또 만감이 교차했다.
남편과의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어른'같아서였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세상의 문제들에 대해 지혜롭고 영리하게 해결하는 모습이 꽤 멋지고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난 늘 든든하겠구나, 해결하지 못할 세상의 문제들은 없겠구나 생각했다. 그런 남편이니 이 상황도 우리는 함께 이겨나갈 수 있겠지. 나의 보호자가 되어 든든하게 나를 잡아주고 버텨내 주겠지. 고맙고 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 날, 나의 수술은 오후 2시쯤이었다. 컨디션은 좋았고 알러지도 이제 슬슬 잦아들고 있었다. 수술은 복강경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며 복강경이기 때문에 회복의 속도도 빠를 것이라고 했다. 남편,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침대에 실려 수술실로 향했다. 사실 이 순간이 가장 떨린다. 마취를 하고 난 후의 시간은 내가 알 수 없는 시간들이지만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침대에 누워 바라봐야 하는 병원의 천장은 참, 무섭다. 그 무서움을, 두려움을 이겨내고 나면 난 더 건강해지리라는 믿음이 공포의 시간으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두 번째 수술 역시 잘 마쳤다. 왼쪽 난소와 자궁 전체를 적출하였고 복강경으로 잘 마무리 되었기 때문에 회복 속도도 빠를 것이라 했다. 이제 정말 끝났다. 표준 치료인 수술을 받았으니 이제 건강하게 나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해서인지 회복의 속도가 정말 빨랐다. 2인실이었지만 다른 환자분이 일찍이 다른 병실로 옮겨 마치 1인실처럼 병실을 사용할 수 있게 된 부분도 빠른 회복에 힘을 실어 주었다.
몸을 좀 추스리게 되자 반가운 얼굴들이 나를 위해 병원을 찾아 주었다. 우리 시어머니,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 병원이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픈 나를 보러 와준 사람들의 마음이 나를 빠르게 회복시켜 주었다. 자궁을 잃었다는 상실감이 엄청나게 클 줄 알았는데, 그 상실감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들로 더 그득그득 채워지고 있었다. 난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후 퇴원을 하고 친정으로 향했다. 며칠 요양을 하고 집으로 갈 참이었다. 퇴원을 하는 길에 바라본 5월의 하늘이 참 싱그럽고 푸르렀다. 내 마음도 홀가분했다. 이제 치료만 잘 받으면 될 거야. 우리의 삶은 또 다른 방향으로 즐겁고 신나게 만들어갈 수 있을 거야.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바라보았던 그 날의 하늘.
그 날의 난,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 아픔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