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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연 Apr 11. 2021

진짜, 암환자

몸이 아픈 것보다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는 것이 더 아팠다


항암치료를 앞두고 바닥을 쳤던 마음의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위해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사람들만 만났다. 병을 얻은 것은 참으로 구슬픈 일이었지만, 병을 얻으며 내 주위에 참 좋은 이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 건 한편으로 행복한 일이었다. 삶이 이토록 공정한 것일 줄이야. 긍정적인 내 성격도 이렇게 여기는 것에 한몫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병을 얻고 보니 삶이 우리에게 '아픔'을 줄 땐 '아픔'만 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문득 문득 찾아왔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선의 변화, 그리고 삶의 의지에 대한 변화. 아프지 않았다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감정과 시선의 변화가 내겐 큰 행운으로 느껴졌다. 비록 신체의 건강은 조금 잃었지만, 내면의 건강을 기를 수 있는 시간을 얻은 것 같았다.



그러나, 항암치료가 시작되자 하이 에너지였던 나의 정서가 다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역시 항암치료는 병원진료의 '끝판왕'이구나, 실감하는 순간이 찾아오고야 말핬다. 첫 항암치료를 위해 입원을 했을 때만 해도 실감하지 못했다. 케모포트 시술을 하기 위해 다시 수술방에 들어갈 때부터 아, 뭔가 시작되었다라는 두려움이 또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500원짜리 동전만한 금속덩어리가 나의 오른쪽 쇄골 밑에 심어졌고, 그 때 느꼈던 그 이물감이 주는 불쾌한 느낌은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  나의 혈관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지만 쇄골 아래 피부 위로 불뚝 튀어나와 있는 이 아이는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에게 항암주사를 주입하기 위해서는 얇은 바늘을 꽂아야 하는데, 이것은 간호사 선생님들이 하지 않고 반드시 인턴 선생님들이 와서 해야했다. 엄청나게 바쁜 인턴 선생님에게 바늘 시술을 받기 위해서는 참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바늘을 제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루하고 때로는 초조한 기다림의 시간들. 그 기다림의 시간을 비단 나만 느꼈겠는가. 나보다 더 힘든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는 환자들의 시간을 생각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겠지. 그렇게 내게 항암치료를 위한 입원은 기다림이었다.


첫 항암치료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주사약도 문제 없이 잘 들어갔고 입원하는 동안에는 큰 부작용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간수치가 예민하게 오르는터라 이 부분에 대해 의사 선생님도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퇴원 시에는 간수치를 떨어뜨리는 약을 처방받아 퇴원했다. 처음에 겁을 먹었던 것보다는 불안하리만큼 수월한 과정들이었다. 음식에 대한 거부 반응도 없었고 몸이 전체적으로 붓기는 했지만 내내 수액을 맞고 스테이로이드 주사를 맞았으니 그러려니 했다. 나, 항암체질인건가? 역시 내가 기초체력은 좋은 편이었지. 



의사 선생님은 초기에 발견하여 수술을 했기 때문에 우선 3번의 항암치료 후 씨티 결과를 보고 치료를 종료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때 상황을 보아 치료가 더 필요하다는 소견이라면 3번 더, 총 6회를 진행할 수도 있다고 했다. 간절히 3회로 끝나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쯤이라면 6번도 견뎌낼 수 있겠는데? 라는 나의 말도 안되는 자만심은 항암치료를 마치고 온 2일차부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자고 일어났는데 무릎이 내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무릎 관절이 돌아가는 느낌이랄까.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뒤, 물컵을 손에 쥐는 손가락 끝이 마치 바늘로 찔린 듯 저려왔다. 이게 무슨 느낌이야? 간신히 몸을 일으켜 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온몸이 전기에 감전된 듯 찌르르 일어설 수가 없었다. 시작됐구나. 내가 항암을 너무 만만하게 봤네. 공포의 항암 부작용이 시작되고야 말았다. 발바닥은 마치 나무도막처럼 내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았고 손끝은 무언가에 닿을 때마다 찌르르 머리 끝까지 저려왔다. 손가락 마디마디, 특히 무릎 관절은 계속 자기 맘대로 돌아가는 느낌 때문에 걸을 때 마다 벽을 잡고 이동해야 했다. 거기에 하나 더, 아주 심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전날 과음을 한 것 같은 울렁거림이 더 해졌다. 침대에서 2~3일간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항암, 정말 무섭구나.


그래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머리 끝까지 저려왔던 손발 신경통도, 숙취 만렙이었던 내게도 견디기 힘들었던 울렁거림도, 무릎이 꺾일 것 같던 관절통도 며칠이 지나니 견딜만 해졌다. 그러려니, 받아들이는 나의 멘탈에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 난 꼭,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과 긍정의 힘이 침대에서 나를 좀 더 빨리 일으켜 세운 것이라 생각했다. 친정 엄마가 꼭꼭 채워준 냉장고 안의 건강 반찬들로 체력을 채워나갔고, 울렁거림이 심할 땐 남편이 사다주는 바나나 우유와 오렌지 주스로 쓰디쓴 속을 달콤하게 달랬다. 손발저림이 어느 정도 적응되고는 슬슬 집 근처 산책로를 걸으며 이 암 따위에서 벗어나겠다 다짐 또 다짐을 하며 서서히 내면의 에너지를 다시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1차 항암치료 종료 후 10일 차. 며칠 전부터 두피가 어딘가 스칠 때마다 따끔거렸다. 언제쯤 탈모가 시작될까 아침에 일어나 머리카락을 당겨보며 지내기를 며칠 째, 오늘은 제법 수상한 날이었다. 미리 가발은 준비해두긴 했지만, 바리깡도 준비해두었지만, 민머리의 내 모습을 만나기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머리를 감으면 머리가 더 빨리 빠질 것 같아 전날에는 머리를 감지 않았다. 오늘은 머리를 감아볼까 했는데, 이럴수가. 머리를 쓸어올릴 때마다 머리카락이 우수수 손바닥을 그대로 타고 떨어져 내렸다. 심지어 아프지도 않았다. 다시 한 번. 또 우수수. 아, 이제 드디어 시작이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이렇게 손바닥으로 20번만 더 쓸어올리면 한 올도 남지 않고 다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릴 것만 같았다. 출근한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여보, 오늘이 디데이네요. 바리깡 충전 해놓을게요.


그날 저녁, 삭발식이 진행되었다. 살면서 이렇게 머리를 밀어볼 일이 또 언제 있겠냐고, 가발을 여러 개 사서 패션리더가 되어보겠다고 되도 않는 농담을 하며 눈을 질끈 감고 의자에 앉았다. 위잉- 바리깡이 돌아가는 소리가 길어질수록, 두피가 점점 차가워질수록 눈시울은 뜨거워졌다. 생각보다 두상이 예쁘다고 말해주는 남편의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그날의 밤. 거울 속에 내 모습은 암환자였다. 이제서야 정말 아, 나 암환자구나 실감이 났다. 텔레비전에 보던 그 암환자. 그게 나구나. 며칠 전까지 몸이 아팠던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몸이 아픈 것보다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는 것이 더 아팠다. 

애써 아프지 않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프자, 내내 울고싶은 만큼 울고 맘껏 아프고 그리고 이겨내자. 난 나의 회복력을 믿으니까. 자꾸 들여다보니 거울 속의 민머리도 나름 귀여웠다. 



그렇게 1번, 2번, 3번의 항암치료를 지나오며 나는 오히려 더욱 명랑하고 쾌활한 암환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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