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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연 Apr 11. 2021

전반전 종료

더 강력한 '후반전'이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다시, 시작되었다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전, 의사선생님은 조심스럽게 내게 '심리상담치료'를 받아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했었다. 이유인즉슨, 젊은 나이에 '암환자'가 되었고, '자궁적출술'을 경험했고, 이제 곧 찾아올 갱년기로 인한 심리적인 변화를 혼자 감당할 수 있을까하는 우려에서였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실제로 나는, 괜찮았다. '암'을 경험하며 나는 내가 생각보다 '단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감정의 기복을 자주 만나기는 하지만 그 기복 속에서 중심점을 빨리 찾아 일상으로 데려올 수 있는 힘, 그게 나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암'으로 인해 나를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나의 모습들을 사실 그 시간 동안 많이 알아가고 있었다. '암'이 내게  유일한 기쁨이랄까.


의사선생님도 나를 기특해 했다. 생각보다 잘 이겨내고 있다고 이대로 끝까지 잘 버텨주면 된다고 누구보다 나의 투병 생활을 응원해 주었다. 2차 항암치료까지는 2박 3일 입원으로 진행되었지만 3차는 당일 낮병동 시스템으로 항암을 진행해도 되겠다고 했다. 아침 일찍 병원에 와서 주사를 맞고 오후에 퇴원하는 시스템이었다. 이 편이 내겐 훨씬 나았다. 2박 3일 입원을 하는 동안 사실 치료보다 견디기 불편했던 것은 젊은 암환자를 향한 주위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이었다. 젊은이가 어디가 아파서 왔는지, 어떤 수술을 했는지, 결혼은 했는지, 애는 있는지 등등 어느 병실을 가도 가장 젊은 나를 향해 쏟아지는 질문 공세는 사실 불편을 넘어 불쾌한 적도 있었다. 내 맘을 가장 쓰리게 스치고 가는 질문은 '아이'에 관한 것들이었다.


-젊은 부부가 그래도 애가 있어야 하는데, 불쌍해서 어쩔까, 젊은데 안됐네 다른 방법은 없고?


이미 결정되어버린 나의, 우리 부부의 상황에 대한 진심어린 안타까움을 전하는 것이라고 하기엔 난 그 분들을 만난지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암환자'가 되고 다른 건 다 내려놓을 수 있었지만 '아이 문제'에 대한 건 조금 달랐다. 마치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잊고 있다가도 문득 건드려지면 크게 느껴지는 아픔이었다. 그리고 그 아픔은 사실 꽤 오랫동안 지속됐다. 그 아픔을 건드리는 사람들과 2박 3일을 함께 하는 것은 참 불편한 시간이었다. 당일 항암치료는 이런 내게 참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3차 치료를 마치고 씨티 촬영을 한 결과, 경과는 아주 좋았다. 피수치도 정상 범위를 찾아가고 있었고 씨티 사진도 깨끗했다. 그렇지만 의사 선생님은 안전한 경과를 위해 3회차를 더 진행하기를 권했다. 암 초보자 시절엔 몰랐더랬지만 원래 항암치료의 기본 스케줄은 6회차였다. 3회차에서 치료를 멈출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 굳게 믿고 기대했던 탓일까. 남은 3회차를 진행하자는 말에 버텨왔던 멘탈이 또 한 번 와르르 무너졌다.그러나 어쩌겠는가, 나을 수 있다면야. 의사선생님의 격려와 가족들의 응원, 그리고 나에 대한 믿음으로 남은 3회차의 항암치료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5월에 시작한 항암치료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9월이 되었다. 봄에 시작된 암과의 만남은 여름을 겪고, 이제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머리카락만 빠지는 줄 알았던 탈모는 내 몸에 있는 모든 털들을 앗아갔고 그 덕분에 속눈썹과 콧털의 감사함에 대해 사무치게 느끼게 되었다. 한여름엔 가발로 인해 두피가 땀띠로 뒤혔고, 말로만 듣던 갱년기 증상들도 반갑지 않게 다녀갔다. 급격한 체온의 변화, 수시로 빨개지는 두 볼, 울었다 웃었다를 반복하는 감정의 기복까지. 예상했던 것보다는 힘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꽤 힘든 시간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힘듦을 공감할 대상이 없다는 것이 서글펐다. 삼십대 초반에 겪는 갱년기 증상을 누구를 붙잡고 하소연하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시간들도 결국엔, 모두 지나가는 시간들이었다. 봄을 지나 여름이 되고 가을을 맞이하며 언제 그랬냐는듯 나의 시간들도 조금씩 평온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힘들었던 시간동안 나와 함께 머리를 빡빡 밀고 묵묵히 버텨준 남편, 당신 몸 아픈 것보다 더 아프셨을 그러나 내맘 아플까 전혀 내색하지 않았던 우리 가족들,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지만 세상의 시선에 지레 겁먹고 아이 없는 죄스런 며느리라 느낄 나를 오히려 늘 포근하게 딸처럼 품어주신 우리 시아버지, 시어머니. 그리고 변함없이 나를 지켜준 내 곁의 좋은 사람들. 이제 그들의 사랑과 응원을 자양분 삼아 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내 인생에서 '건강'을 잃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건강해야 뭐든 할 수 있다고, 그런 건강한 생각과 마음으로 살면 5년 후엔 '암환자'를 벗어던질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었다. 시골로 가자 결심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이가 있다면 백 번을 고심했을 일이지만 이제 남편과 나 우리 둘 뿐인 가족이 도시에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공기 좋은 곳에서, 직접 기르고 가꾼 정성스런 음식을 먹고 산다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겠지. 그렇게 우리의 남은 인생을 시골에서 보내자 남편과 약속했다. 이미 상상만으로도 완벽한 생활이었다. 암 따위가 절대 넘볼 수 없는 그런 건강한 삶.




그러나, 암은 우리의 생각보다 무서웠다. '종료' 싸인만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암환자'의 인생에 켜진 불은 완벽한 종료 불빛이 아니라 '전반전'의 종료 불빛이었다. 전반전보다 더 강력한 '암'과의 후반전이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다시 시작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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