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다...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야기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야기까지...
강력한 해군 '아테네'
vs
최정예 육군 '스파르타'
아테네의 성장의 밑거름
'강력한 해군력'&'델로스 동맹'
좀 더 설명하자면, 헬레스폰트 해협은 에게 해와 마르마라 해를 잇는 지금의 터키 해협으로, 현재 명칭은 다르다넬스 해협이다. 길이는 61킬로미터이지만 폭은 1~6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는다. 평균 깊이는 55미터이고, 가장 깊은 곳은 81미터다. 페르시아 제국의 크세르크세스 1세와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정복을 위해 이 해협을 건넜고, 비잔티움 제국에게 이 해협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키는 아주 중요한 길목이기도 했다.(출처: 위키백과)
스파르타 중심
펠로폰네소스 동맹
소수 지배자 권력 독점 '과두제'
그리스 내에 이렇게 서로 다른 정치 체제가 양립하면서 기원전 5세기부터는 민주주의에 호의를 느끼는 그리스인은 '아테네'를, 독재 체제 경향을 가진 그리스인들은 '스파르타'를 지지하게 됐다고 한다.
BC 431∼BC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흠.... 너무 후려쳤나....
투퀴디데스 역사서
'펠로폰네소스 전생사' 내용을 토대로
(참고: 위키백과)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델포이 신탁'이다. 즉, 신에게 에피담노스를 창건한 코린트인들에게 도시를 맡기고 그들에게서 도움을 구해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했고, 코린트인들에게 도시를 맡기고 그들을 길잡이로 삼으라는 답을 받았다는 것. 이를 명분 삼아 에피담노스는 코린트에 지원 요청하게 됐다고 한다.
또 하나의 사건
메가라(Megara) 칙령 사건
칙령(勅令): 왕정 체제에서 임금이 내리는 명령의 일종으로 그 자체로 법의 효력이 있었다.
당시 메가라는 무역의 거점이었는데, 지역 주민은 배를 이용해 인근 폴리스에 무기를 제공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테네의 '메가라 칙령'은 메가라에게 경제적 타격을 줬다. 이 때문에 현대 경제사학자들은 '메가라 칙령'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주요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고 한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선전 선포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코린트는 아테네가 항복한 이후 스파르타에 아테네 전후 처리를 놓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관철되지 않자 스파르타와의 전쟁도 불사한다. 그런 점으로 짐작해 볼 때 코린트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내에서 스파르타 못지않게 강한 군사력일 가지고 있던 것 아닐까
30년 평화조약(Thirty Years' Peace)은 기원전 446년(또는 445년)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맺어진 협정으로 초기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60년)으로 분류되는 분쟁은 일단 멈추게 된다. 30년 평화 조약은 15년 간 지속되었다가 스파르타의 선전포고로 파기됐다.
첫 번째 국면
아르키다무스 전쟁(BC.431~BC.404년)
스파르타의 아티카 공격 vs 아테네의 해안 습격
헬로트(helot)는 스파르타인에게 정복돼 노예 신분이 된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스파르타에서 국가에 소속돼 비자유 신분으로 공유재산으로 분류됐다. 가족을 가지는 것이 허용됐지만 노예 신문은 대대로 이어졌고, 토지에 묶여 농업에 종사하며 주인에게 수확물의 일부를 바쳤다고 한다.
이런 비화도 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지만 기원전 430년에 흑사병이란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흑사병은 인구가 밀집된 아테네 시를 휩쓸었는데, 3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사망했고 선원들과 병사들은 물론 페리클레스 자신과 그의 아들들도 이 병으로 죽었다. 전염병으로 아테네 인구의 1/3~2/3 정도가 사망함에 따라 아테네 국력은 현격히 약해졌지만. 흑사병에 대한 공포는 스파르타에도 전해져 스파르타 역시 아티카 공격을 포기했다는 설도 있다. 자칫 전염병이 스파르타로 번질 수 있으니 말이다.
잠시...
크립테이아는 미래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하게 훈련을 마친 일부 어린 스파르타 젊은이들에게 스파르타 전사로서 가치를 증명할 기회를 부여했는데, 헬로트를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다. 밤이 되면, 선택받은 젊은 스파르타인은 그들이 필요한 식량을 얻기 위해 라코니아 교외로 나가 교육받은 칼을 휴대한 채 마주치는 아무 헬로트나 죽일 수 있도록 파견됐다고 한다. 이는 헬로트의 폭동을 예방하고, 그들의 인구를 억제하기 위함이었다는 게 역사가들의 설명이다
다시 돌아와
스파르타의 패권 재확립 계기
만티네아 전투
(Battle of Mantinea)
그러던 중
당연히 아테네의 일부 지도자들은 이 같은 모험에 반대했다고 한다. 시칠리아 섬은 아테네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현재 시라쿠사가 스파르타에 도움을 주고는 있지만 스파르타에게 크게 중요한 도시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시라쿠사 공격은 득 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고 한다.
시라쿠사 섬으로 떠난
아테네 원정대
원정대는 시칠리아 섬 주둔부터 힘겨웠다고 한다. 9000명의 정예병을 태운 함대가 시칠리아 섬에 도착해 시라쿠사와 가까운 몇몇 소도시에 접근해 주둔 허가를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시라쿠사는 무방비 상태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역사에는 만약이란 없지만, 알키비아데스가 소환되지 않았더라면, 바로 시라쿠사로 진격했더라면... 역사는 결말은 달라졌을 지도...
아테네와 시라쿠사와의 전투
아티카의 데켈레아 방어전
에우보이아(고대 그리스어: Εὔβοια)는 현재 에비아(현대 그리스어: Εύβοια)로, 그리스에게 해에서 인구나 면적에서 2위를 차지하는 섬이다. 이 섬은 매우 좁은 에우리포스 해협으로 그리스 본토와 분리돼 있다.
아테네의 몰락
마지막 전쟁 준비를 위한
아테네의 처절함
멸망의 기로에서 아테네는 기적과도 같이 해군력을 일부 회복하고 심지어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는 스파르타를 상대로 승리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아테네의 마지막 승리로 기록된 아르기누사이 해전 당시 아테네는 상시 출동 가능한 함대 규모가 200여 척에 달했다. 이를 마련하기 위해 아테네는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끌어모아야 했던 처절함이 드러난다. 그 과정을 좀 살펴보면...
스파르타의 몰락
테베의 패망
마케도니아 시대 개막
드디어
끝...
혹여라도 이 글을 보시다가 내용 중에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면 해당 부분에 대한 참고문헌과 함께 고쳐야 할 부분을 알려주시면 수정 보완하겠습니다.
Shin의 물방울 Tip
시칠리아 관련 와인 소개
영화 '300' 속
스파르타 총공격 실제 배경
'테르모필레 전투'가 궁금하다면!!!
영화 '300:제국의 부활' 속
실제 배경이 된 전투
'살라미스 해전'이 궁금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