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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화문덕 Jun 12. 2019

영원한 건 없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다...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야기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야기까지...

영화 '300' 속 테르모필레 전투 그리고 후속 편 '300:제국의 부활' 속 살라미스 해전 이 두 이야기를 공부하며 정리하다 보니 알게 된 '펠로폰네소스 전쟁'. 사실 이 이야기까지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기왕 시작한 이야기이니 마무리는 지어야 할 듯하여...


자세하게 보다는 아주 후려쳐서 간략하게 정리해볼까 한다. 내가 역사학자가 아니지만, 최대한 관련 내용을 쉽게 정리해보겠다.

강력한 해군 '아테네'
vs
최정예 육군 '스파르타'

기원전 492~기원전 448년까지 장장 40여 년에 걸친 전투 페르시아 군과의 전투를 승리로 장식한 그리스는 페르시아 공격에 대비하는 과정에서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이끄는 두 개의 동맹으로 분열된다.


에게 해와 맞닿아 있는 아테네가 중심이 된 '델로스 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반도 내 스파르타가 중심이 된 '펠로폰네소스 동맹' 이렇게.


델로스 동맹(기원전 478~기원전 477년 사이 겨울)이라 불리는 이유는 동맹 서약 의식을 한 섬이 델로스여서다. 이오니아 여러 섬과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 식민지들, 에게 해 연안 도시들이 모여 동맹을 맺는다.


델로스 동맹그야말로 '타도 페르시아'를 외쳤다. 페르시아 통치 하에 있는 그리스인 해방, 페르시아 재침공 방지, 그리스 섬들을 약탈한 것에 대한 페르시아의 보상 등을 목적으로 내세웠다.


당시 아테네는 강력한 해상 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스파르타는 최정예 육군의 상징이었다. 이는 영화 '300'을 통해 살펴본 '테르모필레 전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상전인 테르모필레 협곡에서는 스파르타 중심의 그리스 연합군이, 해전인 아르테미시온 해협에서는 아테네 중심의 그리스 연합군이 각각 페르시아 군과의 한판 승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자세한 건 아래 링크 참조

아테네의 성장의 밑거름
'강력한 해군력'&'델로스 동맹'

아테네가 중심이 된 델로스 동맹은 페르시아 세력을 유럽과 헬레스폰트 해협 근처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즉, 아테네가 에게 해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 것이다.


아테네는 강한 해군력으로 에게 해의 무역을 장악하며 상업적으로도 번창하게 된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국들로부터 회비를 거둬들였을 뿐 아니라, 군사 지휘권까지 갖게 된다.


이후 델로스 동맹이 사실상 '아테네 제국'으로 변모하게 되고 델로스 동맹국은 아테네 속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델로스 섬에 놓여 있던 재무국은 기원전 454년에 아테네로 옮겨지고 동맹국으로부터 거둬들이는 일종의 회비도 대폭 인상된다. 애초 총액 460 달란트였던 것이 약 20년 만(기원전 425년)에 총액 기준 약 1500 달란트로 3배 이상 뛴다. 심지어 아테네는 이렇게 거둬들인 동맹국 회비를 아테네를 위한 신전 건축과 군자금으로 썼다고 한다.

출처: 구글 지도
출처: 두산백과(지금의 터키 다르다닐스해협이 과거 헬레스폰트 해협이다)
좀 더 설명하자면, 헬레스폰트 해협은 에게 해와 마르마라 해를 잇는 지금의 터키 해협으로, 현재 명칭은 다르다넬스 해협이다. 길이는 61킬로미터이지만 폭은 1~6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는다. 평균 깊이는 55미터이고, 가장 깊은 곳은 81미터다. 페르시아 제국의 크세르크세스 1세와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정복을 위해 이 해협을 건넜고, 비잔티움 제국에게 이 해협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키는 아주 중요한 길목이기도 했다.(출처: 위키백과)

이런 이야기도 있다. 델로스 동맹은 처음부터 아테네가 주변 도시들을 지배하기 위한 명분이었다고.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한 아테네가 에게 해를 비롯한 해상 무역을 지배하게 되니 해상 무역에 의존해야 하는 주변 국가들이 델로스 동맹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일부 국가는 강제로 동맹에 가입됐을 뿐 아니라, 마음대로 탈퇴하지도 못하게 했다는 얘기도 있다. 사실상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이란 미명 하에 지배자 역할을 했다는 것. 아테네의 '민주주의'도 함께 전파됐을 것이다.


실제로 기원전 465년 즈음부터는 동맹국의 이탈 조짐이 생겨났다고 한다. 더 이상 그리스에 페르시아의 위협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해서다. 급기야 동맹국에서 탈퇴한 나라가 생겨나게 됐고 아테네는 응징을 가한다. 해당 도시를 공격해 불바다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아테네에서 델로스 동맹국들로부터 거둬들이는 회비는 중요했다. 아테네 해군을 운영하는 데 쓰이는 중요한 재원이었다. 때문에 동맹국 이탈은 곧 아테네 해군을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스파르타 중심
펠로폰네소스 동맹
소수 지배자 권력 독점 '과두제'

아테네 옆동네인 펠로폰네소스 반도에도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과 같은 동맹이 있었다. 이름은 '펠로폰네소스 동맹'이었다. 이들 동맹국은 소수의 사람들이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독점하는 정치 체제인 '과두 정치(과두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스 내에 이렇게 서로 다른 정치 체제가 양립하면서 기원전 5세기부터는 민주주의에 호의를 느끼는 그리스인은 '아테네'를, 독재 체제 경향을 가진 그리스인들은 '스파르타'를 지지하게 됐다고 한다.


아테네의 성장은 그리스 내에 민주주의의 확대로 해석할 수 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지금과 비교하면 여자, 노예, 외국인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점 등의 한계는 있지만, 시민(18세 이상 성인 남자)이면 9일마다 한 번씩 열리는 민회에 참석해 아테네의 중요한 사항들 결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당시에는 과두정치를 위협하는 요인이었을 수 있다는 평가다.


게다가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기반으로 에게 해를 넘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위협하는 상대로 무섭게 성장하니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후려쳐서 생각해보면, 과두제를 채택하며 국가란 테두리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고 있는 지배자들에게 아테네의 성장, 즉 민주주의는 자신들의 국가 존립을 위협하는 존재였을 수 있다.

BC 431∼BC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출처: 위키백과(좌), 두산백과(우) ; 초록색(펠로폰네소스 동맹 세력권), 주황색(델로스 동맹 세력권)

아테네는 끊임없이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이에 대한 원인으로는 아테네 시민들이 주변국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 자신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줄 것을 요구한 데 따른 것이란 설, 아테네의 해상 무역을 위한 삼단 노선 운용을 위한 인건비 상승에 따른 동맹국 개척설(동맹국 회비 인상) 등이 있다.


일단 너무 자세하면 지루하기도 하고 내 역사적 지식이 그 정도로 깊지도 않으니 또다시 후려쳐서 얘기하면...


아테네 제국(델로스 동맹)이 발전하면서 그리스 도시 여러 도시를 속국화시켜나감에 따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위협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 중 에피담노스란 도시를 두고 '케르키라'란 국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국 간의 충돌이 일어났는데, 아테네가 케르키라를 델로스 동맹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는 결국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전쟁으로 확대된다. 이것이 28년 간 지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작이다.

흠.... 너무 후려쳤나....
출처: 구글 지도 편집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케르키라와 코린트는 위 지도에서 보듯이 지리적으로 꽤 먼 상황. 그들은 어쩌다 충돌하게 된 것일까.

투퀴디데스 역사서
'펠로폰네소스 전생사' 내용을 토대로
(참고: 위키백과)

일단 역사는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니... 지루하고 딱딱한 내용일 수 있겠으나... 간단히(?) 정리해보면...


고대 그리스 장군이자 역사가인 투퀴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는 전쟁의 시작을 에피담노스에서 벌어진 분쟁으로 기록돼 있다고 한다.


에피담노스는 케르키라 북쪽에 위치한(이오니오스 만 서북쪽 변방) 도시로 현재는  알바니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알바니아 최대의 항구 도시다.

에피담노스는 케르키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이 도시를 처음 개척한 것은 코린트였다고 한다. 실제로 정착민들 중에는 코린트 인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코린트는 코린트 나름대로, 케르키라는 케르키라 나름대로 에피담노스를 자신의 영토라 생각했다고 한다.


문제의 시작은 바로 에피담노스 민중파와 귀족 사이에 벌어진 분쟁. 에피담노스의 민중파(민중의 이익을 옹호하던 정치가)가 귀족을 추방했고, 귀족은 에피담노스 주변에 비헬라스인과 연대했다고 한다.


이에 에피담노스 민중파는 처음에는 케르키라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게 되자 코린트에 도움을 구하고, 코린트는 이에 응한다. 린트는 군대를 자신이 지배하고 있던 아폴로니아(현재 알바니아 피에르; 케르키라와 에피담노스 사이 위치, 위 지도 참고)로 파병하게 된다. 육로로.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델포이 신탁'이다. 즉, 신에게 에피담노스를 창건한 코린트인들에게 도시를 맡기고 그들에게서 도움을 구해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했고, 코린트인들에게 도시를 맡기고 그들을 길잡이로 삼으라는 답을 받았다는 것. 이를 명분 삼아 에피담노스는 코린트에 지원 요청하게 됐다고 한다.


코린트가 지원에 나서자, 에피담노스를 자신의 속국이라고 생각한 케르키라가 코린트를 저지한다. 이 전투에서 케르키라가 승리하게 되고, 여세를 몰아 케르키라는 크린트의 속국과 펠로폰네소스 동맹국 엘리스를 공격한다. 이에 코린트는 동맹국들과 힘을 합쳐 해군력을 증강시키게 된다.


이때 동맹국이 없던 케르키라는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아테네는 케르키라와 방어 동맹을 맺기로 결정한다. 에피담노스를 두고 벌어진 케르키라와 코린트 간의 전투는 코린트가 퇴각을 결정하면서 승패 없이 끝난다. 강력한 해군력을 지닌 아테네가 전투에 개입하자, 전투를 치르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사건
메가라(Megara) 칙령 사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빌미가 된 또 하나의 사건이 있는데, 이는 일명 '메가라 칙령' 사건이다. 메가라는 초기에 코린트의 속국이었다. 당연히 펠로폰네소스 동맹이기도 했다.

칙령(勅令): 왕정 체제에서 임금이 내리는 명령의 일종으로 그 자체로 법의 효력이 있었다.
출처: 구글 지도 편집

아테네는 기원전 433~432년에 칙령을 내린다. 펠로폰네소스 동맹국인 메가라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역금지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메가라 사람은 아테네뿐 아니라 인근 항구에도 출입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에 스파르타는 법령 철회를 요구했지만 아테네는 끝내 거부했다.

당시 메가라는 무역의 거점이었는데, 지역 주민은 배를 이용해 인근 폴리스에 무기를 제공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테네의 '메가라 칙령'은 메가라에게 경제적 타격을 줬다. 이 때문에 현대 경제사학자들은 '메가라 칙령'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주요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고 한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선전 선포

기원전 432년 코린트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에 회의 소집을 요청한다. 이 회의에 동맹국들은 대거 참석하였고 심지어 초대받지 않은 아테네 대표들까지 왔다고 한다. 결국 이날 회의에는 코린트와 아테네 간의 토론장이 됐다고 전해진다.


투퀴디데스에 따르면 코린트인들은 스파르타의 수동적인 자세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고, 이런 태도가 지속될 경우 동맹국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코린트는 아테네가 항복한 이후 스파르타에 아테네 전후 처리를 놓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관철되지 않자 스파르타와의 전쟁도 불사한다. 그런 점으로 짐작해 볼 때 코린트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내에서 스파르타 못지않게 강한 군사력일 가지고 있던 것 아닐까

아테네의 반박도 만만치 않았다고 전해지는데, 아테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자국의 승리 등을 나열하며 자신들과 같은 강력한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상기시켰다고 한다. 그러면서 '30년의 평화조약'에 규정된 대로 스파르타가 중재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스파르타의 동맹국들은 아테네가 먼저 30년의 평화조약을 위반한 것으로 표결을 통해 결정했고,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30년 평화조약(Thirty Years' Peace)은 기원전 446년(또는 445년)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맺어진 협정으로 초기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60년)으로 분류되는 분쟁은 일단 멈추게 된다. 30년 평화 조약은 15년 간 지속되었다가 스파르타의 선전포고로 파기됐다.
첫 번째 국면
아르키다무스 전쟁(BC.431~BC.404년)
스파르타의 아티카 공격 vs 아테네의 해안 습격

본격적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작은 스파르타가 아테네 '아티카'를 선제공격하면서 시작됐다. 이는 스파르타의 아르키다무스 2세(Archidamus II)의 이름을 따서 아르키다무스 전쟁(Archidamian War)으로 불린다.


스파르타의 전략은 아테네 주변의 영토를 침공하는 것. 이는 당연했다. 코린트를 제외하면 스파르타를 비롯한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은 거의 전적으로 육군에 의존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해군력을 지닌 아테네와 불리한 해전은 피하고 자신 있는 지상전을 꾀한 것이다.

출처: 위키백과

아티카 주민들은 스파르타의 공격이 시작되자 농장을 버리고 아테네와 피레아스(Piraeus) 항구를 연결하는 장성(long walls) 안쪽으로 피신했다. 이들은 고립된 것처럼 보였지만 성벽 안에서 수비를 하며 항구를 통해 동맹국으로부터 식량을 보급받을 수 있었다.(위 우측 이미지 참고)


스파르타의 공격에 아테네는 주변 비옥한 농토를 이용할 수 없게 됐지만 바다를 장악하고 있어 큰 타격은 입지 않았다. 에게 해 해협 주변에 넓게 포진한 델로스 동맹국들로부터 들어오는 조공은 줄지 않았다.


스파르타는 아키타를 오래 점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한다. 추수를 돕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도 있었고, 스파르타 노예 계층인 헬로트(helot)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계속 감시해야 해서다.


결국 스파르타인들은 3주 정도 아티카를 점령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헬로트(helot)는 스파르타인에게 정복돼 노예 신분이 된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스파르타에서 국가에 소속돼  비자유 신분으로 공유재산으로 분류됐다. 가족을 가지는 것이 허용됐지만 노예 신문은 대대로 이어졌고, 토지에 묶여 농업에 종사하며 주인에게 수확물의 일부를 바쳤다고 한다.


스파르타는 아티카의 침략을 되풀이하였고, 아테네는 자신의 세력권에 불안의 징조를 억누르기 위해 해군력을 이용래 펠로폰네소스 반도 해안을 습격했다. 스파르타와의 지상전은 피하고 우위에 있는 해군으로 응수하자는 전략을 짠 것이다. 이는 페리클레스의 전략이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군사적으로 대치하며 10년간 전쟁을 계속하다가 기원전 421년 니키아스 평화조약 맺고 휴전하게 된다.

이런 비화도 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지만 기원전 430년에 흑사병이란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흑사병은 인구가 밀집된 아테네 시를 휩쓸었는데, 3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사망했고 선원들과 병사들은 물론 페리클레스 자신과 그의 아들들도 이 병으로 죽었다. 전염병으로 아테네 인구의 1/3~2/3 정도가 사망함에 따라 아테네 국력은 현격히 약해졌지만. 흑사병에 대한 공포는 스파르타에도 전해져 스파르타 역시 아티카 공격을 포기했다는 설도 있다. 자칫 전염병이 스파르타로 번질 수 있으니 말이다.


흑사병으로 페리클레스가 죽자, 아테네에는 정치 공백이 생겼고 알키비아데스와 같은 신흥 정치가가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시라쿠사 전쟁을 제안한다.

잠시...

스파르타인의 정복민을 대상으로 한 공포 정치를 짚고 넘어가면...


스파르타인들은 항상 헬로트들의 반란에 신경을 곤두세웠다고 한다. 스파르타 내 스파르타인이 약 5만 명 (시민과 그 가족) 수준이었는데, 헬로트는 10만 명규모에 달해 반란이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해서다. 실제로 기원전 7세기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고 한다.


스파르타는 불만을 가진 헬로트를 정기적으로 단속하는 등 공포를 통한 헬로트를 지배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스파르타에서는 군사 교련의 일환으로 젊은 스파르타 인의 크립테이아(Krypteia)라는 헬로트 살해 행위를 장려했다고 한다.

크립테이아는 미래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하게 훈련을 마친 일부 어린 스파르타 젊은이들에게 스파르타 전사로서 가치를 증명할 기회를 부여했는데, 헬로트를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다. 밤이 되면, 선택받은 젊은 스파르타인은 그들이 필요한 식량을 얻기 위해 라코니아 교외로 나가 교육받은 칼을 휴대한 채 마주치는 아무 헬로트나 죽일 수 있도록 파견됐다고 한다. 이는 헬로트의 폭동을 예방하고, 그들의 인구를 억제하기 위함이었다는 게 역사가들의 설명이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동안인 기원전 424년에는 헬로트들에게 적을 상대로 공을 세우면 노예에서 해방시키겠다고 통보했다고 전해진다. 가장 유능하고, 자유를 열망하고 있다고 생각된 약 2000명의 헬로트가 선발됐는데, 이들은 결국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다시 돌아와

후려쳐서 요약해보면, 아테네와의 전투에서 이렇다 할 승리를 보여주지 못한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내에서 위상이 축소되는데 만티네아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펠로폰네소스 동맹 내 패권 재확립하게 된다...

스파르타의 패권 재확립 계기
만티네아 전투
(Battle of Mantinea)

기원전 418년 만티네아 전투(Battle of Mantinea)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그리스 본토에서 벌어졌던 최대 규모의 지상전이다. 이 전투 이전까지만 해도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기나긴 전쟁에서 승기를 몰아가는 듯했다. 스파르타가 해전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말이다.


아테네가 전쟁에서 우위를 보이자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분열 조짐이 나타나게 되고 스파르타는 아테네와의 전투에서 자신들의 강인함을 보여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


그러던 중 스파르타는 테케아인들과 함께 아르고스, 아테네, 만티네아 및 아르카디아의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이들 중 대부분의 국가들은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편입시킨다.


이 전투의 승리로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의 패권을 재확립하게 된다.


스파르타는 이후 델로스 동맹 하에 있던 국가들을 위협하며 동맹 탈퇴를 강요한다. 델로스 동맹은 아테네에게 중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제공해주는 창구였으니 아테네에게 델로스 동맹국의 감소는 곧 아테네가 활용할 수 있는 인력과 돈이 줄어드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전쟁이 시작된 지 17년째 되던 해에 지금의 이탈리아 남부에 위치한 시칠리아(Sicily)섬에 있는 델로스 동맹국들 중 하나가 시라쿠스에게 공격당하고 있다는 소식이 아테네로 전해진다.


시라쿠스는 스파르타인들과 마찬가지로 도리아 인종이었고 공격받고 있는 시칠리아섬의 동맹국은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이오니아 인종이었다. 당시 시라쿠사는 스파르타를 지지하는 그리스 도시 중 하나였으며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스파르타 군사들에게 보급품과 선박을 판매하는 공급지이기도 했다. 아테네가 그들의 전투에 개입할 명분은 이미 충족시켰던 것이다.


아테네 지도자들은 이를 빌미로 하나의 전략을 짜낸다. 바로 시라쿠사(Syracuse)를 점령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시칠리아 섬에 있는 시라쿠사는 아테네만큼 크고 번영했던 선진 국가였다고 한다.


사실 아테네의 셈법은 따로 있었다. 당시 시칠리아 섬의 대다수 도시들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중립적 입장을 지켰는데, 섬의 가장 큰 도시인 시라쿠사가 아테네에 함락되면 이에 위협을 느낀 다른 도시들이 델로스 동맹에 참여하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 이렇게 되면 아테네는 늘어난 새 동맹국으로 인해 줄어들던 인력과 돈을 상당히 많이 확보할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군대의 사기도 함께 올라가게 될 것으로 판단했다.


물론 시칠리아 섬 전체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긴 했다. 그럼에도 원정의 지도자였던 알키비아데스(Alcibiades)를 중심으로 뭉쳤던 아테네는 그들의 야심을 굽히지 않았다.


▼알키비아데스의 삶은 참 파란만장했다 아래 링크 참조


물론 이는 도박과도 같았다. 아테네의 공격에 위험을 느낀 중립국들이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가입하게 될 수도 있어서다.


결국 아테네는 시라쿠사 섬을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점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아테네의 일부 지도자들은 이 같은 모험에 반대했다고 한다. 시칠리아 섬은 아테네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현재 시라쿠사가 스파르타에 도움을 주고는 있지만 스파르타에게 크게 중요한 도시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시라쿠사 공격은 득 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고 한다.
시라쿠사 섬으로 떠난
아테네 원정대

기원전 415년. 드디어 아테네는 시라쿠사를 공격하기 위해 거대한 원정대를 꾸리게 된다. 알키비아데스가 지휘관으로 임명된다.


그런데 원정대 출정을 앞두고 아테네의 신상인 헤르마(제우스 신의 심부름꾼이자 길을 가는 모든 사람들의 수호신인 헤르메스의 흉상으로 당시 도시의 여러 공공장소에 놓여 있었다고 함)가 훼손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이 일로 아테네 시민 전체가 두려움에 빠졌고 알키비아데스는 예전에 그리스의 비밀 종교의식인 엘레우시스 신비 의식을 모독했다는 혐의와 함께 헤르마 모독 사건의 주동자로 고발당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즉시 자신에 대한 재판을 열 것을 요구했지만, 재판은 열리지 않았고 의혹이 풀리지 않은 채 그는 원정을 떠나게 된다.

출처: 구글 지도

원정대가 시칠리아 섬에 도착한 직후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로부터 재판에 출석하라며 소환령을 받게 되고 그는 귀국 길에 도망친다. 그는 자신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는 것을 알게 되고 스파르타로 망명한다. 원정대 새 지도자로 니키아스(Nicias) 추대된다.


스파르타에 투항한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가 시칠리아 섬을 정복한 뒤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정복할 것이고 그다음에는 새로운 정복지에서 얻은 수입과 병력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진격해 올 것이라고 알려준다.


그는 스파르타인시라쿠사를 지원하 아티카의 데켈레아에 장군을 파견해 요새화 기지를 구축할 조언한다. 그는 아테네의 사정을 잘 알았기에 아테네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안을 스파르타에 알려준 이다.

원정대는 시칠리아 섬 주둔부터 힘겨웠다고 한다. 9000명의 정예병을 태운 함대가 시칠리아 섬에 도착해 시라쿠사와 가까운 몇몇 소도시에 접근해 주둔 허가를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시라쿠사는 무방비 상태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역사에는 만약이란 없지만, 알키비아데스가 소환되지 않았더라면, 바로 시라쿠사로 진격했더라면... 역사는 결말은 달라졌을 지도...
아테네와 시라쿠사와의 전투

아테네군은 100척 이상의 함대와 약 5,000 병력의 보병 및 경기갑부대로 이루어졌다. 기병은 대략 30기에 불과했는데, 시라쿠스의 잘 훈련된 대규모 기병대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시칠리아 섬에 상륙하자 곧 대여섯의 도시들이 아테네 편에 동참했다.


니키아스는 즉각 공격에 나서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고 한다. 니키아스는 애초 시라쿠사 원정에 반대했던 이로, 신중하기로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대규모 함대와 군대로 시라쿠사 인근 해변에 위협만 가했다.


결국 원정 첫해인 BC. 415년, 아테네는 시라쿠사에게 별 타격을 주지 못하고 겨울을 맞이하게 됐다. 아테네는 동계 야영지로 철수해야 했고 시라쿠사를 파괴할 준비를 하며 겨울을 보냈다. 시간 여유를 얻은 시라쿠사는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했고, 길립푸스(Gylippus) 장군이 이끄는 지원병이 시라쿠사에 도착했다. 길립푸스는 시라쿠사 군의 지휘를 맡아 아테네를 잇달아 격파하며 시라쿠사를 지켜냈다.


2년 여가 흘러 BC. 413년이 되자 시라쿠사는 새로운 병력으로 용병을 7000명 고용했다. 그 사이 시칠리아 섬 도시들도 대규모 해군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시라쿠사 주변에 성벽을 쌓는 시도를 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하였지만 시라쿠사를 정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니키아스는 자신의 신병(어떤 원인으로 몸에 생긴 병)을 이유로 자신을 사령관직에서 물러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아울러 모든 침략 계획을 철수해야 한다고 아테네에 전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데모스테네스가 이끄는 증원군(함대와 5000여 명의 장갑 보병)이 도착하게 된다.


BC. 413년 8월 27일 월식이 일어나자 미신을 믿었던 니키아스는 철수를 연기하라는 예언자의 충고로 받아들이게 되고, 철수를 미루던 아테네 함대는 시라쿠사 대항구에서 시라쿠사에 참패를 당한다. 시라쿠사 기병대는 아테네 잔여 병력을 찾아내 죽이거나 노예로 삼았다고 한다.

아티카의 데켈레아 방어전

스파르타는 시라쿠사에 지원병을 보내는 한편, 알키비아데스의 조언에 따라 아테네 인근 데켈레아를 요새화해 아테네가 농토를 아예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데켈레아가 요새화 되자 아테네는 에우보이아(Euboea)로부터 육로를 통한 식량수송이 불가능해졌고 모든 식량을 더 많은 비용을 들여가며 해상운송에 의지해야 했다.

에우보이아(고대 그리스어: Εὔβοια)는 현재 에비아(현대 그리스어: Εύβοια)로, 그리스에게 해에서 인구나 면적에서 2위를 차지하는 섬이다. 이 섬은 매우 좁은 에우리포스 해협으로 그리스 본토와 분리돼 있다.

또한 데켈레아 요새를 기반으로 스파르타 장갑 보병들은 인근 은광산에서 일하던 2만 명의 아테네 노예들을 해방시키며 아테네의 은 생산을 전면 중단시킨다. 국고는 곧 바닥이 나게 됐고 아테네는 동맹군에 더 많은 돈을 요구하게  델로스 동맹 내 반란 조짐이 일게 된다.

아테네의 몰락

이쯤 되자 아테네 제국도 끝날 때가 됐다는 인식이 그리스 전역으로 확산됐다. 아테네의 국고는 바닥이고 바다 위를 호령하던 아테네 함대도 사라졌으니 말이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으며 아테네에 종속된 에게 해와 이오니아 국가들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지원하며 아테네 패권을 잠식해 나간다.


아테네는 동맹국으로부터 들어오는 돈으로 국고를 채우며 해군력을 키워나갔으나 BC. 405년 아이고스포타이모이(Battle of Aegospotami)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가 궤멸되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사실상 끝나게 된다.


오랜 포위로 인한 기아와 전염병에 시달린 끝에 아테네는 BC. 405년 스파르타에 항복했고, 델로스 동맹국들도 투항한다. 항복한 아테네는 장벽과 함대를 해체해야 했으며 해외의 재산들을 모두 박탈당했다. 이후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속국으로 전락했고, 그리스의 주도권은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넘어가게 된다.

마지막 전쟁 준비를 위한
아테네의 처절함
멸망의 기로에서 아테네는 기적과도 같이 해군력을 일부 회복하고 심지어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는 스파르타를 상대로 승리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아테네의 마지막 승리로 기록된 아르기누사이 해전 당시 아테네는 상시 출동 가능한 함대 규모가 200여 척에 달했다. 이를 마련하기 위해 아테네는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끌어모아야 했던 처절함이 드러난다. 그 과정을 좀 살펴보면...

우선 아테네는 전쟁 준비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신전 지붕과 아크로폴리스에 있던 각종 신상들에 입혀진 금박을 다 긁어냈다고 한다. 금과 은이 통째로 들어간 신상은 통째로 녹였다고 전해진다. 앞서 아테네 시라쿠사 원정대의 첫 번째 지휘관이었던 알키비아데스가 신성 모독 혐의로 사형에 처해졌다는 것을 되짚어본다면 아테네의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짐작된다.


전쟁을 하려면 사람이 필요했는데, 엄격한 신분제 국가였던 아테네는 해군에 복무하는 노예 및 외국인들에게 아테네 시민권을 완전히 개방하다는 조건을 내걸며 군인이 될 수 있는 연령대 사람이면 자유인이든 예든 가리지 않고 배에 태웠다고 한다.

스파르타의 몰락

아테네가 항복한 이후 아테네 전후 처리에 불만을 품은 코린트와 테베가 반기를 들게 되고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코린트 전쟁과 스파르타-테베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코린트와 테베는 아테네 도시를 파괴하고 시민들을 모두 노예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페르시아군의 침략 당시 큰 공을 세웠던 도시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코린트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잇따른 전투로 국력이 쇠약해진 스파르타는 결국 BC. 371년에 레욱트라 전투(Battle of Leuctra)에서 테베에 지게 되고, 그리스의 주도권은 테베로 넘어가게 된다.


이때 스파르타는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받았다. 스파르타인의 상당수가 이 전투로 목숨을 잃었을 뿐 아니라, 스파르타 국가 안에서 노예 신분이었던 헬로트들이 테베에 의해 해방됐다.

테베의 패망
마케도니아 시대 개막

테베의 영광도 잠시, 장창병과 기병으로 무장한 마케도니아가 북쪽에서 밀고 내려오면서 그리스 전체를 정복한다. 이후 기원전 340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 마케도니아 왕국이 그리스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리스는 유럽 역사 속에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리스 영토는 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다가 19세기에 들어서야 독립하게 된다. 그리스에 남은 건 신화와 철학뿐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드디어
끝...

아무리 후려쳐도 끝나지 않는 방대한 전쟁 이야기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너무도 많은 역사가 숨겨져 있는 이야기를 파보겠다고 호기롭게 덤벼들었다가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 방대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야기를 마무리하게 되어 감개무량하다.


위키백과, 두산백과, 나무위키 등에 실린 내용을 주로 참고했으며, 인물 정보 등은 다음 백과에 나온 내용을 토대로 작성했다. 역사 전문가가 아니지만 최대한 정확한 내용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혹여라도 이 글을 보시다가 내용 중에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면 해당 부분에 대한 참고문헌과 함께 고쳐야 할 부분을 알려주시면 수정 보완하겠습니다.
Shin의 물방울 Tip
시칠리아 관련 와인 소개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 등장한 시칠리아 섬. 시칠리아 섬 전투에서 패하면서 사실상 그리스는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돈나푸가타 앙겔리는 그러부터 아주 먼 훗날인 19세기 이야기가 담겨있는 와인이지만, 시칠리아 역사를 담고 있어 추천한다.

영화 '300' 속
스파르타 총공격 실제 배경
'테르모필레 전투'가 궁금하다면!!!
영화 '300:제국의 부활' 속
실제 배경이 된 전투
'살라미스 해전'이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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