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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화문덕 Dec 02. 2019

美 서부여행 9박10일 뽀개기 #7

여행 속 슬픈 이야기...'올리브 오트맨'과 '맥도널드 형제'

이제 다시 LA로

오늘은 하나투어 '라스베이거스+그랜드캐년' 패키지 2박 3일 투어의 마지막 날이다. 우리는 마지막 여정인 '올리브 오트맨'의 전설이 있는 오래된 금광 마을에 들렀다.


오트맨 마을은 제2의 라스베이거스로 불리는 네바다주 라플린에서 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애리조나주 모하비 카운티 자치구'에 자리하고 있다.

오트맨 마을

이 마을은 서부 개척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관광지라고 했다. 미국 애리조나 모하비 카운티에 위치한 작은 광산마을. 마을 입구에 내리면 금광을 채굴하던 곳이 보존되어 있어 둘러볼 수 있다. 물론 금은 없다.

서부 개척시대로의 시간여행

이곳은 1910년대 이 발견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인구가 만 명이나 되는 서부의 꽤 큰 금광마을이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금광 채굴을 위해 사람들은 유입됐다


현재 이곳에서 뛰어노는 당나귀들은 번성기 당시 광산개발업자들이 금광에서 금을 실어 나르는 목적으로 길렀는데, 금광 쇠퇴하며 사람들이 떠나면서 야생 당나귀가 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금세 금광이 고갈됐고, 사람들도 하나둘씩 떠나갔다. 그 결과 현재 오트맨 마을에는 30채가 안 되는 가옥만이 이 마을을 지키고 있.

서부 개척시대의 추억과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현재는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 하나투어도 이곳을 2박 3일 코스에 넣다고 한다.

'올리브 오트맨' 이야기

오트맨 마을을 걸어 올라가다 보면 올리브 오트맨이라는 글씨와 한 여성의 사진이 그려져 있는 간판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이 여성이 이 마을의 이름이 된 '올리브 오트맨'이다.

올리브 오트맨이란 여성의 이야기는 이렇다.

1850년 미국 중부 일리노이주에서 서부로 떠나는 거대한 이주 대열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오트맨 가족을 태우고 서부로 달리는 마차도 있었다.

올리브 오트맨이 탄 마차는 이주 도중 인디언의 공격을 받았고 올리브 오트맨(14)과 메리 오트맨(8)만 살아남고 나머지 오트맨 가족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올리브와 메리는 야브파이 인디언에게 붙잡혀 포로가 됐고 굶주림과 학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 모습을 불쌍히 여긴 이웃 부족 모하비 인디언이 몇 마리 말과 그녀들을 교환하는 거래를 성사시켰고, 올리브와 메리는 모하비 인디언에 입양됐다.

그리고 몇 년 사이에 메리는 가뭄과 굶주림에 지쳐 죽게 된다. 메리는 모하비 인디언의 수양딸로 살아갔다고 한다. 20세가 되어 죽은 줄만 알았던 그녀의 남동생의 귀환 요청에 응하게 되고 그녀는 백인사회로 돌아오게 된다.

그녀는 이후 미국 전역에서 그녀가 원주민 부족에서 겪은 일에 대해 강의를 하게 됐다고 한다. 그녀는 그녀의 이야기를 담은 책도 썼다. 하지만 백인 사회에서의 시간은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고 한다. 그녀는 두통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65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더 자세한 올리브 오트맨의 이야기는 아래 내용 참조
유령이 나오는 호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얽힌 사연

좀 더 위로 올라가다 보면 오트맨 호텔이 나온다. 가이드는 이곳에서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사진을 찍으라고 조언했다.

오트맨 호텔은 1902년 오픈했는데 광산업자의 유령이 나온다는 괴담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이곳이 바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클락 게이블이 당시 최고 여배우였던 캐럴 롬바드와 1939년에 결혼했는데, 이때 신혼여행 와서 묵었던 곳이었다. 


캐럴 롬바드는 1942년 인디애나 주 전쟁 공채 집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 사고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33세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녀가 죽은 후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직무 중 사망한 최초의 여성으로 인정, 자유메달을 수여했다.

- 여기서 잠깐, 전쟁 공채가 뭘까?

공채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재원 조달을 목적으로 하는 부채(빚)를 말한다. 다시 말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하는 빚이다. 공채증서가 발급되고 돈을 마련하게 된다. 일정 기간이 경과하면 공채를 회수하고 돈을 돌려준다.

당시 1942년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미국은 거대한 항공모함부터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을 위한 모든 군사물품에 들어가는 전쟁자금이 필요했다.

캐럴 롬바드가 참여했던 집회는 바로 이 전쟁자금 마련을 위한 '전쟁 공채' 관련한 것이었고, 집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죽었으니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녀에게 메달을 수여하게 된 것이다.
66번 국도를 지나...
(66번 국도가 바로 카 배경지였다니!!!)

우리는 오트맨을 뒤로한 채 66번 국도를 지나 하나투어 미주지사가 있는 LA로 이동했다.


신기한 건 66번 국도를 상징하는 'Route 66' 간판을 나타내는 기념품과 소품은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무엇이 특별한 것일까 궁금해서 알아보니... 미국에서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66번 국도'는 1926년 11월 26일 개통됐는데, 동과 서를 잇는 미국 최초의 대륙 횡단 국도다. 리조나를 관통해 시카고, LA, 라스베이거스 등 주요 도시를 잇는다. 이 때문에 미국인들은 "Mother Road"라 부른다.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시작해 캘리포니아주 LA까지 3.940km 구간으로 이뤄져 있다. 'Route 66'이란 노래가 있을 정도이니 미국인들에게 66번 국도의 특별함은 알듯하.

하지만 66번 국도는 미국의 고속도로(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 정책이 시행되면서 미국 최초의 고속도로인 44번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교통량이 줄어들며 1985년도에  6월 26일에 국도 지정이 해제됐다.


하지만 최초의 미국 동서 대륙 횡단이라는 상징성과 미국인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 잡고 있어서, 2000년대 들어 국도 전 구간은 복구됐다. 정확히 2003년 66번 국도 전구간은 달릴 수 있는 상태가 됐다. 이전에는 고속도로 개통으로 인해 구간구간이 뚝뚝 끊겼으나 보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복구된 이후에는 주로 관광객이나 엣 추억을 떠올리려는 미국인들이 이 도로를 이용하고 있단다. 여기가 바로 애니메이션 '카(Cars)' 속 배경이 된 '라디에이터 스프링스'의 배경이 된 곳이라고 한다.


나의 사랑, '카' 속 스토리 배경이라니!!! 더 애정이 갔다. 갓챠(Got Chaaaaaa!!!!)

세계 최초의 맥도널드가 여기에???

우리는 잠시 식사를 하기 위해 66번 국도 중간에 위치한 식당에 들어갔다. 그리고 가이드님이 설명해주셨다. 저기 보이는 맥도널드가 바로 세계 최초 맥도널드라고!!!


밥을 후딱 먹고 나와 1킬로미터 되는 거리를 열심히 달렸다. 그리고 사진에 담았다. 세계 최초의 맥도널드 매장을. 시간만 더 있었다면 내가 사랑하는 빅맥을 사 먹었을 텐데...


너무 아쉽다...

나의 사랑, 맥도널드...
네게 이런 어두운 과거가 있었구나...
팩트체크!!!
정말 캘리포니아가 최초의 점포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햄버거 가게가 세계 최초 햄버거 가계다.


일단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하다. 나무위키에 나온 맥도널드의 역사를 정리해 소개한다


맥도널드 창업자는 아일랜드계 미국인 맥도널드 형제였다. 그들은 초기에 고속도로 운전자들이 차에 탄 채로 즉석에서 햄버거나 밀크셰이크 등을 사 먹을 수 있는 노점으로 시작했단다. 모든 사업이 그렇듯 초기에는 돈벌이가 쏠쏠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정체할 수밖에 없다. 맥도널드도 그랬다. 이들은 그런 정체기를 고속으로 요리가 나오는 시스템으로 극복했다. 이것이 패스트푸드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의 햄버거 식당에서는 롤러스케이트를 신은 여자 알바생이 차에서 기다리는 손님들에게 주문을 받고 조리된 햄버거를 배달해주는 방식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맥도널드 형제는 이런 형태가 아닌 손님이 직접 햄버거를 주문하고 직원은 전문적인 분업화를 하도록 했다. 조리원 1명은 패티만 굽고 다른 1병은 빵만 굽는 식이다. 철저한 분업화와 직접 주문 등의 시스템 구축을 통해 햄버거의 가격은 낮추고 햄버거를 조리부터 손님에게 전달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절반 이상으로 줄일 수 있었다.


이때 맥도널드 형제는 맥도널드 프랜차이즈 기반을 마련한 크록이라는 체코계 미국인 사업가와 만나게 된다.


1954년, 50대에 믹서기 외판원으로 일하던 크록은 맥도널드 형제 식당에서 밀크셰이크용 믹서기 구매가 대량으로 이뤄지는 것을 확인하고, 그 원인을 파악하러 찾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분업화된 현장을 보며, 마치 포드 사의 자동차 공장에 도입한 컨베이어 벨트 혁신을 떠올리게 됐다. 맥도널드 식당의 혁신적인 경영 방식에 감탄한 크록은 자신이 맥도널드 프랜차이즈 관리자가 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제안하고 수락을 받아내게 된다.


하지만 사업자와 창업자의 경영 철학이 달라서 일까. 공격적으로 점포를 늘리며 프랜차이즈 사업을 적극 추진한 크록과 양보다는 질을 우선시했던 맥도널드 형제 사이에 갈등이 깊어졌다.


미국 전역으로 햄버거 체인 사업을 확대하자는 크록의 제안에 맥도널드 형제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큰 현관이 있는 하얀 집이 보이지? 그게 바로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우리 집이야. 우리는 저녁마다 현관에 낮아 석양을 바라보고, 여기에 있는 우리 가게를 내려다보면서 평화를 느끼면 되는 거야. 우리는 이 가게를 운영하면 그만이지 더 이상 복잡한 구조를 만들 필요는 없어. 더 많은 가게를 내면 그만큼 더 많은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야. 우리는 현재 우리의 삶을 즐기고 있고, 그게 바로 우리가 바라는 삶이야"


크록은 자신이 1955년에 설립한 첫 프랜차이즈를 1호점으로 불렀고, 이 곳을 시작으로 맥도널드 사업이 시작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맥도널드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맥도널드 철학과 역사' 페이지에는 창업주 레이 크록 이야기로 되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크록이 설립한 1호점은 일리노이주  북동부 쪽에 있는 데스 플레인즈에 위치해 현재는 폐점됐다. 폐점 이후 한 때는 박물관으로 공개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크록은 프랜차이즈 사업을 돕는 부동산 회사를 별도 설립해 맥도널드 프랜차이즈 점들의 토지를 사들였다고 한다. 이 부동산 회사가 지금의 맥도널드가 됐다고. 크록의 맥도널드는 전국 체인점을 보유한 기업이 됐지만 맥도널드 형제는 고작 점포 하나 가진..... 결국 1961년에 270만 달러와 연 이익의 1.9%를 지급받는 조건으로 자신들이 가졌던 맥도널드 프랜차이즈 사업의 권리를 크록에게 팔게 됐다고....... 하지만 이익의 1.9% 지급 조건 마저... 구두 계약이어서.... 사실상 맥도널드 형제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맥도널드 형제는 자신들이 만든 점포에서 맥도널드 이름을 쓸 수 없게 되자 'The Big M'이란 이름으로 바꿨지만 망했다고...


이런 맥도널드 형제와 크록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바로 2017년 4월에 국내 개봉한 '파운더'라고.

정말 아는 게 힘이다....... 맥도널드..... 어두운 역사.... 맥도널드 홈페이지에는 나오지 않은.....

오늘도 이제 다 지나갔구나...

하나투어 미주지사에 도착해 짐을 내리고 우버를 탔다. 그리고  LA 도심가에 위치한 밀레니엄 빌트모어 호텔로 이동했다.


마지막 LA에서 우리가 묵을 곳이다. 웅장하고 굉장히 화려했다. 그래서일까. 호텔 직원들은 친절하지 않았다. 문을 발로 열어주는가 하면, 그 안에 있는 이들은 전혀 웃지 않았다. 물론 웃어줄 이유는 없겠지만 내가 고개를 죽여 인사를 건네도 그들은 전혀 응답하지 않았다.


그들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사실 이런 게 인종차별인가... 뭐 그런 불쾌함이 들기도 했다. 캐리어를 맡길 때에도 그들은 우리에게 말을 하지 않고 손짓을 했다. 기다리라는 식으로...

물론 정말 친절한 분들도 있었다. 조식 식당에서 뵌 분들은 모두가 친절하셨다.

호텔 곳곳에는 호텔이 미국의 산 증인이었음을 기록한 액자들로 장식돼 있었다.


내가 글을 여행기를 기록하던 그 책상 위에도... 영화 비긴즈에 나온 배경이었음을 알리는 사진과 설명이 담긴 액자가 걸려있었다.

호텔은 경이로울 정도로 근사했으며 도심 번화가에 위치해 접근성도 최고였다. 직원들의 태도만 빼면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하지만 부정적인 기운은 금방 내 안에서 몰아냈다. 굳이 나쁜 생각을 계속해봤자 나만 손해라는 걸 알아서다. 물론 이 글에는 신랄하게 써야 한다. 원래 그런 곳이니 마음 쓰지 말라고 내 글을 보고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객실 내에 비치된 커피도 좋았다. 미국 커피는 정말 내 스타일이다!!! ㅠㅠ

저녁 먹으러
그랜드 센트럴 마켓으로

우리가 묵은 숙소에서 그랜드 센트럴 마켓(Grand Central Market)은 아주 가까웠다. 물론 가는 길에서 몇 명의 노숙인을 만났지만... 조금 무섭긴 했지만... 최대한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이곳 역시 라라랜드 촬영지였고, 짠내투어 촬영지였다고 한다. 여기에도 에그 슬럿이 있었다. 푸드코트 같은 느낌이라 생각하면 될 듯하다.

아내님은 블로그 추천이라며 아래 왼쪽 가게에서 파는 '고기 수프'를 권했다. 하지만 난 아래 우측 가게에서 햄버거를 골랐다.

드디어 수프와 햄버거가 나왔다

왼쪽 고기 수프는....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이건 음..... 뭐랄까.............. 뭔가 색다른 걸... 현지의 잊을 수 없는 기억을 갖고 싶다면.... 먹어보길 바란다....... 이건 마치....... 하얀 똠양꿍....의 맛과 향과 느낌이랄까..... 왼쪽에 부침개 같은 건.................. 텁텁.... 하다.........

저의 선택은요!!!

햄버거입니다!!!

배를 채운 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느낀 건.... 여기 맛나 보이는 덮밥도 많았고.. 일본 라멘 등 다양한 메뉴가 있었다. 충분히 돌아다니고 선택하시길... 뭐.... 맑은 똠양꿍이 궁금하시다면..... 굳이 드시길.... ㅎㅎㅎ

우리의
오늘의 마지막 코스
'더 라스트 북스토어'

오늘의 마지막 코스로 가기 위해 대로변을 걸었다. 전화기가 박살나 있다....... 아흑....

비교적 도로에는 사람들이 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낯설다 보니 조금 무섭긴 했다.

그렇게 걷다가 도착한 곳. 바로 '더 라스트 북스토어(The Last Bookstore)' 서점.

2005년 LA 시내 작은 다락방에서 시작해 2011년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 책방의 이름인 '더 라스트 북스토어'는 유성의 충돌로 멸종해 버린 공룡과 같이 아마존과 E북 시장에서 나날이 없어져가는 오프라인 서점의 모습을 담아 지었다고 한다.  굉장히 인문학 적인 이름이어서 더 마음에 들었다. 역시 이름이 예사롭지 않았다!!!

책 방은 그 자체로 예술 작품 같았다. 책들의 배치도 그렇고 그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멋졌다. 인상적이었다.

감상하시길...

서점에서는 매일 같이 저자와의 만남이나 토론회 등 다양한 이벤트를 연다고 했다. 이날도 저자와의 만남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치 해리포터 영화 속 공간을 연상케 하는 서점을 경험하고 싶다면 꼭 가보길 권한다.

아~~~ 목말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무거운 몸을 이끌고 터벅터벅 걷다 갈증이 났다. 내에 있는 슈퍼에 들어갔다. 그리고...... 내 발걸음은 나를 와인 파는 판매대로 이끌었다.....


리고 발견한 놀라운 가격들............. 한국에서 판매하는 가격의 절반 이하.... 메이오미 샤도네이 2016은.... 나라셀라 공시된 판매가가 8만 5천 원인데........... 여기선 할인해서 15.99달러였다.....


아내님께 화이트 와인이 너무도 먹고 싶어서...... "메이오미 하나만 사면 안 될까요?"라고 졸랐지만....... 허락을 받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난 삐친 표정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맥주도 안 먹었다!!!!!


'난 와인이 필요하다구!!!!! ㅠ_ㅠ 샤도네이가 먹고 싶었다고 ㅠ_ㅠ'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조용히 책상 위에 앉아 글을 쓰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메이오미 샤도네이 2016에 대한 정보는 아래 참조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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