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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화문덕 Dec 23. 2024

가습기를 장착한 아들

방 안에 피어오르는 하얀 안개가 아들의 웃음소리와 어우러졌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겨울의 문턱에서 아침 공기가 어슴푸레 서늘해졌다. 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냉기가 발끝을 스치며 은근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두툼한 이불 속에 몸을 파묻으면 따스함이 천천히 스며들어 온몸을 감싸는데, 마치 잠든 숲 속에 첫 햇살이 들이치는 듯한 아늑함이다.


"킁킁"


이 고요한 온기 속에서도 생채기의 흔적이 느껴진다. 메마른 공기가 가라앉으면서 아이의 숨결에 거친 결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어느새 쇳소리를 머금고, 그 끝에는 겨울의 첫 감기라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자리 잡았다. 결국 목감기가 찾아온 모양이다.


급하게 레트로 디자인의 휴대용 가습기를 샀다. 생각보다 귀여운 물건이다. 연한 초록빛에 회색이 살짝 섞인 차분한 세이지 그린색 바디의 부드럽고 매트한 질감이 돋보인다. 마치 작은 콧구멍처럼 난 두 개의 구멍에서 뽀얀 수증기가 나오는 모습이 앙증맞았다. 아들은 새 장난감을 손에 넣은 것처럼 그것을 꼭 쥐고 온 집안을 휘젓고 다녔다. 거실, 주방, 방마다 수증기가 구름처럼 피어오르며 퍼졌다.


“아빠! 여기 공기 촉촉해졌어!”


아들이 씩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 든 가습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안개가 부드럽게 내 얼굴을 스쳤다.


“아유, 너 이러다 온 집안이 다 젖겠다.”


나는 핀잔을 주면서도 그의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작은 손에 꼭 쥔 가습기와 그 뿌듯한 표정이 어찌나 귀여운지.


그러나 아들의 ‘가습기 모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 방으로 들어와 책상 옆에 가습기를 두고 앉으려는 아들을 보며 나는 조금 난감했다.


여긴 안 돼. 옷도 많고, 전자제품도 많잖아. 가습기 때문에 습기 차면 곰팡이 생길 수도 있어.”


아들은 눈을 반짝이며 애원했다.


“아빠, 그냥 한 번만! 공부할 때 목이 따갑단 말이야.”


“그래도 안 돼. 여긴 가습기 놓는 데가 아니야.”


하지만 아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가습기를 안고 방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작은 얼굴에 비친 진지함에 더 이상 반박할 힘이 없었다.


내 방은 늘 환기를 철저히 하려고 애쓴다. 겨울이라 창문을 여는 것도 쉽지 않아, 실내 공기를 관리하는 건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하지만 아들이 가습기를 들고 들어올 때마다 이상하게도 그 모든 걱정은 한순간 사라지는 것 같다. 사랑스러운 아이의 목소리가 방 안을 채우고, 그의 웃음이 이 겨울을 더 따뜻하게 만들고 있다.


문득 창밖을 보니 창문에 작은 물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아들이 들고 다니는 가습기에서 나온 수증기가 벽에 닿아 차갑게 식어 흘러내린 것이리라. 나는 괜히 웃음이 나왔다.


‘옷이 젖으면 어때, 겨울이 축축해지면 어때. 아들의 마음이 이렇게 촉촉한데.’


나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찬 바람이 살짝 들어오며 방 안 공기를 흔들었다. 어쩌면, 우리의 겨울은 이 작은 가습기 덕분에 더 촉촉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빠, 나 여기 앉아도 되지?”


아들이 가습기를 품에 안고 물었다.


“그래, 근데 방금 환기했으니까 옷에 물방울 생기지 않게 조심해.”


“알겠어! 조심할게!”


아들의 목소리는 기분 좋게 들떠 있었다. 내가 그의 말에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는 순간, 방 안에 피어오르는 하얀 안개가 아들의 웃음소리와 어우러졌다. 내 방도, 내 마음도 온통 촉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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