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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는 아이들을 어디로 데려가는가

익숙한 영화를 다시 꺼냈다. 〈레디 플레이어 원〉과 〈조작된도시〉

by 광화문덕

서재에 앉아 익숙한 영화를 다시 꺼냈다.
〈레디 플레이어 원〉과 〈조작된 도시〉.

두 작품 모두 수차례 반복해 본 영화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단순한 오락이 아닌, 메타버스라는 공간이 인간에게 어떤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는지를 탐색하게 만든다.


“아이들은 지금, 현실보다 먼저 온라인에서 자라나고 있다.”

“디지털 세계는 자아 형성과 진로 탐색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것은 더 이상 상상 속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의 아이들은 이미 그 세계를 살아가고 있고, 교육은 그 여정을 따라가야 할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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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을 실험할 수 있는 유일한 교실, 메타버스


이제는 메타버스 플랫폼, 가상 교실, 게임형 진로 체험이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수업이 끝난 뒤 로블록스에서 모험을 시작하고, 주말에는 마인크래프트 안에서 친구들과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디지털 공간은 일상이 되었고, 그 안에서의 경험은 더 이상 가상이 아니다. 우리는 이 공간을 단순한 기술 환경으로 바라보는 데 그쳐선 안 된다. 이제는 메타버스를 '정체성 실험실'로 다시 정의해야 할 시점이다.


현실 세계에서 제약받았던 자아, 억눌렸던 가능성, 아직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꿈들이 이 공간 안에서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주인공 와데는 폐허가 된 현실을 뒤로하고, 가상 세계 오아시스(OASIS)에서 진정한 리더로 거듭난다. 그는 가상 세계 안에서만큼은 타인의 시선이나 환경의 제약 없이, 자신의 실력과 용기로 중심 인물로 성장해간다.

반면 〈조작된 도시〉의 권유는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채 현실에서 고립되지만, 온라인 게임 속에서 만난 팀원들과의 신뢰와 협력을 통해 부당한 시스템을 정면으로 돌파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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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인물의 여정은 공통된 메시지를 전한다.


현실에서 무력했던 존재가, 가상공간에선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변모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변화는 단순한 오락적 서사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야기의 뿌리에는 언제든 다시 시도할 수 있고, 새롭게 설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재시작’이라는 교육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것이 바로, 메타버스가 오늘날 교육에서 주목받아야 할 이유다.


디지털 세상에서 아이들은 이름을 다시 만든다


주목할 점은, 가상세계에서는 현실에서 흔히 통용되던 평가 기준들이 무력화된다는 사실이다. 성별, 외모, 가정 배경, 학교 이름 등, 이 모든 것들은 아바타 뒤에 숨겨진다. 그 대신 남는 건 단 하나,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함께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여기서는 실력, 전략, 협업 능력만이 유일한 ‘자격 요건’이다.


아이들은 이미 이런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마인크래프트에서 상상력으로 도시를 짓고,
로블록스에서 자신만의 게임을 설계하고, 제페토에서 원하는 정체성을 입고, 포트나이트에서 팀워크로 경쟁을 풀어가며, 디스코드에서는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가상의 공동체를 만들어간다.


이 모든 플랫폼은 더 이상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아이들이 또 다른 자아를 실험하고, 낯선 역할을 시도해보며, 실패도 해보고 때로는 리더십을 발휘해보는 ‘디지털 진로 실험장’이다. 여기서 아이들은 점수나 등수가 아닌, 관계와 맥락 속에서 성장한다. 그리고 그 성장의 경험은 현실 세계로 이어진다. 단지 탈출구가 아니라, 새로운 방향을 탐색하는 창구로서의 디지털 공간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성장은 ‘성적표’가 아니라 ‘맥락 속 경험’의 총합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과 〈조작된 도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현실에서의 스펙이나 배경은 중요하지 않다.”

영화 속 인물들은 현실에서는 무직이고, 무력하며, 주목받지 못한 존재다. 하지만 가상세계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들은 그곳에서 팀을 이끌고, 문제를 해결하며, 신뢰를 쌓아간다. 능력은 단독 플레이가 아닌 관계 속 협력에서 증명된다.


이제 교육도 이 지점을 외면할 수 없다. 학생이 어떤 과목을 몇 점으로 이수했는가보다, 어떤 문제를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풀어냈는가가 점점 더 중요한 질문이 되고 있다. 단답형 시험이 아니라, 협업 기반 프로젝트와 창의적 문제 해결 경험이 학생의 진짜 ‘실력’을 말해주는 시대다.


아이들은 게임 속 퀘스트를 수행하며 자연스럽게 협동의 구조와 피드백의 문법을 배운다. 가상의 프로젝트에서 마감 시간과 역할 분담을 경험하며, 현실에서도 통할 수 있는 책임감과 실행력을 익혀간다.


이러한 경험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미래 진로 설계와 사회적 역량 형성에 있어 가장 강력한 토대가 된다. 성적표는 현재를 말하지만, 경험은 미래를 설계한다. 그리고 지금의 아이들은 그 미래를 이미 ‘디지털 맥락’ 속에서 키워가고 있다.


교실은 하나의 ‘플랫폼’일 뿐이다


오늘날의 교실은 더 이상 칠판 앞에 서 있는 교사와 노트북 앞에 앉은 학생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교육은 이제 물리적 공간을 넘어, 가상현실과 인공지능, 인터랙티브 플랫폼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기술은 단지 보조 수단이 아닌, 학습의 무대 자체를 바꾸는 ‘환경’이자 ‘경험’이 되고 있다.


실제 현장에서는 이미 다양한 실험들이 진행 중이다.


메타버스를 활용한 진로 체험: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직업을 가상에서 직접 경험해보며, 아이들은 자기 적성을 탐색하고 진로의 방향성을 스스로 찾아가기 시작한다.


온라인 협업 문제 해결 시뮬레이션: 학교 밖 세계의 복잡한 과제를 팀 단위로 풀어내며, 협업과 소통, 창의력 같은 생존 역량을 익히는 장이 되고 있다.


AI 기반 맞춤형 튜터링 시스템: 학생마다 다른 학습 속도와 이해도를 인공지능이 파악하고, 그에 맞는 피드백과 추가 학습 경로를 제시함으로써 진짜 개인화 교육을 구현한다.


이 모든 시도는 언뜻 보면 게임처럼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몰입, 자발성, 문제 해결력이라는 21세기 핵심 역량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술의 유무가 아니다. 그 기술을 어떤 교육 철학으로 설계하고, 어떤 맥락 안에 배치하느냐가 관건이다. 기술은 도구일 뿐, 그 도구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교육자의 상상력과 기획력이다.


폭력적 콘텐츠의 시대, 교육의 방향은 더 분명해져야 한다


하지만 메타버스나 가상공간이 무조건 밝고 긍정적인 성장의 장인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마주하는 디지털 세계는, 때때로 위험하고도 어두운 방향으로 향한다. OTT, 유튜브, SNS 플랫폼은 자극적인 알고리즘과 상업적 설계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아이들은 과도한 폭력, 복수, 선정성, 모방 범죄를 무차별적으로 접하고 있다.


1998년 미국 전국 텔레비전 폭력 연구(National Television Violence Study)는 미국 아이들이 중학교 입학 전까지 평균 8,000건의 살인 장면, 10만 건이 넘는 폭력 장면에 노출된다는 충격적인 데이터를 발표했다. 이 수치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아이들의 감정 조절력과 윤리적 판단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경고였다.


그로부터 25년이 흐른 2024년 1월, 미국 상원 법사위원회는 청문회를 열었다. 주제는 ‘빅테크와 온라인 아동 성착취 위기’. SNS 피해 아동의 부모들은 자녀의 사진을 들고 청문회장에 직접 나섰고, 한 어머니는 울먹이며 외쳤다.

“당신들의 플랫폼이 우리 아이를 죽였어!”


그날, 메타(페이스북·인스타그램), 틱톡, X(구 트위터), 디스코드 등 주요 빅테크 CEO들이 증인석에 앉았다. 그리고 미국 상원의 린지 그레이엄 의원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은 피 묻은 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제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모든 장면은 단순히 미국의 일이 아니다. 전 세계의 교육자와 부모, 사회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이제 교육은 유해 콘텐츠를 단순히 차단하거나 제한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아이들과 함께 그 콘텐츠를 해석하고, 안에 숨은 가치와 위험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주는 일, 바로 그것이 오늘날 교육의 진짜 과제가 되어야 한다.


가상의 문을 열되, 현실의 나침반을 쥐여줘야 한다


가상공간은 아이들에게 익명성과 자유를 제공한다. 현실의 조건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름을 만들고, 다른 삶을 시도해볼 수 있는 곳. 무엇보다도 이 공간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기회, 바로 그 ‘리셋의 가능성’이다.


하지만 이 자유는 무한정 열려 있는 것이 아니다. 비판적 사고, 윤리적 감수성, 현실과의 연결성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가상공간은 방향 잃은 탈출구가 될 수도 있다. 자유는 설계되지 않으면 방종이 되고, 가능성은 안내되지 않으면 방황이 된다.


그래서, 교육은 단지 문을 열어주는 것에 그쳐선 안 된다. 가상이라는 낯선 세계를 향해 문을 열어주되, 그 문 너머에서 어디로 걸어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현실의 나침반’을 함께 쥐여줘야 한다.


“현실은 실패일 수 있어도, 온라인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교육은 그 ‘다시’의 방향을 설계하는 일이다.”


이제 교육은 단순히 기술을 도입하거나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새로운 기회를 스스로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디지털 시대에 교육이 존재해야 할 진짜 이유다.


교사에게, 학부모에게, 정책 입안자에게 전하는 제안


교사에게: 메타버스를 단순한 ‘신기술’로 소비하지 말고, 교육의 본질과 연결된 커리큘럼으로 엮어야 한다. 진로 체험, 협업 프로젝트, 게임 기획 수업 등은 아이들에게 단순한 재미를 넘어 몰입, 자발성, 자기효능감을 심어주는 강력한 경험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도구’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교육의 문맥에 맞게 설계하느냐다.


학부모에게: 자녀의 온라인 활동을 ‘감시’의 시선이 아니라, 이해의 언어로 바라봐야 한다. 아이가 어떤 가상 정체성을 탐색하고 있는지, 어떤 세계에서 누구와 연결되고 있는지를 대화와 관심의 태도로 함께 읽어가야 한다. 그 공간에서 형성되는 자아 역시, 오늘날 아이들의 일부다.


정책 입안자에게: 단기적인 기술 도입이나 보여주기식 시범 사업을 넘어서야 한다. AI와 메타버스 기반의 학습 플랫폼을 어떻게 공교육 시스템과 구조적으로 접목할 것인가에 대한 중장기적인 전략과 실험, 그리고 제도적 기반이 필요하다. 지금 필요한 건, 기술을 ‘도입하는 정책’이 아니라, 교육을 다시 설계하는 철학이다.

기술은 결국 도구일 뿐이다. 그 도구에 사람의 철학을 담는 일, 그것이 교육의 몫이며, 교사의 소명이고,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디지털 세상은 아이들에게: 현실의 확장이 될 수도, 탈출구가 될 수도 있다. 교육은 그 갈림길에서 방향을 설계하는 나침반이어야 한다.


메타버스는 도피가 아니라, 아이들이 자기 삶을 새롭게 설계해보는 성장의 무대가 되어야 한다. 그 무대를 어떻게 연출할 것인가는, 지금 이 글을 읽는 우리 모두의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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