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와인을 아는 것이 아니라, 와인을 핑계로 글을 써왔음을 고백한다
크리스마스이브다. 20대와 30대의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늘 설렘이 있었다. 괜히 마음이 들뜨고, 오늘은 무언가 기분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이유 없는 기대와 작은 긴장 같은 것들.
하지만 이제 40대 후반이 되어 맞이한 크리스마스이브의 새벽은 유난히 조용하다.
어제 내린 비가 도시의 먼지를 말없이 씻어내고 간 듯했고, 아직 어둠이 완전히 물러가지 않은 새벽은 숨소리마저 낮춘 채 고요했다. 창밖 가로수 잎에는 물기가 아직 매달려 있고, 가로등 불빛은 새벽과 끝내 작별하지 못한 채 희미하게 서 있다.
세상은 막 깨어나려는 것도, 완전히 잠들어 있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중간 지점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랄까.
거실에 있는 네스프레소 머신으로 뜨거운 롱고 한 잔을 내리고 창가에 섰다. 베란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어제보다 조금 차분해 보였다.
지난 주말, 아들과 함께 넷플릭스에 공개된 흑백요리사2를 봤다. 셰프들이 식재료를 다루는 장면은 묘하게 마음을 붙잡았다. 칼끝 하나에도 이유가 있었고, 불의 세기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들의 말은 가볍지 않았고, 설명은 길지 않았지만 깊었다. 필요 없는 문장은 없었고, 모든 동작에는 축적된 시간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내 유튜브 알고리즘은 셰프들로 채워졌다. 쇼츠 속에서 그들은 요리를 말했고, 가끔은 와인을 이야기했다. 그 방식도 같았다.
“이건 이래서 좋습니다”라는 단정 대신, “이 재료는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이 와인과 만났을 때 이런 표정을 짓습니다”라는 설명이 먼저 나왔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나는 정말 와인을 이야기해왔던 걸까.’
지난날의 와인 앞에서, 혹은 사람들 앞에서 카카오 브런치 특별상을 '와인 이야기'로 받았다며 슬며시 자랑하던 내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솔직히 말하면, 그 장면을 다시 마주한 지금의 나는 슬며시 고개를 숙인다. 지난날의 그 모습들이 어딘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을 스쳐 가는 ‘와인을 안다’고 말했던 시간들 속에서 나 자신을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마치 나의 허세가 아무런 방어도 없이 발가벗겨진 채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동안 와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누군가보다 조금 더 아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잔을 기울이며 그럴듯한 문장을 덧붙였고, 그 문장들이 나를 조금 더 단단해 보이게, 조금 더 괜찮은 사람으로 포장해주길 은근히 바랐다.
“이제는… 와인에 대해서만큼은 더 겸손해져야겠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내가 좋아했던 건 ‘와인’ 그 자체라기보다, 와인을 핑계로 나눌 수 있었던 이야기들이었다는 것을. 향과 맛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해도, 그 잔을 사이에 두고 흘러나왔던 기억과 감정에는 언제나 진지했음을.
“와인을 잘 아세요?”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면, 이제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아뇨. 아직 잘 몰라요. 다만, 와인에 대해 알고 싶어하면서도 술은 잘 마시지 못해 늘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아는 척을 내려놓겠다고 다짐하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한 느낌이랄까. 전문가의 언어를 흉내 내지 않아도 괜찮고, 완벽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나는 계속 쓰면 된다. 와인을 소재로, 삶을 핑계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도를 기록하면 된다.
새벽 공기는 차갑다. 하지만 그 차가움이 오히려, 지금 이 시간이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아침, 20대와 30대와 다른 40대 후반의 아침을 맞이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마흔여섯살의 크리스마스이브의 아침은 이런 느낌이구나. 내년은 또 어떤 온도일까'
어쩌면 나는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걸지도 모른다. 와인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와인을 궁금해하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출근을 위해 집 현관문을 나서며 오래된 나의 벗, 갤럭시 버즈라이브를 귀에 꽂는다. 귓가에는 요즘 내가 자주 듣는 은은한 피아노 음반이 흐르고, 그 사이로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겹친다.
지하철에 몸을 싣고,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휴대폰 메모장을 연다.그리고 오늘도, 조심스럽게 내 마음을 옮겨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