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 기록의 힘과 삶의 무게
9월 가을이 성큼 다가온 저녁,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며 스쳐갔다.
어제 무심코 본 영화가 있다.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마음에 남았다.
기록하는 것,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 역사의 기록을 남기겠다는 리 밀러의 고집스러움은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의 잔혹함과 히틀러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장면들 앞에서 묘한 감사마저 느꼈다.
'누군가 끝내 눈을 돌리지 않았기에, 우리는 지금 그 참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니까.'
영화를 보고 난 뒤, 한 선배님의 눈빛이 떠올랐다.
늘 웃음과 농담으로 분위기를 이끌던 그분이었는데, 그날만큼은 깊은 주름 속으로 피로와 고단함이 스며 있었다. 쉰을 넘겨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 삶의 굴곡이 고스란히 새겨진 눈빛이었다.
“내가 뭐 하러 이렇게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 이제 난 제발 은퇴하고 싶어. 나 좀 은퇴하게 내버려둬.”
선배님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 말이 곧바로 현실이 될 수 없다는 걸.
나 스스로도 늘 선배님을 붙잡고 “이것도 같이 해주시죠, 저것도 함께 하시죠” 하며 조르는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가 그분을 필요로 한다. 어쩌면 선배님은 영화 속 셔먼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주인공처럼 이름을 남기진 않지만, 곁에서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람. 드러나지 않지만 없으면 아무 일도 굴러가지 않는 존재. 묵묵히 옆을 지켜주며 다른 이들을 빛나게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선배님은 오랫동안 그 길을 걸어오셨다.
'아마도 그날의 그 눈빛 속 서글픔은, 아마도 그 무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영화 속 내 눈에 비친 '리 밀러'는 꽤나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보그 사무실에서 캐비닛을 열고, 필름을 가위로 잘라내던 장면은 보는 나의 마음을 거칠게 긁어댔다. 협업이 기본인 공간에서 그렇게 일방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는 누구라도 불편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게 기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든, 예술가라는 자유를 내세우든 말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도 모르게 너무도 심하게 감정이입을 해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만큼 몰입력이 있었던 영화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불편한 고집 덕분에 '리 밀러'라는 이름은 역사의 증언자로 남았다. 누군가는 외면했을 참혹한 장면 앞에서 그녀는 끝내 눈을 돌리지 않았다.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집념, 그 집착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날 전쟁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불편함은 힘이 되었고, 지나친 자기중심성은 오히려 역사를 흔드는 에너지로 바뀌었다. 결국 그 고집이 시대를 기억하게 한 것이다.
나는 영화 속 장면들을 떠올리며 선배님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직접 앞에 서서 주목받지는 않지만, 늘 곁에서 다른 이들을 빛나게 하신 분. 묵묵히 서포트한다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더 많은 희생과 체념, 끝없는 자기 절제가 필요하다. 다른 이가 중심에 설 수 있도록 한 발 물러서서 그 자리를 지켜내는 일. 선배님의 그날 눈빛 속 깊은 주름은 바로 그 무게의 흔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빛나는 장면 뒤에 가려진 고단한 현실'
주인공의 이름은 기록되지만, 곁에서 받쳐준 이들의 이름은 흔적 없이 지워진다. 그러나 그 이름 없는 손길이 없었다면, 어떤 기록도, 어떤 성취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를 한 번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아들이 떠올랐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인물의 이야기인만큼 아들과 함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하지만 영화 '리 밀러'는 아들과 같이 볼 수 없는 19금 영화라 아쉬움이 남았다. 불필요하게 반복되는 나체 장면, 줄곧 이어진 술과 담배 장면은 40대 후반인 나도 불편할 정도여서다.
“삶은 늘 고단함의 연속이고,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며 살다보면 결국 우리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요즘 난 내 어린 시절 TV 브라운관에서 봤던 이들의 모습을 방송과 기사를 통해 접하게 될 때마다 인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곤 한다. 누구나 언젠가는 자연으로 돌아가니 말이다. 알몸으로 태어나 알몸으로 돌아간다는 사실. 어린 시절, 불과 30대 후반까지도 와닿지 않았는데 이제 50대를 앞두고는 깊이깊이 와닿는 문구다.
명심해야 한다. 사람보다 오래 남는 것은 누군가의 기록, 기억, 그리고 눈빛이다. '리 밀러'는 사진과 기록을 남겼고, '셔먼'은 그 기록이 가능하도록 버텨주었다. 둘 다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의 이야기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게 아니라, 그 두 모습이 함께 있을 때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기록은 순간을 남기고, 묵묵함은 시간을 지탱한다.”
오늘 퇴근 길 선배님의 고단한 눈빛이 여전히 내 마음 속 한켠에 남아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내 마음 속에 깊이 자리한 '리 밀러'의 사진처럼...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삶을 버티게 해 준 눈빛을 기억하며...
2025년 9월 16일 광화문덕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