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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an 29. 2024

우리아이의 이 공부, 과연 진짜 공부일까?

참된 지식이란 존재할까? 우리 아이는 그것을 믿고 있을까?

 

 여러분을 잠시 저희 집의 침실로 초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삼칠일이라고 하는, 딸아이가 태어나서 21일째 되는 날 새벽을 맞아 삼신상을 차리기로 했습니다. 백일을 맞아 하기도 한다는데, 저희는 이날 했습니다. 


 처음으로 맞는 아이의 삼신상이니 아이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정성을 들여 준비를 해야겠지요. 그런데 누구의 손을 빌릴 순 없고, 모든 것을 알아서 해야 했습니다. 어떻게 상을 차리지? 뭘 준비해야 하지? 인터넷을 검색해봤는데 그것을 따로 자세히 소개하는 사이트는 없고 대부분 블로그 후기 길을 통해서만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새벽에 준비해, 통 트기 전에 끝내야 하고요, 새로 지은 밥과 미역국, 정화수와 나물은 그날 안에 다 먹어야 하고요, 귀신을 쫓는다는 소금과 마늘을 써서도 안 되며 아이의 수명을 잘라내게 될 수 있으니 칼과 가위도 써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이게 다 진짜일까? 이렇게 해도 되나? 의심을 해보았죠. 블로그 글이니 신뢰도가 다소 낮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장모님과 어머니를 귀찮게 할 수도 없고 해서 우리는 블로그 글대로 대강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 나름의 방법으로 이 삼신상 제례에 진실성을 더해보기로 했습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찾은 내용 외에 나름의 지식으로 추가한 것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선 제문을 따로 손으로 썼습니다. 삼신상도 나름의 제례이니 기원문이 담긴 제문이 쓰여야겠지요. 방법은 세가지가 있었습니다. 핸드폰에 제문을 띄워놓고 그대로 따라 읊기, 프린트하기, 손으로 쓰기. 집에 있던 붓펜과 학습노트 한 장을 뜯어 인터넷에 있는 제문을 대강 고쳐서 썼지요. 핸드폰 화면을 그대로 보고 읽는 것이나 프린트보다는 정성이 담긴 행동이니, 제례에 맞겠다 싶었습니다. 


 다음으로 제례의 형식에 맞춰서 먼저 신령들을 모시고, 밥을 올리고, 인사를 드리는 등의 간소한 절차를 아내와 함께 아이를 눕힌 상태에서 치렀습니다. 찾아본 블로그들 중에선 절을 몇 번이나 하는 식으로 제례의 형식을 갖춘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요. 


 그리고 삼신상 제례를 마친 뒤에는, 상 위에 올려두었던 제문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 아파트 뒷마당에 숨어서 불을 붙여,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히 손으로 튕겨가며 태워서 날려보냈습니다. 성냥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라이터라도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을 해보죠. 저는 삼신상에 진실성을 더하기 위해 이런 저런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한 행동들 중에 과연 “참”이란 것은 있었을까요?


참된 지식참된 공부


 삼신상처럼 전통문화에 가까운 간단한 제례가 참이냐 거짓이냐를 따지는 것이 조금 웃긴 일일수도 있겠습니다만 아이를 기른다는 것이 마음이 그렇죠. 혹시 아이가 아프면 우리가 정성이 부족해서일까, 돌잡이 때 명주실을 좋은 걸 올려주지 않아서 애가 잔병치레가 있는가. 뭐든 아이를 위해선 최선을 다하고 싶게 되나봅니다. 저도 삼칠일의 삼신상을 하면서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이왕이면 정성이 닿아서 아이의 무병장수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길 바라면서 제문을 손으로 쓰고 절차를 나눠서 절을 여러번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참으로 믿었냐 하면 그렇진 않습니다. 전문적인 전통문화 안내서에 적힌 내용이었다면 더 믿을만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미리 찾지 못하고 블로그에 적힌 내용들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죠. 게다가 원래는 칼과 가위를 써서도 안되는데 도라지나 고사리, 시금치를 산에서 직접 캐오면 모를까 이미 마트에 파는 것은 여러번의 칼질로 손질된 것들뿐이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게 아이의 수명인데 이미 칼질된 것밖에 살 수가 없으니 이미 틀려버렸네요. 이처럼 저는 삼신상이라는 것이 사실 허구임을 알면서도, 오로지 아이를 위해서 정성을 담기 위해 노력했을 뿐입니다. 


 이 과정을 한번 교육에 대입해보겠습니다. 저는 어떤 필요에 의해서 삼신상이라는 과목을 공부한 학생입니다. 그러나 삼신상 과목에 담긴 지식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애써서 공부를 하고 시험도 칠 건데, 제가 배운 과목이 거짓말들이라면요? 어쩔 수 없죠. 공부한 내용들이 진실에 가까워지도록 이런 저런 지식을 동원해서 보강해보았습니다. 


 그럼 이제, 질문을 한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는 자녀교육의 방법이라는 것은 참일까요 거짓일까요? 이 교육법은 우리 아이에게 맞는 것일까요? 


 우리 모두는, 사실 자녀교육의 방법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정답은 우리 아이가 쥐고 있을 뿐이고, 그 결과는 아이의 인생이 완성되는 순간 알게 되겠죠. 그러나 이 교육법들이 참인지 거짓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지식들을 동원해, 아이에게 참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겠죠. 


 그런데 아이는 어떨까요? 부모님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작은 손에 연필을 쥐고 문제를 풀고, 책을 암기하는 아이들은 그 지식이 참이라고 생각할까요? 지식이 참이든 거짓이든 상관없다. 공부만 열심히 한다면. 이라는 입장을 갖고 계시다면 다음 질문에 대해선 한번 더 곰곰이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 지식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모르고 하는 공부는 과연 참된 것이 될 수 있을까요? 아이는, 자신의 지식을 참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함께 수행하며, 자신의 공부를 참된 것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을까요? 


 아이와 함께 무언가를 배워가는 과정을 생각해보시죠. 아주 어릴 때 아이는 “이게 뭐야?” “이건 왜 이래?”라는 질문을 수십 수백 번 던집니다. 그럼 아이가 이해가 될 때까지 같은 설명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해주곤 하죠. 그러한 질문들은 아이의 흥미로 인해 발생한 참된 지식들을 구성합니다.. 불은 왜 뜨거운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그 화학적 원리를 아이에게 설명하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번 타버린 것은 다시 쓸 수 없고, 불을 만지면 아프고, 그래서 불을 만지면 안되고, 그런 신호로 뜨거운 열기를 내보내는 것이다 하는 대강의 설명은 아이에게 참된 것으로 다가옵니다. 충분히 설명이 되어 확신이 들면 아이는 그 사실을 잊지 못하죠.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 아이가 질문을 할 새가 없이 많은 양의 학습과제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답을 부모님들이 풀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집 뒷장에 적혀있고, 틀리면 확 빨간색 줄이 그어지네요. 아이는 자기의 생활환경이나 삶과는 관계가 없는 많은 양의 지식을, 그것이 참된 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상태로 머릿속에 집어넣기 시작합니다. 


 그럼 이것을 우리가 공부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제가 거짓인 줄을 알면서도 삼신상을 차렸던 것처럼, 책을 읽고 문제를 풀긴 푸니, 공부가 되고 있다고 잠시 믿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공부를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들은 오래 기억될 수도 없고, 아이의 인생에 크게 기여하지도 못합니다. 다만 시험을 위해 얼마간 사용되다가 잊히는 것이죠. 


 이런 공부가 일으키는 또 다른 문제는 그것이 환경을 조정하고 적응하도록 하는 아이의 생활습관을 약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주변 사물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고, 만지고 주무를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며, 아이는 자신을 적응하고, 대상을 조정하죠. 그런데 책 속의 지식들은 대부분 실제 존재하는지 아이 입장에서 알 수 없는 거리가 먼 사물들입니다. 그것을 조정할 수도, 그에 적응할 수도 없으니 아이의 역동적인 습관형성은 약화됩니다. 이런 공부에도 “적응”을 할 순 있겠습니다만 그것이 아이의 주도성과 자발성을 기르는 것인지 그 반대의 것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테지요. 


 공부의 본래의 목적은 우리 공동체들이 그동안 쌓아올린 지식들 중에서 미래 세대에게 전수할 최상의 요소들을 골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만큼 참되고 진실된 지식만을 전달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공부 과정 역시 참된 것이어야 합니다. 물론 교과서에 담긴 내용들을 말할 것도 없이 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책에 담길 수도 없겠죠. 그러나 아이가 그것을 참된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다는 점이 문제죠. 


 어떻게 해야 할까, 앞으로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만, 우선 밑바탕이 되는 철학부터 다져볼까요. “학습자 중심 교육”이라는 이념을 철저히 수행하는 교육기관들을 한번 주의 깊게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유명한 북유럽 복지국가들의 교육은 학습자를 중심에 두고 충분한 시간과 자원을 아이에게 부여하지요.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은 학교에서 자기 주변의 흥미를 자극하는 사물들로부터 탐구활동을 수행하고, 그러한 관심을 점차 학과 공부로 연계해 나갑니다. 


 앞서 설명한 “체인지 메이커” 역시 학습자 중심의 교육을 중심 철학으로 하고 있습니다. 학습자 개개인이 미래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인재로 만드는 것이 프로그램의 모토이니만큼, 어떤 분야에서 변화를 만들어나갈지,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실천할지 등을 학생에게 직접 묻고 있거든요. 


 중학교에서 수행되는 자유학기제, 고등학교의 학점제 등의 정책변화 역시 결국엔 학습자를 중심에 두고 교육을 해보자는 시도들입니다. 그것을 참되게 수행하고 있는 학교가 있고, 참되지 않게 그저 흉내만 내는 학교들도 있죠. 우리의 몫은, 이것을 잘 가려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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