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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Feb 19. 2024

올바른 마음과 배움의 주도성

가치 그리고 실천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가 누군지 아시나요? 힌트는 10대. 여성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딱 그레타 툰베리가 떠오르시죠. 그러나 아직 툰베리는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툰베리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 이상의 업적을 일군 10대 소녀가 있다고? 신기하시죠. 


 그 소녀의 이름은 말랄라 유사프자이. 만 17살, 우리나라 나이로 18살,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 나이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파키스탄의 소녀입니다. 말랄라는 만 15살, 중학교 3학년 나이에 탈레반 병사들에게 총을 맞았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학교에 다니고자 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말입니다.


왜 말랄라는 총을 맞았을까?


 말랄라가 살던 곳은 파키스탄 북부의 스와트밸리라는 마을이었습니다. 아이가 병에 걸리면 부족장 역할을 하는 노인이 와서 주문과 함께 침을 뱉어주는, 현대 문명보다는 지역의 전통문화의 영향이 강한 곳이었지요. 


 진보적인 교육자로 남녀공학 학교를 설립해 운영하던 말랄라의 아버지는 남녀차별이 심한 이슬람권에서도 보기 드물게 딸을 차별 없이 키우려는 의지가 무척 강했습니다. 말랄라에 따르면 파키스탄은 ‘아들을 낳으면 축포를 쏘고 딸을 낳으면 커튼 뒤에 숨기는 나라’였는데 그 때문에 말라라의 아버지 자신도 여학생들이 교육받을 권리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죠.  이런 아버지 밑에서 말랄라는 개성 넘치고 자기 주관이 확고한 아이로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말랄라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무렵 극단주의 이슬람 세력인 탈레반이 파키스탄 북부를 점령하기 시작했습니다. 말랄라가 살던 스와트밸리도 손쉽게 탈레반의 지배에 놓였죠. 그들은 여학교를 모두 폐쇄하라고 아버지에게 협박을 가했고, 아버지는 그들의 협박과 학교 시설에 대한 테러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학교를 지켰습니다. 


 탈레반들에게 있어서 어디까지나 존중받아 마땅한 남성이었던, 아버지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습니다만 말랄라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극단적 이슬람 세력에게 어린 여자아이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요. 학교에 다니는 여자아이들은 한 사람 빠짐없이 당장 그만두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을 당했습니다. 많은 여학생들이 협박에 이기지 못해 학교를 떠났죠. 그녀가 무엇보다도 사랑하던 학교를 빼앗기게 된 상황에 그러나 말랄라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말랄라는 학교를 떠나긴 커녕, 교육받을 권리를 위해 싸움을 시작합니다. 12살이 되자 영국의 BBC 방송사 홈페이지에 자신의 모국어로 탈레반의 폭정과 여성의 삶에 대한 에세이를 기고하기 시작했죠. 이 글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자 방송사의 다큐멘터리에 출연합니다.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본격적인 여성 교육활동가가 된 것이죠. 탈레반을 비판하고 단지 자신은 학교에 다니고 싶은 것일 뿐이라는 의사를 거듭 밝혔습니다. 


 서양의 관심 속에 파키스탄평화상까지 받게 된 말랄라를 탈레반도 더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만 15살이던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의 스쿨버스를 한 남자가 멈춰 세웠고, 버스 안의 여학생들 중 누가 말랄라인지 물어보고는, 세발의 총격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말랄라는 살아남았습니다. 병원에서 긴급치료를 받은 뒤 영국으로 후송되어 재수술을 받았습니다. 3개월 만에 무사히 퇴원했고, 그 해에 유엔 본부에서 전 세계 아동의 교육받을 권리 실현에 앞장서달라는 연설에 나섭니다. 이듬해에는, 그간의 어린이와 여성의 교육권 보장을 위한 실천을 인정받아 역사상 최연소 노벨상을 평화상 부문에서 수상하였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말랄라로 하여금 학교 다닐 권리를 위해 목숨을 걸도록 하였을까요? 말랄라에게 교육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의 이번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올바름에 대한 믿음


 말랄라가 목숨을 걸고 배움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지속한 것은, 그녀에게 명확한 교육에 대한 믿음과 올바른 신념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녀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말랄라의 주장은 매우 단순합니다. 어린 아이의 순수한 교육에 대한 열망이니 당연하죠. 말랄라는 단지 학교에 가고 싶었고 여자라는 이유로 그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말랄라의 아버지는 그녀의 그런 열망을 존중하며 지지해주었죠. 다른 보수적인 가정이었다면 탈레반이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가 말랄라의 교육에 대한 권리를 억압하는 가장 큰 적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교육받을 권리는 옳은 것, 탈레반의 탄압은 부당한 것이죠. 우리에겐 활자 너머의 먼 세상이지만 말랄라에겐 자신을 둘러싼 현실이었습니다. 언제 탈레반의 습격이 들이닥칠 줄 몰랐습니다. 학교를 제외하면 외출은 꿈도 못 꿀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것과 부당한 것 사이의 충돌에서 말랄라는 올바름에 대한 신념을 택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탈레반이라는 거대한 폭력집단에 맞서는 일을 고작 초등학생, 중학생 나이에 실천했습니다.


 만일 말랄라에게 교육이 단지 직업을 얻기 위한 방편이었거나 부모의 손에 이끌려 시작한 일이라면 이런 것이 가능했을까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직업을 얻든 돈을 벌든 정작 나의 목숨이 위험하니까요. 우선은 학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탈레반이 물러나길 기다리거나, 탈레반의 방침이 바뀌길 기도하는 수 밖에 없었을 테지요. 말랄라에겐 확고한 교육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이것을 자신의 안전과 교환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보단 현실을 바뀌기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했죠. 놀라운 주도성 아닌가요? 


 다시 말하면 우리 아이들의 주도성에 있어, 올바른 가치관과 신념은 상상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그것은 아이들로 하여금 실천하게 만들고, 행동하게 만듭니다. 적극성을 발휘해 세상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도록 만들죠. 부당한 일을 만나면 저항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특성입니다. 올바름과 주도성을 갖춘 아이가 무언가 부당한 일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주도성을 훼손한다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을 차별한다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아이가 이야기한다고 생각해보죠. 아이는 일부 아이들에게만 차별적으로 기울어지는 혜택이 다른 아이들에게도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고 상황을 이해하고, 모두에게 공평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자신의 주도성을 발휘하는 데에 더 낫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바른 가치관은 아이들의 주도성과 실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쥬라는 표현이 있죠. 상류층이 솔선수범해서 실천한다는 서양의 문화입니다. 전쟁터나 위기 상황에서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이들의 주도성 또한 올바름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유럽 엘리트교육은 전인교육을 중시했습니다. 욕구를 통제하는 절제의 미덕과 군인의 용기, 철학자의 지성까지 함께 갖추도록 교육받았죠. 한 사람의 영혼에 용기와 지성이 함께 자리를 잡았으니,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는 생각, 그리고 올바름을 입증하기 위해선 용기 있게 실천해야 한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습니다. 이들의 주도성은 이처럼, 올바름과 현실 속에서의 실천이 긴밀하게 연결되었기에 발휘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사회에서도 아이들이 주도성을 발휘하는 것에 이 ‘올바름’이라는 관념이 매우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충忠과 효孝라는 개념이죠.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충성하는 것은 절대적인 가치였습니다. 조선시대 아이들은 기초교육으로 가장 먼저 가정에서 효와 충의 개념을 가르치는 책을 가지고 공부를 했습니다. 효와 충이라는 도덕적 명제가 곧 올바름이고, 실천 지침이었습니다. 공부를 하여 입신양명하는 것이 효와 충를 실현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유럽의 전인교육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까지의 기초교육도 확고한 도덕교육이 뒤따른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교육에 효, 충, 도덕,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너무 먼 이야기가 되어버렸죠.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주도성의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부가 올바른 것임을 안다면,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길이며 효도로써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는 것을 안다면, 아이는 힘든 고행의 길일지라도 기꺼이 택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말랄라는 목숨을 걸었으니까요. 


 한자와 한문을 이용한 전통적인 충효 교육도 실용적인 쓸모가 있습니다. 한자에 익숙해짐으로써 고등문해력의 빠른 촉진이 가능할뿐더러, 중국과 일본 문화에의 접근이 크게 쉬워집니다. 국어교과의 성취도를 올리는데도 유용하죠. 한자의 부수와 창체의 원리를 이해해가며 아이가 스스로 탐구하는 경험도 쌓아나갑니다.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네요. 한자와 충효 교육법도 수 백 년 간 이어져왔기 때문에 자료는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너무 이른 시기에 아이들에게 수학, 영어 선행학습을 시키기보다는 아이의 수준에 적절한 한자와 한문교육을 시키는 것, 그를 통해 충과 효의 개념을 깨치고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이 장기적인 주도성 함양에는 훨씬 이롭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런 훌륭한 교육전통이 사라지고, 경제성장 이후에는 영어를 통한 세계화 교육이 전통적인 가치관 교육을 완전히 대체했습니다. 아이들은 한자 대신에 영어를, 충과 효 대신에 더 빠르게 경쟁의 우위를 점하는 것을 배웁니다. 


 아이를 지적으로 우수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에 그쳐선 우리들, 부모의 처지는 매우 곤란해질 따름입니다. 아이가 사회에서 어떤 특성을 드러낼지 모르고, 또 아이가 출세해서 어떻게 재산을 모은들 그간 아이에게 지출된 교육비만큼 우리에게 돌아올지 안돌아올지 모릅니다. 지식과 함께 도덕성, 가치관, 품성을 기르게 한다면, 다시 말하여, 공부의 의의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올바른 삶에 대해 사고할 줄 아는 아이로 기른다면, 아이는 스스로 공부하는 주도성을 발휘하게 됩니다. 공부가 가장 올바른 길임을 알고 지식과 도덕을 함께 기르게 될 테지요. 공부의 고행 또한 자기 수양과 절제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인내하게 됩니다. 그런 아이, 요즘 세상에 정말 드뭅니다. 대체 불가능한 인재가 있다면 바로 이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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