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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Feb 21. 2024

시험공화국 레미제라블

평가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평가란 무엇인가?


 평가란 먼저 설정된 교육 목표에 학습자가 도달할만큼 충분히 교육이 잘 이루어졌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행위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지요. 받아쓰기를 통해서 아이의 맞춤법과 한글 능력을 알아보고, 구구단 시험을 통해서 기초적인 수리력과 암기력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저는 구구단을 외우는데 3년이 걸렸지만요.


 구구단 외우는데 3년이라. 공부머리는 꽝이겠네요. 평가는 "누가 잘하고 누가 못하나"를 구분하는데에도 사용됩니다. 저는 매일 나머지공부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구단을 외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초등학교 2학년, 학급 반장이었습니다. 구구단을 못외워서 매일 나머지공부를 하는 반장과, 그런 모지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뽑아놓은 담임선생님의 위신이 말이 아니었을 테지요. "구구단도 못 외우는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반장이라는 상징적인 역할을 차지하다니!" 하는 생각도 누군가는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평가를 통한 선별과 선발 기능을 우리 나라는 무려 고려시대 때부터 유지해 왔습니다. 과거제도죠. 조선시대는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교육 평가를 통한 인재선발을 한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이때부터 한국의 교육열이 국민 의식에 내재되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평가를 통한 선발은 일제시대와 해방 후 국가재건의 과정에서 상당히 부작용을 자주 드러내게 됩니다.


 일제는 조선인 관료를 등용하는데 있어서 일본어 능력을 기본적으로 요구했고, 일본인과는 교육과정에서 차별을 두었습니다. 그러니 같은 시험을 칠 수도, 친다 하더라도 경쟁할 수도 없었죠. 그리고 해방 후 교육의 양적 확대를 중시한 초기 정권들은 평가를 통해 관료와 판 검사 등 사회 엘리트를 구성해나가면서, 획일적인 평가가 초래하는 부작용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과거의 습속대로 공부를 했고, 그렇게 뽑힌 인재들이 우수한 줄 알고 권력에 접근시켰습니다. 교육 평가가 권력 습득의 주요 관문이 되는 것을 인지한 국민들이 이미 60년대 초반부터 사교육을 성행시켜가며 교육경쟁에 몰두하는 것을 방치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시험공화국입니다.


모두를 불행한 사람들로 만드는 사회


 시험공화국이 된 우리 사회는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소수의 우수한 영재들은 가능성이 보이면 바로 부모의 과도한 교육열에 내몰리며 창의력과 자발성을 상실합니다. 영재가 되지 못한 다수의 아이들은 시험공화국에서 평생을 평가의 패배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퇴행적인 교육과정, 그리고 평가 체계와 무관하게도 경제는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모두는 풍요 속에서 물질적 행복을 찾을 수 있었을 테지요. 그러나 경제 성장이 끝난 뒤, 교육은 어떻습니까? 교육에서 행복을 찾도록 하지 못한 나라는, 교육이 가장 큰 불행과 갈등의 모태가 되고 있습니다. 시험 공화국의 레미제라블이랄까요.


 레미제라블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나눠볼까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대중매체의 묘사나 설명으로는 <레미제라블> 후반부의 봉기와 바리케이트 전투를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장발장>이라는 제목으로 문고판을 읽은 것이 제가 11살 때쯤이었는데, 그 책에서도 결말부까지는 충실하게 요약해서 전달했습니다만 대체 왜 그런 큰 싸움이 벌어지고, 사람들이 목숨을 버리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죠.


 나이를 조금 먹고 나서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되면서 비로소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는 공화주의자 청년들의 배경을 알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왕의 목을 자른 충격적인 사건 뒤에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 정도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프랑스에서는 어째서인지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거나, 역사의 진보의 방향과는 정 반대로 왕정이 복고되거나 하는 일이 여러번 발생했죠. 설명이 너무 복잡하니까 한 줄로 요약하자면 왕정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체제는 여전히 강고했고, 그에 맞선 공화정 신체제는 무능하고 취약했다. 정도로 요약해볼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시작되어 공화정과 왕정을 오가는 극도의 혼란상이 178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무려 100년이나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수 차례의 전쟁과 극도의 정치불안은 급속한 산업구조의 변화 속에서 극한으로 내몰린 민중들을 보호하지 못했죠. 이것이 장발장의 극도의 가난과, 민중들의 고통, 그리고 바리케이트 봉기의 배경입니다.

레미제라블, 레미제라블


 왕정과 공화정의 갈등 속에서 민중들의 삶이 극한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우리나라의 시험 문제에 대입해 볼까요. 꽤나 재미있는 것이 발견됩니다. 왕정은 수능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구체제죠. 단일한 기준에 따라 사회를 획일적으로 통제합니다. 수능과 왕권, 공통점이 보이죠?


 학생부 종합전형은 공화정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신체제죠. 프랑스 대혁명 이후 역대 공화정은 왕권을 무너트리고 권력을 분점하는 체제를 추구하긴 했지만 결국 여러 정파의 갈등 속에서 취약성을 노출했습니다. 학생부종합전형 역시 수능을 약화시키고 다양한 주체들에게 평가권을 나누어주었지만, 여러 주체의 갈등 속에서 취약성을 노출하고 있습니다. 학생부종합전형이라는 입시체제를 바라보는 교육당국의 시각이 다르고, 대학의 시각이 다르고, 학부모의 시각이 다르고, 학생의 시각이 다르고, 학교의 시각과 교사의 시각조차 서로 모두 다릅니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민중의 삶을 보호하지 못했고 왕정복고에 쉽사리 무너지곤 했습니다. 공화정은 민중의 삶에는 관심 없이 왕권주의자들과의 투쟁에 진력하며 스스로 위기를 초래하곤 했죠. 우리나라의 수능과 학생부종합전형을 각자 지지하는 사람들의 갈등은 이를 꼭 빼닮아 있습니다. 민중의 삶, 학생들의 행복한 교육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당장 식량이 없어 굶어죽어가고 가진 것은 무엇이든 팔아서 연명해야 했던 프랑스 민중들에게 구체제의 갈등이 무의미한 것이었던 것처럼 수능이냐 학생부종합전형이냐의 갈등은 우리 교육의 가치 회복과는 아무런 관련을 갖지 못합니다. 모두가 불행한 사람들을 양산하는 체제이니까요.


 그러나 답은 의외로 가까이 있습니다. 왕권과 공화정의 싸움이 끝나고 발견된 대안, 바로 민주주의죠.


평가가 차별을 만드는 구조에서 평가의 민주화 없이는 탈출구는 없다


 학습자 중심 평가가 미래 교육의 대안으로 교육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입니다. 평가는 그 고유 기능인 "선발효과" 때문에 반드시 차별을 야기합니다. 차별없이 모두가 행복한 결과를 나누어 얻을 수 있다면? 물론 좋겠지만 아마 정권이 일곱번은 바뀌고 바뀐 미래에야 그런 공산주의적인 상상이 실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싶습니다.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 군주정이나 공화정에서 만약 전 세계 최대 규모의 금광과 유전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민중들의 삶이 달라졌을까요? 근본적인 정체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교육 역시 그렇습니다. 교육 바깥의 조건이 어떻게 나아지고 달라지던 간에 교육 자체에 내재한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반드시 불행한 사람들은 나올 것입니다.


 공화정과 군주정의 쟁투와 혼란은 최후의 군주정이 무너지고 민주정이 수립됨으로써 해소되었습니다. 하나의 절대권력, 소수의 독점권력이 아니라 모든 민중이 함께 권력을 나눠갖는 체제가 등장한 것이죠. 만약 오늘 날의 민주정의 시민들에게 과거의 왕권이나 귀족정에 가까웠던 공화정을 선택지로 제안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당연히 미친 사람 소리를 듣겠지요. 그러나 그게 바로 우리 교육의 현실입니다. 수능이라는 군주정, 학종이라는 공화정의 틈바구니에서 그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지 못한 것이죠.


 권력을 모든 시민이 나눠갖듯, 평가권을 모든 학습자들이 나눠갖는 체제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학교 바깥에서 그런 경험을 여러번 합니다. SNS에 자기 셀카나 아이들 자랑 사진을 올릴 때, 누구에게 허락을 받고 올리진 않을 것 아니겠어요. 그러나 사진을 고르긴 하지요. 스스로 평가를 하고 잘 된 것을 고르는 것, 그런 경험이 학교에서도 여러가지로 시도되고 있습니다. 아직은 맹아 단계이긴 합니다만.


 앞선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스스로 학습 목표와 교육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나름의 평가 기준을 구성합니다. 그래서 원하는만큼 공부를 하고 스스로 학습 목표가 달성되었으면 학습을 마무리합니다. 일정 기간동안의 전체 배움의 과정을 정리해서 대학에 제출을 하면 됩니다. 경쟁이 심한 대학에 가고자 하는 학생들은 높은 학습목표와 교육 계획을 세웠을 것이고, 적당한 대학을 목표로 한다면 모다 충실하게 자기가 원하는 배움의 과정으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에이 말도 안돼.


 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다보면, "말도 안돼 그런 식으로 대학에선 애를 어떻게 가려 뽑아요?"라는 반문이 날아오지요. 그러나 민주정은 공화정과 군주정의 갈등을 해결하는 단초가 되었을 뿐 프랑스 민중들의 삶이 당장 나아진 것은 아니었잖습니까? 학습에 대한 평가를 학습자가 한다는 것이 당장 대학 입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 당연히 아닙니다. 문제는 대학이든, 기업이든, 누군가를 선발하는 결과에서의 효율성이라거나...어차피 허위에 불과한 공정성 같은 것을 바라보는 것은 제발 그만 좀 하고, 교육과 평가를 어떻게 정상화할지를 고민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입시에서의 평가권이 중앙에 몰려있고 그 중앙에 집중된 권한을 조금 나누었더니 소수가 독점한다는 의혹과 함께 사회갈등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초등학교 때부터 평가는 아이들의 것이 되지못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학습목표와 교육과정, 평가로 배움의 권리를 박탈당합니다. 고작 열살 남짓에 스스로를 학습과는 거리가 먼 존재로 낙인 찍게 되지요.


 우리 아이들의 공부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그 불행의 원인을 통제할 수 있고 아이를 행복한 배움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평가권을 아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우리 교육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 중 하나입니다. 그에 대한 유의미한 사례를 다음 꼭지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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