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아 더 칠드런 오브 다크니스
독서실에서 돌아오면 새벽 2시다. 나는 라디오를 켜고 침대에 엎드려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한다. 신해철의 고스트 스테이션, 그리고 수학 오답노트 정리다. 반지하 우리집은 라디오가 잘 터지지 않아 지직 거리는 음향을 어떻게든 살려보고자 여러번 라디오 자리를 이리 바꾸고 저리바꿔야했다. 내가 실수로 안테나를 부러트리기까지 하면서, 음질은 정말 최악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매일 매일 그 시간, 나는 무엇보다 행복했다. 오늘 하루를 잘 살아냈고, 아무렇지 않게 구라 썰을 푸는 신해철 그의 방송이 가장 큰 위로였다.
라디오? 안테나? 반지하? 농담이시죠? 라고 의아하시겠지만 2001년의 사실이다. 여전히 반지하에 사람은 살고, 컴퓨터도 없던 나의 고3 시절에 고스트 스테이션을 청취하는 유일한 방법은 안테나가 부러져 테이프로 어찌어찌 감아놓은 라디오. 그리고 시간은 새벽 2시부터 3시. 그 땐 대한민국 청춘들 중 많은 사람이 새벽2시를 기다렸다. 대학생이 되면서 새벽 방송을 들을 필요가 없게 됐다. 라디오가 아니라 새 컴퓨터로 인터넷 스트리밍 방송을 들었다. 2002년에 스트리밍? 농담이시죠? 라고 의아하시겠지만 역시 사실이다. 신해철은 우리 인터넷 음악사에도 선구자였다. 스트리밍 플랫폼을 스스로 개척해 라디오방송을 업로드한, 국내 최초의 아티스트이고 DJ였을 것이다.
그가 죽은 뒤로 여러번 울었다. 몇년이 지난 지금도 노래방 가서 <단 하나의 약속>을 부르면 멈출 수 없이 눈물이 펑펑 난다. 30대에 한창 미래를 넉넉하게 바라볼 수 있던 시절엔 죽음에 대해 운명에 대해 꽤나 쿨한 목소리로 담담히 이야기하던 그가, 몇번의 무너짐 끝에 겨우겨우 재기하려다가 허망하게 죽어간 상황은 비현실 그 자체다. 30대에 가짜 유언장 형식으로 차분하게 자신의 삶을 정리하던 사람은, 40대 중반에는 누구보다 가족을 애타게 사랑하고 그들의 행복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후반의 노래를 통해 전달되는 그의 변심을 죽음 뒤에 이해했다.
친구가 고스트 스테이션 모음파일을 보내줬다. 어마어마한 분량인데 어떻게 누가 모아둬서 내게 굴러왔는지 모를 일이다. 반가운 WMA 포맷이 있는 걸 보면 그 시절부터 차곡차곡 저장해놓은 모양이다. PC로 게임을 하던 때에는 내내 들었다. 타임머신을 타는 기분이다. 2001년의 신해철은, 청취자들과 전화카드며 스타크래프드의 저그 종족의 신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동성애가 논쟁의 주제이고 체벌 고민이 가장 흔한 사연이었다.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었다. 2001년 새벽의 첫 방송을 듣기 위해 나는 독서실에서 서둘러 집에 와 라디오를 만지고 또 만졌다. 그 방송을 서른여덟이 된 나이에 컴퓨터에 앉아 게임을 하며, 하나하나 골라듣고 있다.
그러나 자리에 앉아있는 일이 많지 않아 듣기가 어렵다. 집에서 컴퓨터를 하는 시간이 길지 못하니 수천시간 분량의 라디오 방송이 소비되지도 제대로 분류되지도 않았다. 그놈의 삼태기메들리를 솎아내고 싶은데 말이다. 하던 PC게임도 그만두고 나선 더욱 그랬다.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를 할 땐 또 집중을 해야하니 고스를 듣지 못한다. 아이러니하다. 지금도 너무나 재미있는데 정작 들을 겨를이 없다. 게다가 라디오방송 음원이라 폰에 몇개씩 넣기에도 좀 어려움이 있다. 가만히 음악 잘 듣고 있다가 갑자기 "위아~더칠드런오브다~크니~스" 하면 이상하잖아.
하여 그냥, 일단 생각날 때 틈틈이 들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얼마전에 묘수가 떠올랐다. 구형 아이폰들. 64기가 SE모델과 128기가 6+모델이 있다. 화면이 큰 6+모델은 집에서 음악을 듣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고, SE 모델은 굴러다니고 있다. 용도가 없다. 몇개월째 전원도 연결안해뒀는데...유레카!
바로 아이튠즈 음악보관함 변경 방법을 검색해서, 새 보관함을 불러왔다. 그래서 와장창 고스 방송들을 부어넣었다. 어라, 분량이 100기가를 넘는다. 우선 반만 넣었다 그래도 1000개가 넘는다. 아이폰SE를 초기화했다. 용량을 티끌만큼이라도 더 줄여야 방송을 한 회 분이라도 우겨넣을 수 있다. WMA 포맷을 아이튠즈에 맞는 포맷으로 변환하고 동기화하고 중간에 파일을 또 빼고 줄이고...바깥양반이 와서 안자냐고 묻는다. 새벽 두시가 넘었다. 끝나간다고 말하고 후다닥 작업을 마쳤다.
그리고 어제 50기가 넘게 꽉꽉 채워담은 조그만 SE폰을 들고 차에 앉았다. 차에서 팟캐스트를 주로 듣지만 바깥양반은 싫어한다. 노래를 들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고품격 음악방송인 고스라면, 바깥양반도 꽤 받아들일만할 거다. 내가 신해철을 좋아하는 것도 알고 해철이형의 낮은 목소리가 듣기 거북하지도 않으니까. 카오디오에서 잘 재생된다. 만족스럽다. 유심이 없는 공기계라서 그대로 차에 두고 내렸다. 오늘은, 바깥양반이 인천에 갈 일이 있어 모시고 오가는 약 세시간 내내 고스를 들었다. 랜덤으로 재생해서 듣다가 지루하면 다른 트랙을 듣고 하다보니 그놈의 어둠의 자식 송만 너댓번 들었다. 나는 바깥양반에게 말했다.
"너 이거 이제 지겹게 듣는다."
"이게 뭔데?"
"신해철 방송 시그널인데 할튼 이제 지겹게 나와."
그뿐인가, 마구리로 중국어를 흉내낸 놀경이며 레지던트악플이며...유령식구 시절 귀에 딱지가 앉을만큼 자주 들은 중간광고방송들도 곧 지겹게 듣게 될 텐데.
팟캐스트는 당분간 차에서 듣지 않아도 되겠다. 굳이 운전할 때가 아니어도 충분히 들을 기회는 되니까. 대신에 젊었던 시절의 그리고 나이 든 신해철의 목소리를 듣다가 톡, 하고 트랙넘기기 버튼을 눌러서 몇년도 방송이 나올지 기대하는 것도 무척 흥미진진하고 재밌는 일이다. 다음주에 바깥양반이 드라이브 가자는데 기꺼이. 오가는 길이 조금도 심심하지 않을 터이다.
아...근데 바깥양반한테 낙타눈썹을 어떻게 설명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