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세 번째 홈로스팅이라 레시피 테스트 단계
나는 남의 취향 따위 신경쓰지 않고 뻔뻔한 편이라, "선물은 주는 사람 취향을 상대에게 전하는 것"이라는 고집을 갖고 있다. 덕분에 연애할 때 바깥양반이 좀 곤란한 일을 겪었는데, 나는 바깥양반이 착용할 수가 없는 물건을 선물을 주고는 아무렇지 않게, "주는 사람이 정하는 거야."라고 말한 바 있다. 첫 기념일이었는데도.
그런 내 제 멋대로인 기질이 빛을 내는 것은 차나 커피를 선물할 때다. 상대방이 어떤 종류의 차를 좋아하는지 관심조차 없다. 내 멋대로 내가 마셔보고 싶은 걸 선물이랍시곤 휙 건내곤 "어떤 맛이었어?" 라고 이삼일 지나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문자를 한다. 정작 내가 마실 것은 사지 못한다. 내 차 사랑을 아는 바깥양반이, 어딜 가서 사오든 누구에게 선물을 받든 해서 수 십 가지 차와 원두를 집에 쌓아놨기 때문이다. 호주에서 사 온 T2라는 브랜드의 끝내주는 블렌딩티가 있는데, 지금 한잔 우려서 다시 책상에 앉았다.
새로움은 그래서 나에겐, 차를 마시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이 차를 기르고 덖은 사람, 이 원두를 블렌딩하고 볶아낸 사람의 취향을 즐기는 것이다. 책을 읽는 것이 글쓴이와의 대화라면 차를 마시는 것은 바리스타와의 대화, 그리고 차 제작자와의 대화. 편견 없이 고집 없이 타인의 취향과 교감하는 것, 그 열린 태도. 요즘처럼 푸른 새싹이 돋아나는 봄의 절정에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가만히 쥐고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는 일만큼 올바른 힐링도 없다. 차 마시기 좋은 계절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나는 콩을 볶으면서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전혀 편하지 않다. 세가지의 원두를 섞어 200g 정도 볶는데 1시간 넘게 걸린다. 신선한 원두를 사서 소분 냉동한 게 고작 한달 반 전인데. 그렇게 해서도 충분히 만족스럽게 커피를 즐길 수 있는데 말이다. 그저 나는 매일 내려마시는 커피에서 뭔가 "이게 아니야"를 되뇌이고 있었고, 늘 사던 원두 온라인 몰도 이 참에 바꿔보자고 검색을 하던 어느날 밤 로스팅을 안한 생두도 여러 곳에서 판매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인다.
생두? 홈로스팅? 몇번 본 적은 있다. 후라이팬만 있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지금까지 5년 넘게 원두커피를 내려마시면서도 그것을 시도해보지 않은 건, 충분히 그렇게 마시는 원두의 품질에 만족해 온 것이 컸다. 풍성한 아로마와 산미가 감도는 에티오피아의 원두는 그것을 추출하는 나의 실력과는 무관하게 언제나 새로움으로 다가왔고, 자연히 그 방향으로 나의 입맛도 굳어져버렸다. 직접 외국에서 다양한 에스프레소를 즐기게 되기 전까지는.
살까? 살까? 잠깐 망설이다 의견을 묻기 위해 바깥양반을 불렀다. 한창 드라마에 빠져 계시던 바깥양반은 손을 내저으며 방해를 하지 말란다. 내심 말려주길 바랐는데 어쩔 수 없지. 도전하기로. 홈로스팅과 블렌딩, 생두 선택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서 세심히 읽어보며 생두를 선택할 판매처를 골랐다. 판매처가 꽤나 다양하고 원두의 가격이 천차만별이라서 사이트 가입과 장바구니에 생두를 넣는 과정이 제법 막막했지만 나에게 차란 새로움의 추구가 그 본령이었고, 생두를 사고 남긴 사람들의 생생한 리뷰는 나의 호기심에 로켓엔진을 달았다. 가장 마음에 드는 브랜드를 골라, 아프리카와 중남미, 남미의 생두를 한가지씩 골랐다. 플로럴함과 바디감, 긴 여운에 각각 강점을 가진 콩들이다. 다음날은 마트에 가서 팬과 나무주걱을 새로 샀다.
생각보다 빠르게, 이틀만에 택배가 도착했고 퇴근하자마자 택배를 뜯고 바로 원두를 볶기 시작했다. 노트를 두고 블렌딩 비율과 볶음 시간을 적는다. 팬이 작아서 중간불로 팔이 빠져라 돌리며 볶아도 균일하게 로스팅이 되지 않았다. 강배전과 중배전, 약배전이 모두 뒤섞인 볶음도. 그러나 처음부터 이건 예상한 일이다. 영 덜볶인 원두들만 골라서 다시 볶으며, 다양한 볶음도가 뒤섞인 그대로 커피를 내리기로 했다. 이 자체가 홈로스팅의 즐거운 점일 터다. 항상 일정한 맛을 유지해야 하는 바리스타들 입장에선 균일하게 볶을 수 있는 장비가 필수인듯하지만.
탁탁 소리를 내며 쪄지고 볶아지는 원두에서 차츰 구수한 냄새가 올라온다. 한 여름엔 에어컨을 켜고 로스팅을 해야하나 싶은데 그거야 나중에 고민을 해도 되겠지. 콩의 속껍질이 분리되며 사방에 날린다. 홈로스팅의 두번째 난관이다. 정말 많이 날린다. 중간중간 마른 행주로 사방을 닦고 청소기도 가져와 바닥을 치우며 쉬지 않고 콩을 휘젓는다. 이 노동력이면 달고나커피도 충분히 만들겠다 싶다.
챠르르 볶아진 원두가 스탠리스 볼에 부어지는 시원하고 짜릿한 소리. 덜 벗겨진 채프를 벗겨내고 불량콩을 골라내는 지난한 작업이 있긴 하지만 간소하게만 했다. 퀄리티 관리가 필요하지 않은, 그래서 자유로운 홈로스팅이다. 잠깐 한숨 돌리며 원두에서 김이 빠지길 기다린다. 볶아낸 그날 먹는 것이 가장 맛있게 먹는 것은 아니지만 성취감을 위해서 그날 먹어보라는 조언이 홈로스팅 관련 웹문서에 있었다. 두근두근 하는 마음으로 원두를 갈았고, 구수한 향을 즐기며 드립퍼 위에 부풀어 오른 머핀에 확 물을 붓는다. 그렇게 내린 그 맛은,
야. 정말 행복하다. 나는 이튿날 두번째 볶은 원두를 친한 선생님에게 선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