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에서 왔어유
***"아나고"가 "붕장어"의 일본어임을 친절한 방문객께서 알려오셨습니다. 고쳐야 하나 대사 처리한 부분은 병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아침 먹을 국을 끓이려고 냉동실을 열어 국거리를 찾다가, 봉지에 쌓인 생선 포를 발견했다. 우럭 포려니. 그래 얼갈이 넣어서 시원하게 국이나 끓이자 하고 봉지를 끄집어냈다. 엄마가 자주 드시는 요리인데, 특히 아빠는 퍽 좋아하신다. 말린 우럭을 간단하게 양념한 국물에 한소끔 끓이기만 해도, 농축된 우럭의 육즙이 빼어난 국물을 만들어낸다. 다만, 말리고 냉동보관을 오래하면서 군내가 좀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언제 냉동실에 밀어넣었는지 기억을 하지 못하니 필시 이녀석도 적잖이 군내가 나겠구나- 하면서 꺼냈는데...어라. 우럭포가 아니다.
넓게 펴진 모양새 하며, 뱀을 살짝 닮은 특유의 짙은 회색빛 등가죽하며...붕장어다. 붕장어 포다. 우럭이든 붕장어든 철마다 많이 잡힐 때도 적게 잡힐 때도 있는 태안에서는, 판로가 막혀 더 팔지 못하는 생선들을 이렇게 말려서 둔다. 회꼬시로나 구이로나 꽤 가격이 나가는, 붕장어 같은 나름 고급 식재료도 이렇게 태안에서는 햇볕에 바작바작 말라버리는 신세렸다.
아나고 알기를 우습게 아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라, 물론 종종 비싼 돈을 주고 숯불에 구워먹기도 하고, 어린 시절에는 연탄불에 구워먹는 것을 큰 호사로 알기도 했지만 이녀석이 대수롭진 않다. 붕장어는 국을 끓이면 맛있다. 된장을 살짝 풀고 우거지를 넣고 끓이면 단백질 가득한 이녀석의 살집이 뽀얀 국물을 뿜어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붕장어 포인지도 모르고 냉동실에 1년이고 얼마고 넣어놨더라니 이게 실화란 말이냐. 겨울에 발견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뜨끈한 아나고 국물이면 추위가 다 녹아내릴 텐데.
아쉬움은 아쉬움이고, 이미 국을 끓이려고 물을 올린 참이라 그냥 고대로 물에 텀벙텀벙 담궜다. 자아 국을 끓일까 어떻게 할까...팔팔 끓는 국물을 우선 한번 맛봤다. 짭짤하니 고소하다. 이때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한번 받지 않으셔서 잠시 후에 두번째 시도만에 통화가 되었다.
"어."
"엄마. 냉동실에서 아나고(붕장어) 포가 나왔다?"
"아나고?"
"어. 우럭인 줄 알고 갔고 왔었는데."
"어...그럼 일단, 튀겨."
"튀겨?"
"어. 일단 기름에 튀겨서 짜면..."
"아냐 나 지금 조림 하려고. 벌써 물에 넣었어."
"어? 그래. 조림도 되지."
내가 여러번 집에서 우럭포로 조림도 한 판이다. 성공한 건 손에 꼽지만. 조림은 어려운 요리다. 나는 갖은양념을 잘 만들지 못한다. 국이나 하고 찌개나 끓일 줄 알지. 재료 그대로의 맛을 살리는 것을 좋아하고 잘하지, 고춧가루를 잘 쓰지 못한다. 그래서 김치 찌개 말고는 우리 집에 빨간 국물이 잘 없다. 토마토 소스 말고는.
엄마와 통화를 마치고 무를 썰어 넣었다. 마트에서 사온 제주도 산 무라나. 짤뚱하니 제주도스럽다. 빠르게 국물을 내야 하니 얇게 저미듯 썬다. 그리고...생강차 한스푼. 차로 많이 마시지만 이따금 조림처럼 소량이 필요할 땐 슬쩍 꺼낸다. 그 다음엔 마늘 한주먹. 내 손은 크다. 근데 큰 손으로 마늘 한주먹은 괜찮을 걸까. 에이 상관은 없다. 어떻게든 되겠지.
굴 소스 약간, 간장 약간, 드디어 고춧가루...국물이 팔팔 끓면서 대강 갖은양념스럽게 만들어지긴 한다. 나중에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좀 넣어야지. 구색을 더 갖추기로 했다. 고기를 구워먹으려고 산 새송이버섯도 남은 것을 꺼내 썰어넣고, 파도 와장창 썰어넣는다. 빨간색은 대체 어떻게 내는 것인지를 모르겠다. 매운 것이 싫어 고춧가루를 두 스푼이나 넣었을까. 그러니 색이 영 안난다. 바깥양반은 내일 이 요리를 보고 뭐라고 하려나.
워낙 조림은 자신이 없어 레시피라도 찾아볼까 싶어, "붕장어포"로 구글링을 해보니 진짜 토속음식이긴 한가보다. 레시피가, 없다! 하긴, 왜 아니겠어. 누가 붕장어를 말려서 국을 끓일 생각을 해. 시골사람들이나 먹는 요리다. 도로가 잘 뚫리고 인터넷으로 맛집 소문이 바로바로 전국에 도니까 요즘은 그나마 인터넷에서 검색이라도 되는 것이지. 쭈꾸미는 그러다가 몸값이 천정부지가 되어버렸고.
나도 겟국지라는 것을 대학생 때나 처음 먹었는데 그건 엄마도 태안에서 좀처럼 갖고 오신 적은 없다. 게장 담갔던 간장으로 호박과 얼갈이배추, 무청 등을 절인 음식이다. 이걸로 국을 끓이면 시원하니 맛있다. 엄마는 겟국지가 반갑다며 친척집에서 한보따리 챙겨오셨다. 서울에서도 몇군데 상차림을 하는 곳이 있는데, 요즘은 간장게장도 서산보단 여수 스타일로 무한리필로 많이 가다보니 태안은 상대적으로 잘 몰라주나 싶다. 맛으론 태안 쪽 게장이 훨씬 크고 좋은데 말이다.
그렇게 팔팔, 붕장어를 한소끔 끓인 뒤에 뒷베란다에 두었다. 내일 아침에는 세상 신기한 음식을 바깥양반에게 먹일 수 있겠지. 분명히 인상은 찡그릴 테지. 나 혼자 박박 긁어먹을 테다. 이 귀한 음식을. 아직은 국물이 많지만 두어번 데우고 졸이다보면 나중엔 아주 짭쪼름한 국물이 밥을 부를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다른 것도 다 필요 없다. 밥을 보리차 물에 말아서 꼬들꼬들한 붕장어 포 조림을 북 찍어서 한숟갈. 아. 입맛이 살살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