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 디자이너 선생님 죄송합니다 꼭 대박 나세요
“우리 천일 케익 주문 맞추려하는데 문구랑 디자인 좀 그려줘."
언제나처럼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바깥양반이 종종 중요한 날마다 시키곤 하는 케이크 디자이너에게, 코앞으로 다가온 결혼 1000일 기념 케이크를 맡기려하는 모양이다. 지금까진 딱히 나에게 요청을 한 적은 없다. 한창 수업 준비 중이었기 때문에 아무 이면지나 꺼내 슥슥 그려주었다. 나는 곰으로, 바깥양반은 수달로.
"헐 동물로 한다고?"
"사람으로 해줘."
"사람으로 그려줘 동물 너무 웃기지 않아? ㅋㅋㅋ"
수업을 마치고 오니 바깥양반에게 톡이 여러개 와 있다. 왜. 난 이게 좋은데. 그런데 바깥양반은 동물 캐릭터보단 사람이 좋단다. 사람으로 다시 그려달라고 재촉이다. 질 수 없지. 정성을 가득담아 다시 그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사람으로 해달라니까."
"끄응...아니 사람으로 한다는 것도 웃긴 게..."
사실은 미리 바깥양반이 내게 보낸 샘플사진들이 있다. 예쁜 선남선녀들을 이용한 도안들인데, 내 성격 상 그런 예쁘장하고 아름다운 그림들로만 기념 디자인을 하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보내준 도안 중에 <라라랜드>의 탭댄스 장면을 일러스트로 옮겨 만든 도안도 눈에 띈다. 질수 없지. 나는 재밌고 싶다. 1000일 기념 케이크라도 뭔가 재밌고 싶다.
그래서 다시 그렸다.
"어 이거 마음에 들어."
"...? 뭘 좋아 타이타닉인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응 ㅋㅋㅋㅋㅋㅋㅋ"
"아 죽잖아!!!"
"잭 죽어요 님아!!!!"
제길. "로맨스 영화"로 구글링해서 괜찮은 커플 장면이라도 찾아보려고 했는데 딱히 마음에 드는 게 없다. 그래서 웃겨보려고 보낸 그림을 바깥양반이 스무드하게 받아넘긴다. 날 빠트리고 싶어 이 여자?!
"동물에서 사람만 바꿔줘. 아까 위에꺼 도안 좋아."
"아휴...잠깐만."
점심도 잊고 계속 그린다. 그런데...역시 뭔가 이상하다. 느낌은 살려봤지만, 영 동물 캐릭터의 흥겨운 느낌이 아니다. 이런 포즈도 동물이 해야 귀여운 거지...
"ㅋㅋㅋ맘에 들어"
"저 팔벌린 포즈가 동물들은 귀여운데...사람이 하면 뭔가 어색."
"잠깐만 있어봐."
"응."
나는 이미지를 계속 찾아봤다. 그러나 마땅한 게 없다. 좋은 로맨스 영화는 많지만, 케이크 도안으로 맞춤한 게 없다. 예를 들어 <어바웃타임>(내가 딱히 좋아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같은 경우...이걸 어떻게 도안으로 만든단 말이야.
슬슬, 배가 산으로 가기 시작했다.
"응? 이건 뭐야?"
"...모르는 게 낫겠다."
타이타닉 패러디는 나를 물에 말아버리고, <너의 이름은> 같은 오타쿠 유머는 전혀 안통하고...안돼.
아, 그런데 그때, 머리를 섬광같이!!! 스치는!!! 아이디어가!!!!
"야야야"
"이걸로 하자"
"나 열심히 그렸다."
"바깥양반이 마리오고 내가 루이지야"
"ㅋㅋㅋㅋ그래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든다. 바깥양반의 발랄한 모습이나 우리 부부의 엉뚱한 모습도 잘 살아있다. 문구는 상대적으로 간소해졌지만, 문구가 아니라 이미지를 통해 전하는 메세지가 풍성해서 괜찮겠다.
물론, 이 시국에 굳이 마리오인가? 싶긴 하지만. 고민은 됐지만 이만한 게 없다. 그냥 결정하기로.
"보냈어?"
"응 아직 답은 안왔어."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와서 바깥양반에게 물어보니, 아직 디자이너께 답은 오지 않았다. 적지 않게 걱정이 된다. 꽤나 복잡한 도안이라서 거부를 당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못하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다시 또 도안을 뽑아내야 하나. 아...그러기엔 아깝다.
그리고 퇴근을 20여분 남긴 시간, 바깥양반은 내게 말을 건다.
"오빠"
바깥양반이 이렇게 두 글자로 보내는 건 뭔가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 또 무엇일까. 나는 영어듣기문제 풀이에 집중하다가 바깥양반의 카톡에 고개를 들었다.
"케익 참고사진 보내주고 케익 색 일일히 다 정해달해래"
"응."
"나 바쁘니 해죵 지금. 오늘 칼퇴는 글름. 막노동 중"
나는 빠르게 포토샵을 열었다. 그리고 참고한 사진을 검색해서 듀얼 모니터에 띄웠다. 빨리 마치고 퇴근해야지. 색지정이라. 급작스럽긴 하지만 합리적인 요구다. 그래픽 디자인에서는 필수. 아이고...그나저나 퇴근은 늦겠구나. 이왕이면 작업에 도움이 되도록, 그리고 완성품을 상상할 수 있도록 세세하게 작업을 한다.
윽, 교장선생님이 마침 교무실에 들어오셨다. 창을 내려서 작업을 감출 생각도 못하고 바쁘게 바쁘게. 아 오랜만이라 이미지 작업이 머리가 안돌아간다. 대충 대충. 우다다다다다.
"휴. 다 했어. 이거 보내."
"요. ㅋㅋㅋㅋㅋㅋ"
"비싸질 것 같아"
"조금 단순하게 해달라고 해야겠다"
"ㅋㅋㅋ아냐 두번 올 날도 아닌데"
"비용 더 드린다고 하고, 보시고 디자이너님 하고 싶은대로 해달라고 해"
"뭘 가격을 빼 ㅋㅋ 혹시나 단순하게 할 거면 글자에 레이어된 색이나 단순하게 해달라고 해"
순식간에 작업을 하고 나니, 야 이걸 만든 내가 레전드다 진짜. 퇴근도 않고 교무실에 앉아서 글을 마치고는 이제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