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영화'하면 어떤 영화가 떠오르나요?
SF 마니아들 사이에서 '블레이드 러너'라고 답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고 한다. 1982년에 개봉된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세계적인 SF 걸작으로 꼽힌다. 2017년 <블레이드 러너 2049>가 개봉됐을 때도 마니아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나는 <블레이드 러너 2049>가 <킹콩> 같은 리메이크 영화인 줄 알았다. 당연히 원작에도 관심이 없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건이 생긴다. 오디션을 봤던 작품에 덜컥 캐스팅이 됐는데 'SF 뮤지컬'이었다. 대본을 잘 이해하고 싶어서 감독님께 어떤 영화를 참고하면 좋겠냐고 여쭤봤더니 <블레이드 러너>를 추천하셨다.
SF 영화라고는 마블 시리즈밖에 몰랐던 내가, SF와 판타지도 구분 못하던 내가, 비로소 진정한 SF의 세계로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SF의 세계는 쉽지 않았다. 왜 대본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블레이드 러너>를 보니까 이해가 되더라. 난해했다. 너무 심오했다. 화면은 계속 어두웠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작가이자 연출이었던 감독님은 '우리 공연도 영화 <블레이드 러너>처럼 한 번 보면 이해가 안 되는 작품'이라고 설명하셨다. 그랬다. 공연이 90분인데 내용을 설명하는데도 90분이 걸렸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심오한 내용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만큼이나 많은 버전(판본)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버전은 아래와 같다.
1982년 샌디에이고 시사회판(San Diego Sneak Preview)
1982년 미국에서 처음 개봉된 극장판(US Theatrical Cut)
1982년 유럽 등에서 여러 장면을 추가해 개봉한 국제판(International Cut)
1992년 리들리 스콧 감독의 원래 의도를 반영해서 재편집한 감독판(Director's Cut)
2007년 리들리 스콧 감독의 감수로 세부적인 부분을 다듬은 최종판(Final Cut)
* 국내에는 1986년 '서기 2019년'이란 제목으로 상영시간 85분 버전을 비디오로 출시했다. 1989년 1월 같은 제목으로 MBC 주말의 명화에서 미국 극장판을 더빙 방영한다. 1993년에는 '서기 2019 블레이드 러너'라는 제목으로 감독판이 극장 개봉했다. 2001년에 '블레이드 러너 감독판'이 DVD로 출시되면서 제목에 '서기 2019'가 없어진다.
(참고: https://namu.wiki)
영화는 여러 가지 이유로 편집을 거쳐서 개봉된다. 특히 상업영화는 흥행도 고려해야 하고, 평론가들의 관람평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상영시간이나 관람등급을 조정하기 위해서 편집하는 경우도 있다. 극장판 영화는 감독의 의도가 제대로 반영되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도 마찬가지였다. 개봉 전에 열렸던 시사회 때부터 편집 논란이 시작됐다. 한 번 보고 도저히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였고, 분위기도 어두웠다. 평론가들도 혹평했다. 당시는 영화 평론가들의 입김이 지금보다 훨씬 강력했기 때문에 영향력도 더 컸다. 제작자 입장에서는 관객과 평론가들의 반응을 보고 그대로 개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처음 개봉된 극장판에는 영화 중간중간에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한 나래이션이 추가된다. 결말도 완전히 달라졌다. 영화 내내 이어지는 어두운 분위기를 바꿔보기 위해서 추가로 촬영된 장면을 삽입한다. 주인공의 독백과 밝은 분위기의 결말은 생뚱맞을 정도의 급반전이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다시 평가받게 된다. 혹자는 비디오 테이프의 영향으로 영화를 여러 번 다시 보게 된 관객들 덕분이라고도 한다. 보면 볼수록 의미심장하고 생각해볼거리가 많은 영화란 것을 관객이 알아주었다. 드디어 개봉 후 10년이 지나 결국 감독의 의도대로 편집된 감독판이 개봉한다.
: 극장에서 개봉된 것과 다르게 감독의 본래 의도를 살려 재편집한 판본
감독판은 '언컷 버전(uncut version)'이라고도 부른다. 흥행 기준이나 제작자의 입장, 심의 등에 의해서 잘려나간 부분을 되살리는 경우 때문이다. 감독판에서는 영화를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고자 했던 감독의 세계관도 더 잘 반영된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극장판, 감독판, 최종판 비교 영상
감독은 관객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장면은 남겨두고, 그렇지 않은 장면은 잘라낸다. 그 장면들을 통해 관객이 생각하고, 느끼게 함으로써 감독의 목적을 달성한다. 영화의 감독판은 어떤 장면을 남기고 어떤 장면을 지울 것이냐를 결정한 결과다. 그리고 그 결정의 기준이 되는 것은 원래 감독이 '의도했던 바'다.
감독이 의도하는 바를 '[영화로 배우는 인생 연출]_01.신과 함께-인과 연' 편에서 다룬 '초목표(super-objective)'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편집의 기준은 초목표다.
'초목표(super-objective)'란?
- 작품의 궁극적인 목표
- 작품의 모든 역할과 장면을 관통하는 목표
이 장면은 초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는가?
도움이 되지 않는가?
감독들이 편집 과정에서 고민할 때 하게 되는 질문이다. 자신이 의도했던 바를 잘 살릴 수 있는 장면인가, 아닌가? 이 질문을 인생으로 가져와 보자. 오늘 내가 만든 장면은 나의 '인생초목표(super-objective of life)'를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었는가? 도움이 되지 않았는가? 결정적인 순간에 당장 어떤 선택을 할지 고민된다면 '지금 이 순간 내가 만들 장면이 나의 인생초목표에 도움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라고 스스로 질문할 수 있다. 마치 영화를 편집하는 기준처럼 인생에서 하는 선택의 기준을 찾는 것이다.
가치관은 인생초목표를 이루고,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선택의 기준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더 중요한지 판단하는 기준이다. 우선순위이며 신념의 근거다.
삶이라는 공연을 하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연출하는 주체로서 각자의 삶을 편집한다. 매 순간 선택으로 장면을 만든다. 때로는 지워버리고 싶은 NG 장면도 찍는다. 오래 기억하고 싶은 명장면도 남긴다. 좋든 싫든 선택으로 만들어진 장면이 쌓인다. 그리고 그 장면이 이어져서 삶이라는 공연이 완성된다. 지금까지의 삶과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다른 선택이 필요하다. 같은 선택으로 NG를 반복하면서 명장면을 기대할 수는 없다. 선택을 바꾸면 삶이 바뀐다.
- <인생 연출> 중에서-
원하는 인생으로 연출하고 싶다면,
가치관(values)을 명확히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