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보호하는 중
눈은 대기 중의 수증기가 찬 기운을 만나 얼어서 땅 위로 떨어지는 얼음의 결정체다.
결정체라는 말이 주는 딱딱함처럼 눈은 따뜻함이 사라진 자리에서 만들어진다. 누군가에게는 순수함과 낭만이겠지만, 어떤 날의 눈은 마음이 굳어지는 순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요즘 나는 자주 눈을 떠올린다.
땀이 흐르는 한여름 오후에도, 쨍한 햇빛에 눈이 부실 때에도, 머릿속에 겨울의 시린 풍경이 그려진다.
온 세상이 잠시 멈춘 듯 조용했던 날과 그 위에 소복이 쌓인 하얀 눈.
그것은 마치 열기가 가득한 감정을 덮는 보호막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눈은 필터가 아닐까?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선명했던 마음 위에 얹어두는 것.
덮어야 비로소 버틸 수 있는 감정도 있으니까.
가랑눈처럼 스치듯 내린 하루에도
우리 마음엔 은근히 쌓이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무심코 지나친 말 한마디,
제때 건네지 못한 미안함,
혼자 삼켜낸 서운함까지.
그 감정들은 폭설처럼 어느새 수북해지고,
나는 그 위를 무심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으로 걷는다.
무겁지 않은 척.
괜찮은 척.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디딘다.
그렇게 걸으며 나는 깨닫는다.
문제는 감정이 아니라,
그 감정을 너무 또렷하게 돋보기처럼 들여다보았던
내 시선이 문제였다.
지나치게 선명한 감정은 날카롭게 나를 파고든다.
그래서 더 아프다.
가끔은 가루눈이 흩날리듯 그 위에 보호막을 씌워
너무 진했던 감정들을 안아주고 싶다.
열기로 끓어오르거나 시린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 마음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때론 눈보라처럼 거칠게 흔들리기도 한다.
그럴 땐 오히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선명하게 느껴진다. 휘날리며 마음속 깊이 엉켜 있던 생각들을 흩뜨려 놓는다.
눈은 그렇게 흩날리다가도 쌓여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게 만든다.
눈은 말이 없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는 메시지가 있다.
지금은 이대로 괜찮다.
그 마음을 당장 어떻게 하지 않아도 된다.
감정은 반드시 뚜렷해야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흐릿하게 남아 있는 기억도,
덧칠해 둔 감정도 나를 지키는 방법 중 하나다.
오늘 나는 내 마음 위에 눈을 한 겹 덧댄다.
조금은 무기력하게, 또 조금은 의도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