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섭섭한 해방기
오늘 아침은 분주했다. 한 달간의 방학이 끝나고 남편도, 아이도 모두 개학을 하는 날이다. 방학 내내 일찍 일어나 종알거리던 아이는 개학이라는 이유로 침대에서 일어나질 않는다. 결국 아침 식탁을 모두 차리고 나서야 미적거리며 거실로 나왔다.
반면 내 몸과 마음은 한결 가볍기만 하다. 2시간만 버티면 혼자가 될 수 있다. 혼자만의 시간을 오롯이 누리기 위해 나는 부지런히 밥을 먹고, 세수를 하고, 설거지 거리를 식기세척기에 넣고, 빨래를 돌리고, 마른빨래를 정리하고 청소기를 돌렸다. 그 사이 느릿느릿 밥을 먹고 아이스 망고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은 아이는, 다시 침대에 누워 있다가 내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욕실로 향했다.
"엄마, 리코더 어디 있지?"
"엄마, 내 실내화 봤어?"
"엄마, 친구들한테 전화해서 같이 가자고 해도 돼?"
지금 당장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들을 열 개쯤 만들다가 지친 아이는, 정말 오~랜만에 가방을 메고서 집을 나섰다. 그래도 2학기 첫 등교니까 제일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입었고 주머니에는 수업이 끝나고 분식집에서 슬러시를 사 먹을 용돈도 챙겼다. 매일의 일상에서 약간의 즐거움을 찾는 것. 나는 마흔이 다 되어서야 깨달은 지혜인데, 아이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삶을 챙기는 법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전쟁 같은 방학이 끝나고 전쟁 같은 아침도 지나갔다.
이제 나 혼자다. 정말 나 혼자다. 드디어 나 혼자다. 클래식 FM 라디오를 틀어 놓고 찬 물을 한 컵 떠 책상 앞에 앉았다. 그 순간, 복잡하게 뭉쳐져 있는 어떤 감정이 떠오른다.
잘한 걸까.
일생 단 한 번뿐인 3학년 여름방학. 우리는 잘 보냈나. 내가 놓친 것은 없는 걸까.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곳을 다니고 더 많은 경험을 했어야 했던 걸까.
아이는 늘 하고 싶은 것이 차고 넘친다. 키즈카페도 가고 싶고, 뚜아뚜지가 다녀왔다는 괌이나 사이판에도 가보고 싶다. 눈 돌아가는 놀이 공원에도 가고 싶고 바다에 가서 모래놀이도 하다가 시원한 바닷물에 풍덩 빠지고 싶기도 하다. 비행기를 타서 기내식도 먹어보고 싶고 공주들이 나오는 퍼레이드도 구경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해줄 수는 없다. 나에게는 여러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렇듯 시간적인 한계가 있고 경제적인 한계가 있으며 체력적인 한계도 있다. 나는 이 한계 아래에서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아이에게도 이것을 가르쳐야 한다.
작년 방학 때에는 아이에게 "50만 원" 예산을 정해주기도했다. 엄마가 회사에서 일을 하는 동안 이 돈으로 아빠랑 워터파크도 가고 키즈카페도 가면서 놀라고. 그때부터 아이는 부지런히 고민을 하더니 워터파크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부산 여행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얼마 전 퇴사를 했다. 그건 시간은 많아졌지만 돈은 부족해졌다는 뜻이다. 한 편으로 생각을 해보면 나에게는 다시없을 휴가이기도 하다. (그러길 바란다!) 그래서 퇴사를 하고 난 직후에는 뭐라도 좀 근사한 걸 해볼까, 돈 생각하지 말고 정말 하고 싶었던 걸 해볼까 고민을 하기도 했다.
바닷가 마을에서 한 달 살기 라거나, 좋은 극장에서 뮤지컬을 보거나, 아니면 해외여행을 가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여름은 너무 더웠고 결국 두 번의 여행으로 우리의 외출은 끝이 나버렸다. 나, 잘한 걸까.
내가 이런 고민을 하는 동안 아이는 까맣게 탔다.
바닷가 여행도 그러했거니와 더워서 집에만 있고 싶었던 나와는 달리 아이는 부지런히 여름을 만끽했다. 집 앞 물놀이터에 일주일에 세 번씩 나가 놀았고 친구들과 함께 근처 쇼핑몰을 구경하기도 했다. 선선한 저녁이면 우리 셋이 손잡고 동네 산책을 했고 유명하다는 맛집 앞에서 줄을 서 기다렸다가 먹기도 했다.
아주 특별할 건 없었을지 몰라도 우리의 여름은 이런 시간들로 채워졌고 이제 막 끝나가려 한다.
아이에게 이 여름은 어떻게 기억이 될까.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사실 난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아이도 이 여름을 곧 잊게 될 것이다. 까만 아이의 살갗도 조만간 다시 하얘지겠지.
그러나 우리가 함께 했다는 사실은 변함없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여름을 온몸으로 만끽했던 너의 미소는 내 마음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