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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짜장면의 맛

기억은 새롭게 만들어진다

by 바람부는 언덕
20230325000034_0.jpg https://biz.heraldcorp.com/article/3097413


인생은 그야말로 짜장면의 맛이 아닌가, 하고 지금 봉구는 생각하고 있다.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빛나는 다갈색 면발은 딱히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목구멍으로 스르르 넘어간다. 그러는 동안 혀 위에 길게 남는 달콤한 감칠맛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지루할만하면 씹히는 양파는 상큼하고 묵직한 돼지고기는 고소하다. 분명 이 음식 짜장면은 한국인에게 주어진 거대한 축복이라고 봉구는 생각했다.




일의 시작은 얼마 전 백화점에서였다. 당시 현경과 학규는 한창 신혼집을 준비하느라 바빴는데, 레스토랑을 비울 수 없는 학규를 대신해 지연과 봉구가 함께 가구를 보러 다니곤 했다. 거의 모든 돈을 20평 대 구축 아파트를 얻는 데에 썼기 때문에 가구에 들일 예산은 넉넉지 않았다. 대부분은 이케아에서 골라야 했지만 그래도 새 집을 꾸미는 재미는 쏠쏠해서 현경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런 현경을 보는 지연 역시 덩달아 신이 났다. 하지만 오늘 바로 이 백화점에서 지연과 현경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갈등의 골을 깊이깊이 파고 있었다.


“언니, 저 이건 진짜 못 받아요. 저도 염치가 있죠.”

“결혼 선물 받는데 염치가 왜 필요해. 언니가 동생 침대 하나 사주겠다는데.”


다른 건 몰라도 침대만큼은 좋은 걸 써야 한다고 지연이 부득부득 우기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연은 그 침대를 결혼 선물로 사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현경은 차마 그것까지 받을 수는 없다면서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언니가 동생 시집보내면서 해주는 혼수라고 생각해.”

“그래도 이건 너무 과해요. 정 그러시면 이케아에서 하나 사 주세요.”

“우리도 그렇고 침대는 오래 쓴다니까? 그러니까 괜찮은 거 사야 한다고.”

“그건 제가 능력이 됐을 때 얘기죠. 제 능력은 이케아예요.”

“그러니까 내가 선물로 해주고 싶다고.”

“이미 많이 받았잖아요.”

“하나 더 받는다고 달라질 거 없어. 살면서 갚아.”

“저 부담스러워요. 지금까지 너무 받기만 해서.”

“그럼 우리 서린이 선생님이니까 받아. 우리 서린이 작년 내내 잘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혹시 문제가 될 것 같으면 김영란 법으로 신고하세요.”


그렇게 두 사람은 백화점 7층 침대 매장 앞에서 한참 실랑이를 했다. 이 두 여자의 기세가 어찌나 강했던지, 강남 사모님들을 오래 상대해 왔던 매장 직원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당연히 봉구도 끼어들지 못하고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때 구원의 전화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구 서방, 어딘가?”

“지금 저희 백화점에 와 있습니다.”

“그래? 그럼 쇼핑 마치고 우리 집에 좀 들르게.”

“네. 그런데.. 조금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왜? 무슨 일 있어?”


그 말에 봉구는 지금 상황을 대략적으로 전달했다.


“마침 잘 됐네. 현경 처자도 같이 좀 오라고 해. 거기서 그러지 말고 둘 다 데려와.”


봉구는 얼른 그 말을 지연에게 전했다.


“지연 씨! 장모님이 오래!!!”

“엄마가? 왜?”

“몰라. 현경아, 너도.”

“나? 나는 왜?”


그렇게 지연과 현경의 신경전은 잠시 휴전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휴전상태여서 장모님 집에 가는 내내 차 안 분위기는 좀처럼 데워지질 않았다. 봉구의 마음도 서서히 불안해졌다. 이대로 장모님 댁에 가도 괜찮은 걸까.


“어서 오게나.”

“장인어른 계셨습니까.”

“아빠가 웬일로 집에 계세요?”


집에 들어가니 달콤한 냄새가 났다.


“빵 냄샌데? 아빠, 빵 구워요?”

“응. 내가 요새 빵을 굽는다.”


장인어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얼마 전에 너희 엄마랑 백화점 카스텔라를 먹으러 갔는데 엄마가 그게 너무 달다면서 조금만 덜 달았으면 좋겠다잖아. 그래서 한 번 해봤지. 그랬더니 맛이 괜찮은 거야. 그때부터 유튜브 보고 책 보면서 하나씩 만들어 보고 있어. 너희들도 한 번 먹어봐라.”

“그럼 구 서방이랑 우리 서린이는 빵 먹고 지연이랑 현경 처자는 잠깐 들어와 볼래요?”


눈이 동그래진 현경이 봉구와 지연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자 지연이 현경의 손을 잡고는 장모님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이거 좀 가져가.”


거기에는 얼마 전 봉구가 싹 정리해 놓은 수납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간 사 모은 명품 가방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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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이 아까운 걸 왜 가져가래?”


지연이 놀라 물었다.


“아까우니까 너 주는 거지. 안 아까우면 내다 팔았지. 원래 이런 건 딸 물려주고 손녀 물려주는 거라며. 그러니까 좀 가져가. 나는 보기만 해도 정신이 없어.”

“정신이 왜 없어. 이렇게 예쁜 걸.”

“아우 몰라. 젤 아래쪽에 있는 거 두 개만 빼고 그냥 다 가져가. 현경 처자, 어서 골라 봐요. 내 결혼 선물이다, 생각하고.”


그 말에 현경은 당황했다.


“아니에요. 이 비싼 걸 제가 어떻게. 언니 주세요. 언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현경이 몸을 돌려 거실로 나가려는 순간, 현주가 끄응, 일어나 수납장을 열었다.


“그러면 내가 골라줄게요. 이거랑, 이거랑, 이거가 현경 처자한테 잘 어울리겠네. 현경 처자는 참하게 생겨서 이렇게 톤 다운된 컬러가 좋아. 지연아 너는 이거랑 저거랑 요거 해라. 너는 좀 튀는 걸 들어야 돼.”

“아싸~! 고마워, 엄마. 내가 잘 쓰고 우리 서린이 물려줄게.”


하지만 현경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현주가 구석에 넣어두었던 종이 가방에 하나씩 담으며 말했다.


“사람이 말이에요, 내가 살아보니까 말이에요, 줄 때가 있고 받을 때가 있고 그래요. 그리고 이상하게 나한테 자꾸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한테 자꾸 받아가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현경 처자, 지금은 받을 때인가 보다, 생각하고 받아요. 잘 받아야, 또 잘 주는 사람이 됩니다.”


그 말에 현경은, 눈앞에 있는 현주가 한때 선생님이었다는 지연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어떤 선생님이었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까칠한 말을 쏟아내던 현주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주 오랫동안 읽어온, 몇 번을 반복해서 읽어도 좋은 그런 책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현경은 차마 가방을 뿌리 칠 수가 없었다.

“어머님.. 제가 참.. 복이 많은가 봐요. 이렇게 좋은 걸...”

“복은 내가 많지. 이렇게 좋은 걸 써보기도 하고, 나눌 수도 있으니까.”


현주는 그렇게 말하고는 먼저 거실로 나갔다. 열린 문으로 봉구와 서린이, 민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지연과 현경도 거실로 나왔다. 식탁에는 민수가 만든 치아바타가 올라와 있었다.


“여보, 구 서방한테 부탁했어요?”

“응. 와 주기로 했어.”


그 말에 지연의 눈이 얇아졌다.


“또 왜. 우리 봉구 씨 왜?”

“저 침대 치우려고.”

“침대? 저거 산 지 얼마 안 됐잖아요. 또 바꿔?”

“그게 아니라...”


이상하게도 민수와 현주가 그 뒷말을 잇지 못한다. 심지어 얼굴이 조금 빨개지는 것 같기도 했다. 눈치를 챈 지연이 가방에서 패드를 꺼내 서린이에게 주었다.


“서린아. 저기 할아버지 방 가서 이거하고 놀고 있을래?”

“응!”


서린이가 방으로 들어가자 지연이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침대가 갑자기 왜 마음에 안 드는데~?”

“우리 합방했다.”

“어휴, 당신은 무슨 말을 그렇게. 애들 오해하겠네. 민망해라.”


부끄러워하는 민수와 현주를 보며 봉구는 잠시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게 뭐 민망해요. 그간 각 방 쓰신 게 이상했지. 난 황혼이혼 하려나 했는데, 다행이네요.”


최근 여러 일로 사이가 좋아지면서 현주와 민수는 합방을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지연이 결혼을 하고 나서부터 쭉 각방을 썼던 지라 한 침대에 누우니 영 잠이 안 오더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 뒤척이면 한 사람이 깨고, 이 사람이 뒤척이면 저 사람이 깨는 식이었다.


“그래서 요새 TV에 나오는 그거 있잖아. 한 침댄데 매트리스 두 개 있고, 등도 이렇게 세워지는 거. 그거 샀어. 그런데 기사가 침대 치울 사람 한 명 더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구 서방한테 부탁한 거야.”


그 순간이었다.


“어머님, 그럼 저 침대 저 주세요!”


현경이 불쑥 말했다. 그 기세에 지연도 잠깐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 현경이네 주면 되겠네. 저거 좋은 거잖아.”

“그럼. 고민 많이 하고 산 거야. 나야 현경 처자가 가져가주면 고마운데 신혼 가구가 헌 거라서 어떻게 해.”

“전 좋아요. 너무 좋아요.”

“그래. 원래 시작은 그렇게 하는 거야. 우리도 결혼할 때 이불 한 채 가지고 시작했어.”


그렇게 지연과 현경을 두루 괴롭히던 침대 문제도 깔끔하게 해결됐다. 지연은 침대를 운반하는 비용을 내주는 것으로 선물을 대신하기로 했다. 그제야 현경의 얼굴이 이전처럼 환해졌다.




그 후 한 달쯤 후에 학규와 현경은 새 집으로 이사를 했다. 두 사람 모두 짐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새로 사거나 구한 가구들은 이미 날짜를 맞춰 배송을 해두었기 때문에 이삿짐은 학규와 봉구가 옮기기로 했다. 그 사이 현경은 부지런히 청소를 하고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시쯤, 현경이 말했다.


“짜장면 시켜 먹자!”


그리하여 지금 봉구는 이사하는 집 바닥에 신문지를 깔아 놓고서 짜장면을 먹고 있는 것이다. 다들 말이 없었다. 조용한 집에는 후루룩 짜장면을 먹는 소리만 들려왔다. 짜장면은 정말이지 독보적인 음식이다. 젓가락을 멈출 수 없는 맛. 이제는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데도, 먹을 때마다 탐닉하게 되는 맛. 계속해서 흡입하게 되는 맛.


“진짜 맛있다. 오빠, 이탈리안 말고 중식당 할 생각 없어?”

“나도 오늘 처음으로 고민했잖아. 중식을 배워볼까, 하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그렇게 실없는 소리를 하던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어.”


현경이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걸 다 누릴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닌데. 이러다 갑자기...”


지금 현경이 어린 날 마지막으로 부모를 보았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봉구는 알 수 있었다. 자신도 지연을 만나 결혼을 하면서 매 순간 느꼈던 감정이었다. 이러다 갑자기 또다시 내가 남게 되는 건 아닐까. 이 행복이 사실은 다 거짓인 건 아닐까. 그런 불행의 습관 같은 것이 봉구에게도 있었다.


“아이 태어나면 더 해.”


봉구가 말하자 현경과 학규가 일어나 봉구를 쳐다보았다. 놀라고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내가 서린이를 키울 자격이 있나, 매 번 생각했어.”

“야, 네가 어디가 어때서! 부군초중고 전교 1등에 빛나는 구봉구가 어때서?”


학규는 화를 내듯 큰 소리로 말했지만, 세 사람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건 전교 1등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실력 있는 이탈리안 셰프가 되고, 인정받는 유치원 교사가 되어도 해결할 수 없는 불안감이라는 것을. 이런 이야기는 늘 자신감에 넘치는 지연이 있을 때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마 현경에게도 그런 습관이 남아서, 자신은 어쩌면 영원히 불행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침대를 사준다는 지연의 호의를 물리쳐야 했을 것이다. 봉구는 그 마음을 알면서도 어쩌질 못했다. 지연 역시 외로움에 사무쳐 자라서 현경에게 뭐라도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땐 짜장면 한 그릇도 먹기 힘들었는데.”

“맞아. 졸업식 하던 날에만 원장님이 사주셨잖아.”

“짜장면은 주방에서 만들기 힘든 음식이니까.”


학규의 말에 봉구가 일어서며 되물었다.


“그런가? 짜장면은 집 주방에서 만들기 어려운가?”

“그럼. 불이 세야 하니까. 우리 보육원 주방도 불이 센 편은 아니었지.”


봉구의 생각이 복잡해졌다. 그렇다면 그때 우리가 짜장면을 못 먹은 이유는...


“돈 문제가 아니었네.”

“그렇지. 우리도 외식은 꽤 했어. 다만 동생들이 피자나 스파게티를 좋아해서 중국집 대신 패밀리 레스토랑에 간 거지.”

“게다가 짜장면은 주방에서 만들기도 힘들고.”

“뭐야. 괜히 짜장면에 울컥했네.”

“그러고 보면 우리 딱히 불행했던 것 같지는 않아, 안 그래?”


학규가 다시 드러누우며 말했다.


“비록 부모는 없었지만 좋은 원장님 계셨고, 나랑 봉구랑 현경이도 있었고. 사실 부모가 있어도 없는 것보다 못한 사람도 많고, 평생 친구 하나 없이 사는 사람도 많잖아.”

“하긴. 나는 학규 오빠 하나면 충분해.”


현경이 학규의 옆구리를 파고들며 말했다. 봉구는 문득 지연 생각이 났다.


“지연 씨는 가끔 내가 생선살을 발라주면 눈물이 그렁그렁 해.”

“언니가? 왜?”

“어릴 때 생선을 못 먹어봤대. 장인 장모님께서 많이 바쁘셨으니까 집에서 밥을 거의 못 해 주셨나 봐.”

“와. 천하의 지연 언니도 못 가진 게 있구나. 나는 생선 참 많이 먹었는데.”

“우리 주방 실장님이 고등어 하나는 끝내주게 구웠지.”

“맞아.”


한참을 드러누워 있다가 가물가물 잠이 올 때쯤 학규가 벌떡 일어났다.


“야, 그릇 치워. 얼른 끝내자. 나 저녁에는 식당 열어야 돼.”


바닥까지 싹싹 비운 세 개의 짜장면 그릇을 보면서 봉구는 생각했다. 인생은 짜장면의 맛이 분명하다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삶의 의미는 달라진다. 어릴 때 아쉬움 가득했던 짜장면 한 그릇은 이제 어른이 되어 언제든지 사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먹을 때마다 알 수 없는 그리움과 애틋함이 밀려오지만, 조금씩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 봉구에게 있어 짜장면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 결혼을 앞두고 있는 현경과 학규의 새 집에서 먹었던 이 짜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게 봉구의 기억은 새롭게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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