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몰럭셔리란 할부를 스몰하게 쪼개서 사는 물건이다.
얼마 전 딸 아이와 친한 동생이 놀러왔다. 놀이터에서 몇 번 본 적은 있었지만 집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현관을 들어와 거실을 거쳐 아이 방에 가는 동안 꼬마 손님의 눈이 바쁘게 굴러간다. 마지막으로 주방을 슬쩍 보더니 아이가 이렇게 외쳤다.
“우와, 언니네 집에 비싼 거 디게 많다!”
순간 두 손을 내저으며 아니라고 말할까 하다가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그 집이나 우리나 사는 형편이 뻔하다. 매년 오르는 학원비 걱정하면서도 일 년에 두어 번씩 여행을 다니고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외식을 하면서 산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정이다.
아이 방에 귤과 과자를 넣어주고 거실에 앉았다. 나도 꼬마 손님의 시선을 따라 우리 집을 둘러본다. 뭐가 그리 비싸 보였을까. 그 집이나 우리 집이나 구조는 똑같다. 현관에 들어오자마자 정면으로 TV가 보이고, 그 맞은편에 소파가 있다. 오른쪽으로 작은 방과 주방, 아이방이 차례로 이어진다.
이 아파트는 지어진지 30년이 됐다. 2005년에 시부모님께서 들어오시면서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했으나 그조차도 20년 전 일이다. 마룻바닥도, 주방 싱크대와 수납장도 20년 묵었다. 문틀은 때가 타서 까맣다. 이리보고 저리 봐도 부잣집은 아니다.
다만 다른 집들과는 구성이 아주 살짝 다르다. TV 양 옆에는 아이 키보다 살짝 작은 스피커가 서 있고 TV장에는 엠프와 CD 플레이어가, 그 옆에는 LP 플레이어가 있다. 거실에는 커다란 소파 대신 1인용 소파가 두 개, 2인용 소파가 하나 있으며, 밥도 먹고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는 테이블이 있다. 그 뒤로 책이 빼곡히 꽂힌 아이 키만한 책장이 있다.
어쩌면 주방 풍경도 조금 생경할 수 있다. 보통의 집이라면 보는 사람의 시선 끝에 가스레인지나 인덕션이 맺혔겠으나, 우리 집은 아일랜드 식탁 위 커피 머신이 시선을 막아선다. 아이는 여기서 ‘우와’를 외쳤다. 아마 커피머신이 다른 집에서 보던 것과는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우리집에도 한 때는 국민 커피머신이라고 할 만한 캡슐 커피머신이 하나 있었다. 아니, 두 개 있었다. 처음 캡슐 커피머신이 나왔을 때 돌체구스토 머신을 사서 한참을 잘 먹었다. 그러다 좀 더 전문적인 느낌이 나는(?) 네스프레소로 갈아탔다. 거기서 끝나면 좋았으련만 자꾸 욕심이 났다. 심심풀이로 에스프레소 머신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50만원 정도면 괜찮은 걸 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만 거기에는 우유 스팀 기능이 없었다. 없으면 아쉬우니까 스팀 기능을 더하고 거기에 압력 게이지 창까지 포함하고 나니 가격이 200만원에 닿았다. 포기하려던 찰나, 국내 브랜드가 눈에 들어왔고 130만원에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이 남편이 커피 머신을 사게 된 경위다.
우리 집에서 ‘좋아 보이는’ 대부분의 물건은 남편이 이런 식으로 산 것들이다. 처음 시작은 동료가 스피커를 샀다는 소식이었다. 얼마 뒤 남편의 유튜브 알고리즘은 모두 스피커로 도배되어 있었고, 자꾸 어딜 가자는 말도 늘었다. 따라 가보면 중고 스피커를 파는 전파상이거나, 음악 감상실, 또는 음향을 잘 갖춰 놓은 카페다. 가고 오는 길에는 남편의 스피커 강의가 길게 이어진다. 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데도 ‘그렇구나.’, ‘아 진짜?’ 라고 반응해준다.
그렇게 80만 원짜리 스피커도 생겼다. 커피머신을 사면서 글라인더를 샀던 것처럼 남편은 스피커를 사면서 엠프와 CD 플레이어를 샀고 1년 쯤 지난 후에 LP플레이어를 샀다. 그러는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아 진짜? 밖에 없다.
남편은 물건에 관심이 많다. 물욕은 없는데 가끔 꽂히면 1년이고 2년이고 그 물건만 찾아다닌다. 2년 전에는 소파에 꽂혔다. 당시 우리 집에는 흔하디흔한 4인용 가죽 소파가 있었는데 다리가 짧은 나는 그 소파가 영 불편했다. 거기에 앉아 TV를 보면 다리가 바닥에 닿질 않아 자꾸 눕고 싶었다. 이 소파 때문에 게을러지는 것 같다고 말했더니 남편이 가리모쿠라는 소파를 보여줬다. 이게 일본 브랜든데, 아시아인들 체형에 딱 맞대. 내가 말했다. 아 진짜?
어느 일요일 우리는 파주에 갔고 그곳에서 남편은 가리모쿠 소파를 두 개 주문했다. 가격은 150만원. 이때 나는 처음으로 ‘아 진짜’말고 다른 말을 했다. 대체 돈이 어디서 나는 거야? 혹시 보너스 받은 거 감춰두니?
가난한 우리는 결혼할 때부터 용돈제를 채택했다. 매달 월급이 들어오면 각자 용돈을 받는다. 그 안에서 각자 통신비도 내고, 옷도 사고, 친구들 만나서 밥도 사먹는다. 용돈은 꼴랑(?) 35만원. 나는 매달 남김없이 쓴다. 책 좀 사보고 OTT 구독료 내고 화장품도 사야 한다. 10만원이 넘는 신발은 3개월 전부터 계획을 해두어야 한다. 파마는 일 년에 한 번만 하고 운동도 돈 안 드는 러닝을 한다.
그런데 남편은 130만 원짜리 커피 머신에 80만 원짜리 스피커, 그리고 150만 원짜리 소파를 산다. 대체 어떻게 가능한 거지? 남편의 답은 심플했다.
“할부가 있잖아.”
시계태엽을 거꾸로 돌렸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남편은 TV를 할부로 샀다. 내가 TV에 절대로 돈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자기 돈으로 사겠다고 한 것이다. 그때도 나는 ‘아 진짜?’라고 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TV가 새로 생겼고 남편은 24개월 동안 성실하게 할부를 갚았다. 그렇게 가난한 남편은 비싼 물건을 손에 넣는 방법을 터득했다.
커피 머신은 10개월 할부였고 가리모쿠 소파는 6개월 할부였다. 하나의 할부가 끝나면(그맘때쯤 남편이 가장 신나 보인다.) 다음 할부를 결제한다. 잘 쪼개면 크게 부담가지 않는 선에서 물건을 살 수 있다.
그 사이 우리 집은 나와 남편의 취향을 담아 변해갔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오면 가장 먼저 라디오를 켠다. 스피커를 통해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온다. 식사 후에는 커피를 진하게 내려 마시며 아이의 늦은 식사를 기다린다. 저녁에는 다리가 잘 닿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아이는 옆에서 문제집을 풀거나 그림을 그린다. 이때는 남편이 음악을 선곡한다.
나는 이사를 참 많이 다녔다. 비닐하우스에도 살아봤고 아주 좁은 다세대 주택에도 살아봤다. 그 중 지금 이 집이 내가 산 곳 중에서 가장 좋은 집이고, 가장 오랫동안 머문 집이다. 시부모님께서 빌려주신 집에 얹혀살고 있는 형편이지만, 이곳에 살면서 나는 내 삶에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에게도 취향이 있다는 것이 좋았고 그 취향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도 좋았다.
정확히 말하면 현실화 단계는 전적으로 남편의 몫이지만, 나의 ‘아 진짜?’도 약간의 지분은 있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나의 공감을 먹고 의욕을 키워나가는 존재다. 그래도 저 세 글자로 날로 먹기엔 미안해서 나도 한 번 해봤다. 6개월 할부. 내가 책을 읽고 아이가 문제집을 푸는 그 테이블은 내가 산거다. 움화화. 우리는 이렇게 스몰하게 카드 값을 쪼개 나름대로 럭셔리하게 산다.
요새 남편은 조명에 빠졌다. 그리하여 나는 어제 이케아에 끌려 갔다 왔다. 거기서 나도 힐끔 힐끔 책장을 훔쳐봤다. 우리의 다음 스몰럭셔리를 기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