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야 렌은 똑단발에 안경을 쓴 야심 찬 비즈니스 우먼이다. (비트코인과 주식, 부동산의 시대에 회사원과 야심이란 어쩐지 안 어울리는 조합 같지만 2010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니 이해해 보자.)
그녀는 재혼한 아버지가 대표이사로 있는 대기업의 지원부서에서 일하지만, 낙하산이란 오해를 받고 싶진 않아 열심히 일한다. 그러다 러시아에 있는 자회사의 내부 회계감사를 위한 장기 파견 출장의 기회가 오자 요리와 재즈 음악을 좋아하는 약혼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냉큼 짐을 꾸린다. 어떤 험난한 미래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오디오북과 포켓판 표지에 나타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야경 레이야의 여정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기차 안에선 누군가가 건넨 홍차를 마시다 여권을 빼앗긴다. (십여 년 전 육로로 러시아 국경을 통과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황망함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자회사의 직원들은 어딘지 켕기는 구석이 있는 듯 레이야의 개입을 반기지 않는다. 법인 변호사는 자취를 감추었고 그의 행방을 쫓던 레이야는 급기야 대낮에 러시아 정교회 성당에서 괴한에게 납치되기까지 한다. 실은 이 부분이 소설의 도입부다.
이 책을 읽는 재미로는 '비즈니스계의 브리짓 존스'를 표방하는 레이야의 구남친을 비롯한 남자들과의 달콤 살벌한 로맨스도 빼놓을 수 없다. 과연 범인은 운전기사? 법인장? 외국인 직원? 인사총무 담당자? 구남친? 혹은 약혼자나 아빠일까? 세르게이, 드미트리, 타티아나, 다리아 등등 도스토예프스키와 푸쉬킨의 러시아 고전들로 낯익은 러시아 이름들이 의심의 꼬리에 꼬리를 물게 하는 가운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명한 관광 코스이기도 한 지붕 위 풍경, 미스터리한 극장 뒤편의 비밀 공간도 즐길 거리로 등장한다.
작가 소개
Anniina Tarasova(1985~)
러시아 혁명기에 핀란드로 이주한 이민자의 후손이다. 투르쿠 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알토 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교환학생과 인턴으로 머문 적이 있다. "러시아 장부"의 말미엔 후속편이 나올 것이 암시되는데, 2020년엔 러시아와 유럽인들이 즐겨찾는 휴양지인 키프로스로 지리적 반경을 넓힌 "Kuoleman kuliissit"(The Fatal Kuliches)를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