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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미 May 17. 2024

流: 눈 깜짝할 사이

: 어느새 할머니 

호무라 히로시 글, 사카이 고마코 그림, 엄혜숙 옮김,『눈 깜짝할 사이』(길벗스쿨, 2018)




동그란 이마가 야무지게 느껴지는 한 소녀가 두 눈을 감고 있다. 소녀의 분홍 입술이 가지런하고, 갈래머리가 단정하게 느껴진다. 유화로 그린 듯한 눈을 감고 있는 소녀의 얼굴 모습에서 차분함이 느껴진다.



앞의 표지를 넘기면, 눈을 감은 소녀의 얼굴이 스케치되어 있다. 유독 감은 눈에 눈길이 간다. 반면, 뒤의 표지를 넘기면, 눈을 뜬 소녀의 얼굴이 스케치되어 있다. 앞에 그려진 눈을 감은 소녀가 눈을 뜨고 있다. 연필로 슥슥 그린 듯한 그녀의 눈동자는 슬퍼 보이기도 하고,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이를 가늠하기는 어려운데 아이처럼 해맑은 눈동자는 아니다.



이 그림책은 한쪽 면에는 글자가 쓰여 있고, 다른 한쪽 면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 그림은 같은 상황 속의 모습 3개가 연속적으로 그려져 있다. 두 장의 그림은 거의 똑같이 그려져 있고, 마지막 세 번째 그림은 앞의 두 그림에서 이어지는 큰 움직임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림책을 넘기면서 앞의 두 개의 그림은 똑같은 것인지 아니면 이 3장을 빠르게 넘기면 만화처럼 움직임이 느껴지는 것인가 싶어서 책장을 재빨리 넘겨보았다. 그런데 그 앞의 두 장의 그림이 똑같다고 생각되리만큼 빨리 넘겨서는 두 장의 그림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자세히 봐야 그 미세한 차이가 느껴진다.  



글자는 아주 간결한 의태어 혹은 의성어만 쓰여 있다.  ‘사뿐, 째깍, 앗, 퐁-, 갈래머리 여자아이’라는 문자가 전부이다. 그 간결한 말속에서도 상황이 그려지고, 눈을 감았다 뜬 그 찰나의 시간이 느껴져 의미 있게 다가왔다.



꽃에 앉아 있던 나비가 날아가고, 뻐꾸기시계에서 시간을 알려주는 뻐꾸기가 나오고, 쥐를 바라만 보고 있던 고양이가 쥐를 잡고, 홍차에 빠진 각설탕이 비로소 녹는다. 



눈이 깜짝할 사이에 모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내 눈을 한 번 깜빡이는 동안에 나비가 떠나고,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고, 고양이가 사냥을 하고, 홍차가 제 맛을 찾는다.



그래서 각설탕이 녹은 홍차를 바라보는 소녀의 그림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 세 번째 장에서 소녀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 소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무슨 행동을 할까?



눈 깜짝할 사이에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아마도 소녀는 그 홍차를 마시고 있거나 빈 홍차 잔을 앞에 두고 있지는 않을까?’라고 상상했다. 두 장의 그림에 익숙해지면서 리듬을 타듯이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세 번째 그림을 상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소녀의 마지막 그림은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고, 한 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곳에는 내가 예상했던 소녀가 없었다. 



갈래머리를 땋아 파란 머리 끈으로 묶은 할머니만 있었다. 이 할머니 역시 소녀처럼 홍차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 할머니는 소녀처럼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불그스름한 볼빛에 입술도 불그스름했다. 새초롬하니 두 눈을 감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소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처음에는 소녀가 마법에 걸려 갑자기 할머니가 된 것 같았다. 자꾸 보다 보니 단지 한 장의 그림이었지만 소녀에서 할머니가 된 그녀의 세월이 점차 느껴졌다. 그녀의 짙은 인생의 시간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는 시간은 매우 짧다. 그 짧은 순간은 쌓이고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나의 10대는 눈을 감았다 뜨면 중간고사가 지났고, 기말고사가 지났고, 그 사이에 소풍도 있고, 친구들과의 수다도 있었다. 20대는 눈을 감았다 뜨니 학업을 마쳤고, 직장생활을 했고, 그 사이에 연애도 했고, 친구들과의 여행도 있었다. 30대에는 눈을 감았다 뜨니, 결혼을 했고, 아이가 생겼고, 그 사이에 친구들의 결혼식이 있었고, 나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40대에 나는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고, 아이의 사춘기도 맞았고, 남편의 직장생활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수록 인생은 점차 단조로워지면서도 불안정해지는 것 같은데, 눈을 감았다 뜨는 속도에는 가속이 붙고 있는 것 같다. 내 삶에서 가족들에게 많은 자리를 내어주어 내 자리가 작아지고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에 불안해하기도 하는 것 같다. 내 인생의 무게 중심이 나에서 가족에게로 옮겨지면서 허우적거리다 보니 눈을 뜨면 훅 늙은 나만 남아 있을 것 같은 두려움도 있다. 젊은 시절이 모두 꿈같이 느껴지면서 말이다.



그래서 지금 바로 이 순간의 행복을 누릴 줄 알아야 될 것 같다. 그것을 내가 더 젊었을 때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 이 순간이 쌓이면 나는 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유화로 그려진 늙은 할머니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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