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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미 May 31. 2024

休: 일단 일상에서 나가보자!

: 현재를 위한 에너지 충전과 미래의 나를 위로할 기억

김중석, 『나오니까 좋다』(사계절, 2018)




할 일이 태산인데도 불구하고, 그 일들을 모두 외면하고 무작정 짐을 챙겨 떠나 본 일이 있는가?



짐을 싸면서도 여행에 대한 설렘보다는 남겨둔 일에 대한 걱정이 앞서지만, 당장이라도 짐을 다시 푸를 만한 이유도 딱히 없어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여행이라는 것이 커다란 목적을 가져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조차 괜히 여행을 떠나왔다고 후회하기는 쉽지 않다. 여행은 언제나 옳기 때문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위안, 평화, 만족이라는 감정을 여행에서 만나면, 즐겁게 여행을 준비하지 못했던 것이 민망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문밖에 나오기 전에 준비하는 번거로움과 돌아왔을 때 여전히 쌓여있는 해야 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여행으로 떠나 있는 그 순간에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짐을 한가득 실은 작은 자동차 한 대가 푸른 숲 속 길을 뒤뚱거리며 지나가고 있다. 그 차에는 차창 밖으로 내민 손끝으로 숲의 공기를 느끼고 있는 고릴라가 있고, 그 뒷자리에 이 세상의 불만을 모두 품은 듯한 고슴도치가 앉아 있다.



투덜거리는 고슴도치의 음성이 고릴라의 귀에는 들리지 않아 보는 것 같다. 같은 공간에 있는 이 둘의 모습이 너무 다르다.



고릴라는 좋은 날씨가 아까워 고슴도치를 끌고 캠핑을 떠났다. 내일까지 끝내야 하는 일이 있었던 고슴도치는 여행이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바람을 쐬고 와서 일하면 일이 더 잘 될 거라는 고릴라의 말에 고슴도치는 여행을 통해 자신에게 새로운 에너지가 생겨서 남은 일을 좀 더 수월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다. 고릴라의 말이 고슴도치의 뾰족한 생각을 비집고 들어 마음의 여유라는 틈을 만들어 고릴라와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고릴라와 고슴도치가 함께 떠나는 여행에 대해 이들은 다르게 생각했다.      



고릴라는 여행을 철저하게 준비하지는 못했다. 날씨가 좋다는 이유만으로도 캠핑 갈 이유는 충분했던 고릴라에게는 짐을 싸서 떠나는 그 여정 자체로도 이미 여행이 시작되었다. 고릴라는 캠핑장을 간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여행의 설렘과 즐거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반면, 고릴라가 운전하는 답답한 차를 탄 순간부터 고슴도치의 여행에 대한 기대는 사라졌다. 고슴도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고슴도치는 자신의 지친 일상의 에너지를 새로운 환경 속에서 환기를 시키고, 다시 충전해 오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캠핑장에 도착해서부터가 여행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캠핑장에 가는 그 길에서 만나는 자신을 지치게 만드는 것들을 자신의 희생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고릴라와 고슴도치가 캠핑장에 도착했을 때, 이들을 품어 줄 푸른 숲에는 뱀과 새만 있었다. 이들을 위한 파티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고릴라와 고슴도치가 잘 곳도 먹을 것도 이들이 모두 만들어 내야 했다. 고릴라와 고슴도치는 함께 텐트를 치고, 카레를 만들었다.



숲에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가 되어서야 이들은 비로소 숲 속에 앉아 마시는 차 한 잔의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나오니까 좋다’라는 말이 고슴도치의 음성을 타고 숲에 흘러 들어갔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한 시간과 낯선 공간 속에서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일은 자신의 머릿속에 숨 쉴 공간 하나를 만들어 주었다. 빽빽하게 들어차 있던 일에 대한 버거운 생각들이 자신을 짓누르는 것이 자연 속에서는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자신에게만 꽂혀 있던 그 시선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으로 옮겨졌다. 고슴도치는 고릴라뿐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뱀, 꽃에게도 인사를 했다. 고릴라와 고슴도치는 다시 숲에 오겠다는 약속을 그들에게 하면서 다시 일상으로 또 다른 여행을 떠나왔다.   



이러한 고릴라와 고슴도치의 모습은 낯설지가 않다. 자신이 하고 싶으면 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제대로 하는 일은 없는 것 같은 고릴라와 해야 하는 일만을 고집하며 온갖 투덜거리면서 단념하고 돌아서지도 못하는 고슴도치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자신이 고릴라라면, 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고슴도치가 답답하면서도 자신의 부족한 면을 도와주는 고슴도치가 고마울 것이고, 자신이 고슴도치라면,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많은 일을 만드는 고릴라가 짜증이 나면서도 자신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고릴라가 고마울 것이다.



결국 이들은 서로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자연이 주는 여유를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오니까 좋았겠지만, 이것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좋은 것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다시 일상을 살아낼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그림책의 푸른 숲은 물리적인 장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지친 자신의 일상에 위안이 되어주는 공간일 것이다. 그것은 자연일 수도 있고, 새로운 일일 수도 있고, 가족이나 친구 같은 사람일 수도 있다.



자신의 일상이 벅차게 느껴질 때면, 자신의 틀에서 한 번 빠져나와 보는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할 것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마음에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에너지가 싹트기 시작할 것이다. 혹시라도 여행에서 돌아와서 아무런 변화를 느끼지 못해도 괜찮다. 그 시간은 추억을 남겨주었을 것이다. 지금이 아니라 미래에 힘든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소중한 기억을 가지게 된 것이다. 지금 드러나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친구와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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