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아줄 기대를 하지 않음!
2010년 7월 9일, 오후 5시 55분.
나는 엄마가 되었고,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는 남들보다 결혼도 늦었는데, 결혼한 지 3년이 되어서야 아이가 생겼다. 그래서 늦은 나이에 아빠가 되었고, 도미노처럼 할아버지도 늦게 되셨다.
첫 손자를 만난다는 기대에 찬 우리 아버지는 손자를 만나기 위해 담배를 먼저 끊었다. 아버지가 군대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담배를 피우지 않으셨는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담배는 사회생활의 필수품이었나 보다.
아버지는 족히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담배를 피웠을 것이다. 그것을 아버지는 손자를 품에 안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멈추었다고 했다. 아이에게 담배 냄새를 맡게 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 하나로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고 싶은 마음을 참아냈다.
담배는 생각보다 끈질긴 놈이었다. 담배 끊은 지 10년이 지났을 때까지도 스치듯이 우연히 담배 냄새를 맡으면 흡연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고 한다. 택시 기사님의 담배 냄새가 황홀하게 느껴지며, 담배 딱 한 대만 태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아버지 말이 떠오른다. 16년 정도가 지난 오늘에야 비로소 담배 냄새가 역겹다고 했다.
손자를 만나기 위해서 아버지는 금연가가 되었고, 손자를 위해 매달 저금을 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아이가 백일이 되었을 때, 나에게 아이 통장을 하나 만들어 오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매달 손자 통장에 돈을 넣으러 직접 은행 창구에 갔다. 매달 같은 날 저금을 하러 오는 할아버지를 은행 사람들은 중절모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버지가 은행 업무를 보러 은행에 간다는 사실이 내게는 새로웠다. 아버지는 사업을 하면서 아버지 손으로 서류를 뗀다거나 은행 업무를 직접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지시만 내리던 사람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이 아버지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닿았다. 아버지의 제2막이 오른 느낌이었다.
아버지는 매달 10일이면 그 통장에 한 달에 2만 원씩 넣으셨다. 대학 등록금이라는 명목이었다. 아이가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 내는 그 학비를 자신이 내주고 싶다고 하셨다. 한 달에 2만 원이면, 1년이면 24만 원, 10년이면 240만 원, 20년이면 480만 원이다. 20년이 걸려야 아이의 대학 등록금이 만들어질 것이다.
아버지가 일흔다섯이 넘으면서 아버지는 2만 원씩 넣던 것을 3만 원씩 넣으셨다. 그쯤 남동생이 딸을 낳았다. 아버지가 손녀에게도 입금을 시작하면서 아이에게 입금되어야 하는 금액을 다시 계산을 하신 것 같다. 아마도 그 계산은 아버지 자신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10여 년 전만 해도 손자가 결혼하는 것까지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70대 중반을 지나면서 꺾이기 시작한 것 같다.
아버지는 통장을 다 차면, 나아가 통장을 새로 만들어 오라고 하셨다. 나는 그것이 귀찮았다. 나에게는 급하지도 않은 일이고, 큰돈이 들어가는 일도 아니었다. 새 통장을 만들어 갈 때까지 전화로 재촉하는 아버지가 그저 야속하기만 했다.
그리고 나는 2만 원, 3만 원의 적은 돈인 것이 아쉽기만 했다. 한 달에 10만 원, 20만 원씩 넣으면 금방 목돈이 될 텐데 굳이 적은 돈을 넣는다는 것이 답답했다. 게다가 적금이나 예금으로 넣어서 이자라도 좀 더 붙게 했으면 좋겠는데, 아버지는 굳이 매달 저금만 하시는 것이 이해도 되지 않았다.
한 번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아버지가 아이를 위해 저금을 해 주신다는 말을 했는데, 친구가 우리 아이는 큰 목돈을 받겠다고 말하며 부러운 마음을 비쳤다. 그 친구가 ‘그럼, 한 달에 얼마씩 넣으셔?’라고 묻는데 나는 못 들은 척했다. 한 달에 2, 3만 원씩 넣는다고 민망해서 말하지 못했다. 1년, 2년, 3년... 10년.. 20년... 그 돈을 굳이 그 시간을 걸려서 만들었다는 것이 자랑스럽지는 않았다. 고맙다는 생각도 못했던 것 같다.
이번 추석에 남편이 아버지에게 이 일에 대해서 고맙다는 말을 했을 때, 맥락 없는 대화 속에 던져진 남편의 말이 나를 아버지에게 집중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갑작스러운 사위의 말이 쑥스러운지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끌어내리며 ‘뭘..’ 짧은소리를 내셨더.
짧은소리 뒤에 올라온 긴 여운이 서로 어색했다. 남편은 그 어색한 분위기를 밀어내듯이 멋쩍게 말했다. 그리고 남편 옆에 앉아서 고기를 먹고 있던 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가 이렇게 마음 써 주는 것을 이 녀석이 알아야 할 텐데요.”
아버지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정색하듯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에잇, 이 사람아, 그건 나 좋아서 하는 일이지. 그걸 애가 왜 알아줘야 하는가? 나는 그 돈을 넣으러 갈 때 행복하네, 손자는 국민은행, 손녀는 하나은행, 그 가는 길이 즐거워. 좋아. 그럼 됐지 않나?”
아버지의 말에서 행복하다는 그 기분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나는 돈이 쌓이는 결과만 두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그 돈이 쌓이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대학 등록금을 한 번에 넣어주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우리 아이가 할아버지에게 돌려받은 통장에 매달 2만 원, 3만 원이 찍혀 있어서 아이가 뭔가를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할아버지가 주는 대학 등록금이 긴 시간 동안 할아버지가 성인이 되기를 기다린 할아버지의 마음이기도 하다는 것을 아이가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손주 덕에 금연을 해서 건강을 찾고, 20년 뒤의 시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다는 것으로 오히려 행복해하셨다.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이 자식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의 아버지를 통해 다시 느끼게 되었다. 아무쪼록 아버지가 건강하셔서 손자와 손녀를 통한 더 큰 행복을 느끼실 기회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
아버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