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벼봐!

: 선 방어 후 공격

by 박세미

『가드를 올리고』(2017)

글/그림: 고정순(만만한책방)




검은색 목탄으로 그려진 권투 선수, 권투 링, 권투 글러브가 하얀 바탕 위에서 춤을 추듯이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다. 검은색 글러브를 낀 선수는 빨간색 글러브를 낀 선수의 상대 선수다. 이들은 얼굴 표정도 없고, 무슨 색의 옷을 입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단조로운 모습에서 감정은 다양한 색들로 보인다. 그리고 이 두 선수의 호흡과 고통까지도 실제 권투 경기를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권투 링에 올라선 빨간 글러브를 낀 선수가 자신감 있게 팔을 쭉쭉 내 뻗는다. 이 펀치 한 방이면 상대를 그대로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검은 글러브를 낀 상대도 만만치 않다. 어느새 상대의 강한 펀치가 빨간 글러브 선수의 턱 아래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들어왔다.



이들의 경기는 마치 우리의 인생처럼 보인다. 인생이라는 링 위에서 자신의 펀치로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 무모함, 용기, 자신감 같은 것이 있을 때가 있다. 하지만 세상은 예상하지 못하는 많은 상황을 만들어 준다. 그 상황 속에서 헤매기도 하고, 후회되기도 하고, 포기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 순간에서 자신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도 바로 자신이다. 자신의 의지가 있어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정상이 보이지는 않지만, 열심히 올라가다 보면 그곳에 도달할 것이고, 그 정상은 우리에게 시원한 바람을 선물해 준다. 정상에서 맞을 그 시원한 바람과 멋진 풍경을 기대하며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산을 오른다. 그 목표와 기대감이 험한 산을 헤맬지라도 정상에 오르려는 힘을 준다.



헤매다 찾은 산길이 정상으로 바로 가는 지름길을 안내해주면 좋은데, 현실은 골짜기도 있고, 웅덩이도 있고, 큰 바위도 있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좌절하고 싶은 순간에 다시 한번 힘을 내어 일어서면, 세상이 토닥이며 안아줘야 하는데, 현실은 더 매서운 공격을 퍼부울 수도 있다. 야속하리만큼 ‘퍽!’ ‘퍽!’ ‘퍼벅!’ ‘퍼버벅!’ 짧고 강력한 세상의 주먹 소리가 자신의 마음에 고통스러운 도장을 퍽퍽 찍을 수도 있다. 이런 순간에 다시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자신이 바라던 인생의 목표다. 산의 정상에서 시원한 바람을 만나고 싶다는 그 마음이 한발 한 발을 내딛는 힘을 주는 것이다.



빨간 글러브 선수는 몇 번 쓰러졌지만, 그때마다 일어섰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을 때 사력을 다 해 일어난 그의 얼굴에 시퍼런 멍과 미소가 함께 그려졌다. 아무도 없는 모퉁이에서 표정 없던 그의 얼굴에 흐릿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얼굴에 든 멍자국 보다 가드를 올린 글러브 사이로 보이는 앙 다문 입술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이 모습이 이제 다시 경기가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제는 맞는 것이 더 이상 무섭지도 않을 뿐 아니라, 더 이상 맞지 않을 것이라는 두둑한 배짱도 느껴진다.



권투 링에서 보여주는 이 경기가 누군가의 인생 같았다. 금방 성공할 것 같고, 항상 행복할 것 같은데, 예상하지 못했던 인생의 매서운 펀치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나에게 달려들 때가 있다. 잘 피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 큰 힘으로 나를 위협하고, 다시 일어서며 숨을 고르는 순간 순식간에 또 나에게 달려든다.



더 이상 인생에 맞서 싸워 볼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인생의 목표라는 것이 희망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그래서 세상에 속는 기분으로 다시 힘을 내서 일어서 본다. 누군가의 응원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품었던 목표가 나를 일으키는 것이다.



몇 번 맞아보면서 중요한 것은 내 팔을 먼저 뻗는 것이 아니라, 가드를 먼저 올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드만 제대로 올리면, 맞아도 쓰러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인생에 맞설 배짱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의 함성과 박수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링은 외로운 곳이다. 도망갈 곳이 없다. 스스로가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 3분 동안 공(gong)을 치지 않는 한, 권투 경기는 끝나지 않는다. 인생도 하늘에서 끝났다는 종(鐘)이 칠 때까지 끝나지 않은 것이다. 내가 그 끝을 정할 수 없다. 실컷 두드려 맞고 나야 가드를 제대로 올릴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우리는 그저 종이 쳐지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가드를 올리고 버텨 볼 뿐이다.






<우리 아이의 한 줄 평>

나는 지금 공격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가드를 올리고 있을까?

이 그림책을 보고 나서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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