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線)’에 ‘선(善)’을 부여하지 않기

: 차별이 아니라 공존

by 박세미

『이 선이 필요할까?』(2020)

- 글: 차재혁, 그림: 최은영(노란상상)




2018년 4월 27일, 남한의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당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을 했다. 이때, 김정은 위원장은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전에 백범 김구 선생이 휴전선 설정 전에 군사분계선을 통과하였고, 2007년 10월 2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직접 걸어서 넘어 남북정상회담을 가진 바 있다. 그 선을 넘으려면 합의가 필요했고, 그 합의에 이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 간단한 행동 하나가 많은 사람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고, 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가 되었다.



군사분계선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부터 그어져 60여 년 이상 서로 넘어 다니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에 대한민국은 정전협정문에 서명하지 못했지만, 정전협정은 체결되었다. 정전협정은 남한 육군 소장 최덕신 배석 하에 클라크 국제 연합군 총사령관, 김일성 북한군 최고 사령관, 팽덕회 중공 인민지원군 총사령이 정전협정문에 서명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이로써 한국전쟁이 멈추었고, 남한과 북한은 서로 다른 색깔의 선으로 분단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선의 색깔을 결정하는 것에는 힘이 따르기도 한다.




‘선(線)’의 사전적 정의는 ‘그어 놓은 금이나 줄’이다. 선의 사전적 정의는 간단하다. 그 안에는 어떤 목적이나 의미가 따로 없다. 하지만 금이나 줄이 그어지는 순간 그것이 눈에 보이던, 보이지 않든 간에 ‘경계’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떠한 합의 없이는 선을 함부로 넘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나’와 ‘너’를 구분 짓게 하고,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기 때문이다. ‘선(線)’에 ‘선(善)’이라는 의미가 부여된다. 다시 말해, 그어 놓은 금이나 줄은 올바르고 착하여 도덕적 기준에 맞는 쪽과 그렇지 못한 쪽을 나누어 준다.


그렇다면, ‘선을 그어 나와 다른 것들을 분리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그 분리된 것들은 잘못된 것들일까?’ ‘내가 들어가 있는 선 안에서 나는 무엇을 느낄까?’ ‘나는 오직 하나의 선 안에서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들을 던질 수 있다.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이 선이 필요할까?』를 통해서 찾아보고자 한다.




초록색 선이 방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그 선은 형과 동생이 따로 놀고 있는 모습을 확연히 보여준다. 형이 그 선을 넘어 동생에게 가려고 하자 동생은 형에게 그 선을 넘지 말라면서 형은 형이 있던 그곳에서만 있으라고 한다. 형이 동생에게 누가 이 선을 그러 놨는지를 묻는다. 동생은 그 선을 누가 그어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형이 그 선을 넘는 것은 싫다고 대답한다. 형은 그 선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당기기 시작했고, 따라가기 시작했고, 그 선을 모으기 시작했다.


형은 그 선을 따라가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보았다. 그 사람들은 형의 초록색 선을 마주하고 있기도 했고, 다양한 선들 사이에 서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 선들은 곧게 뻗어 있기도 하고, 구불구불 쌓여 있기도 했다.


싸운 듯이 외면하고 있는 남자아이와 여자 아이,

이야기 나누며 학교를 가는 듯한 아이들을 동그란 선 안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한 아이,

분홍색 옷 색깔과 얼굴 모습은 여자 같은데, 남성의 양복을 입고 있는 복잡한 표정의 한 사람,

꼬불꼬불 복잡하게 쌓여 있는 선 위에 서로 등지고 서 있는 남성과 여성,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핸드폰에만 집중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


이들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어 어떤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고, 그들의 심정이 어떤지 가늠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은 주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어서 낯설지도 않다.


형이 계속 선을 따라가다 보니, 자신의 초록색 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란색, 보라색, 파란색, 빨간색 등 다양한 색깔의 선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형의 초록색 선은 학교 교실로 들어가 선생님과 학생을 구분 지어 주고, 공부하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을 구분 지어 주었다.


그 초록색 선은 학교 밖으로 나와서 붉은색 선과 엉켜졌다. 이 그림부터는 구체적인 사람의 모습이 표현되지 않은 인간의 형상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사람의 모습이 형체와 색깔만 있다. 이것은 모습에서 오는 차이가 아니라, 생각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 같다.


형의 초록색 선은 사무실과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빈부에 따른 계층의 차이를 보여주기도 하고, 푸른색과 빨간색 형상의 무리 사이에서 이념적 대립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치 이 모습은 남한과 북한이 분단된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을 갈라놓은 초록색 선과 형상에 칠해진 색깔만으로도 이들은 서로를 적대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다음 그림으로 확인할 수 있다. 푸른색과 빨간색 형상의 무리들은 탱크와 전투 비행기를 앞세우며 전쟁을 하고 있다. 그리고 형의 초록색 선은 가시 철망이 되어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형은 그 전쟁 속을 뚫고 나와 세계로 나왔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세계 지도가 형의 초록색 선으로 그려졌다. 나라마다 매듭이 지어져 있고, 형의 반대편에는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형의 것과 같은 초록색 선 뭉치를 들고 서 있다. 이들은 서로의 모습을 알아본 것 같다. 아이와 할머니는 약자를 대변하는 동시에, 앞으로 이 세계를 이끌어나갈 세대와 이미 지나온 세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들은 어느 동네 골목 한 모퉁이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각자 모은 그 선을 하나로 모아서 휴지통에 버렸다. 이들은 이제 이 선이 궁금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 선이 버려진 것은 단지 선이라는 이유만이 아니라, 서로 같은 선이 완전히 하나로 모여졌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선을 잡고 있던 사람들이 만나면 더 이상 그 선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다. 우리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내 마음속의 선을 쉽게 무너뜨린다. 더 이상 선이 있을 이유가 없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형과 할머니의 초록색 선이 버려졌지만, 우리는 남녀노소, 장애우, 강아지, 그리고 외계인까지 저마다 자신의 색깔을 가진 선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그림을 다음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이 잡고 있는 그 선들은 서로 엉켜 있지만, 이들은 원을 그리며 둘러 서 있다. 이들은 그 선으로 나와 타인을 나누지 않았다. 나만의 색으로 되어 있는 그 줄 끝에는 또 다른 사람이 그 줄을 잡고 있다. 그저 자신들의 선을 붙들고 있을 뿐이다.


이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낯익은 사람 둘을 발견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다. 이들은 한쪽은 빨간색 줄, 다른 한쪽은 파란색 줄이 아니라, 이들은 같은 분홍색 선을 붙들고 있다.


이 그림책을 다 읽고 나서 처음에 가졌던 질문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첫째, ‘선을 그어 나와 다른 것들을 분리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이다. 선을 그어 다른 것들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나를 드러내는 것 같다. 자신만의 선의 색깔은 나를 나타내는 것이고, 그것은 나만의 선 같지만 그 선 끝에는 나와 같은 성향이나 사고방식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이들로부터 때로는 위안을 얻고 안정을 느낀다. 이 그림책에서 형이 동생에게 이 선을 누가 만들었는지를 묻는데, 그 선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본인들이 서로가 다른 것을 알고 만든 선 일수도 있다.


둘째, ‘그 분리된 것들은 나의 기준에서 잘못된 것들일까?’라는 생각이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틀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를 뿐이다. 이것을 인식하고, 서로 합의하여 인정하고 공존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적으로는 너무 어렵다. 인식하고 합의하고 인정은 해도 생활 속에서 공존하면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은 누군가의 희생이 따라야 하는 상황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르다는 것은 인정받아야 한다. 그 생각이 나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열거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소통의 시작이다.


셋째, ‘내가 들어가 있는 선 안에서 나는 무엇을 느낄까?’이다. 이 그림책에서 각자의 선 안에서 핸드폰만 보고 있는 사람들과 같은 선 안에서도 서로 등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쓸쓸함, 속상함, 무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소통의 단절이다. 그래서 선 안에 들어가 있다면, 아마도 외로움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노로 이어질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당연함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함이 아니라는 사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내가 선에 들어가는 순간 그것은 자신만의 섬에 지나지 않는다.

넷째, ‘나는 오직 하나의 선 안에서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이다. 이 그림책을 읽고 나서는 이 질문은 성립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선 안에 들어가 있는 것도 잘못 그렸다는 생각이 드는데, 하나의 선 안이라는 것은 선 안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더욱 고립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색깔을 찾는 것은 좋지만, 그 색깔이 하나일 것인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하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앞서 말한 데로 자신을 외롭게 만들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된다고 답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이 그림책을 읽고 나서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로 정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선이라는 것은 구분이나 분리의 의미로 사용하기보다는 자신을 특정하는 것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나만의 선이 아니라, 같은 선을 잡고 있는 또 다른 존재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위안과 이해를 받고 안정을 찾기도 한다. 그런데 이 선이 놓인 것은 시시비비의 문제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같고 다름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나랑 같은 존재일지라도 그 선이 나에게 곧장 연결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선들이 그 가운데 엉켜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나와 같은 선일지라도 그 선을 잡고 있는 상황이나 생각은 또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아이의 한 줄 평>

‘선이 필요한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선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선은 다른 사람들과 나를 갈라놓기 때문에 소통이 안 돼서 사람들 사이가 나빠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선을 긋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그어진 선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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