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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Nov 17. 2019

알람을 끄고 살아보기로 했다

알람 없는 생활은 능동성을 유도한다

산타호이 템플, 치앙마이, 태국




몸은 저 나름의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


평생을 알람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왔다. 분주한 도시 생활은 계획성 있는 일과를 강요했다.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하면서 스케줄 관리에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지만 작업을 위한 미팅이 있거나 일정이 바쁠 때는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해야 했다. 원래부터 약속을 중시하는 성향인 데다가 사회인에게 약속 엄수는 기본이니 시간 관리에 만전을 기했다. 긴박한 순간이나 타인에게 피해를 발생시킬 수 있는 상황에서는 약속을 더욱 철저히 지키고자 했다. 그럴 때마다 알람이 귀중한 역할을 했다. 오래된 도시인인 나에게 알람은 생활의 필수품 중에서도 우선 순위가 가장 높았다.


공적인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 생활에서도 알람은 요긴했다. 창작자로서의 생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작업을 할 때 낮보다는 밤이 집중력이 높았다. 상상력도 풍부해지고, 효율도 높아 늦게 작업을 시작해 늦게 마무리하곤 했다. 어느새 그 같은 흐름이 생활화되기에 이르렀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으니 늦은 기상은 당연한 일이었다. 눈을 떠보면 정오가 임박한 시각이었다. 내 나름대로의 생활 리듬에 맞춰 일상을 순환시키고 있음에도 시계를 들여다보면 하루의 상당 시간을 날린 듯해 무언가 잘못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럴수록 알람의 필요성도 커졌다. 잠에서 깨는 순간이 일정 시각을 넘기지 않도록 열심히 알람을 사용했다.


여행에서도 알람은 긴요한 도구였다. 계획해 둔 일정이 틀어지는 상황을 방지하려면 시간 관리를 꼼꼼히 해야 했다. 온종일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날에는 늦잠을 자도 상관없었지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하거나 누군가를 만나기로 약속한 날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특히 새벽 교통편을 이용해 다른 도시로 넘어가야 할 때나 무리를 지어 이른 시각에 트레킹을 나서야 할 때는 무조건 제 시각에 일어나야 했다. 알람에게 적극적으로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번 일정이 비틀어지면 그 뒤의 일정들에 줄줄이 타격이 생기는 상황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때의 알람은 세상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치앙마이 생활의 초입에서 알람에 대한 거부감이 일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니 그동안 내가 생활 도구로써 알람을 활용했다기보다는 알람이 나를 조종해 온 듯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정해진 신호에 맞춰 움직이는 양상이랄까. 알람의 지령에 철저히 복종하는 생활을 했다는 깨달음이 씁쓸한 기분을 자아냈다. 알람이 나를 타율적 인간으로 만들고 있었구나 생각하니 순간 아찔해졌다.


원시의 지혜를 품고 있는 세계에서는 자연의 섭리에 맞춰 일상이 이루어진다고 들었다. 아마존의 깊은 숲 속에 사는 원시 부족이나 동남아의 맹그로브 숲을 거점으로 삼은 자연인들은 알람을 사용하지 않으리라. 알람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고유한 생태에 혼란을 야기하는 도구라면 무엇이든 거부할 터였다. ‘편의’를 앞세운 문명의 이기들로 인해 인간은 그동안 많은 감각과 기능을 잃었다. 내비게이션을 사용하면서 그 좋았던 방향 감각이 퇴행하는 현상도 같은 맥락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문명이 인류의 번영에 기여하는 측면도 많겠지만 그로 인해 인간이 자연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인류학 분야의 저명한 연구자인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인 '총, 균, 쇠'에서 폴리네시아의 원주민들이 도시인들보다 뛰어난 감각과 지각력을 지니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실제로 도시인들은 문명화를 거치면서 중요한 감각의 상당수를 잃었다. 반면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 몽골의 유목민, 극지방의 토착민 등 조상의 지혜를 오래도록 간직해 온 집단들은 도시인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의 감각을 유지해 왔다. 서구 사회의 패권주의가 야만의 누명을 씌우며 그들의 문화를 폄하했지만 여전히 많은 학자들이 그들의 능력을 증언하고 있었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오고 있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관념적인 접근이 대부분이었다. 몸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지만 눈에 보이는 건강 증진에만 관심을 둘 뿐이었다. 근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돌아보지 않았다. 생활 속에서 몸도 실천적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다분히 평면적으로 몸의 문제에 접근해 온 듯했다.


하여 결정을 내렸다. 치앙마이에서는 알람을 끄고 생활하기로 말이다. 곧바로 휴대폰에 설정해 둔 알람을 모두 껐다. 각오는 당찼지만 막상 알람을 끄고 나니 불안한 기분이 엄습했다. 몸이 다음날부터 혼돈 속에서 허우적거릴 모습이 눈에 선했다. 가혹한 직장 생활에 지쳐 몇 달간 아무것도 안 하고 쉬겠다며 작심하고 사표를 던진 이들도 퇴사 후 일주일이 지나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불안에 벌벌 떨기 시작한다는데 예행연습도 하지 못한 채 알람 없는 생활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내 몸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운 상태를 겪게 될 듯했다. 그렇지만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다.


치앙마이에서 맞춰 둔 기상 알람 시각은 오전 9시. 알람을 끄자 예상했던 대로 아침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떤 날에는 9시보다 훨씬 이른 시각에 눈을 떴고, 어떤 날에는 9시를 한참 지나 눈을 떴다. 8시간 수면의 흐름도 자주 깨졌다. 너무 이른 시각에 잠을 깬 날에는 낮에 비실비실거렸고, 너무 늦은 시각에 잠을 깬 날에는 우울감에 시달렸다. 그러한 현상이 연이는 시기에는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를 자책했다. 만사가 귀찮게 느껴지기도 했고, 내 존재가 하찮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럴수록 자신감이 떨어졌다. 이러한 시도가 나를 키울지, 나를 망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르자 몸이 조금씩 균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기상 시각도 균일해졌다. 내면세계가 어느새 질서를 갖춘 것이다. 알람만큼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일상의 필요에 어지간히 부응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덕분에 몸이 저 나름의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감각들도 더불어 섬세해졌다. 내가 지각하지 못하는 더 많은 일들이 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느낌도 받았다. 생리적인 균형을 다지는 데 시간이 꽤 필요하기는 했지만, 그래서 일상이 흐트러지는 시기를 불가피하게 지나야 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선택이었다.





# 알람 사용 중단이 유도하는 결과

알람 사용을 중단하면 몸이 긴장하기 시작한다. 가이드라인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몸은 스스로 자율성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알람이라는 신호에 맞춰 움직여 온 관성 때문에 처음에는 갈팡질팡하지만 조금씩 혼란을 헤쳐가면서 본연의 생리에 맞춰 자체적으로 생활 리듬을 바로잡는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스스로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수면 이외의 국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적정한 시간대에 필요한 행위를 수행할 수 있도록 몸이 신호를 보내온다. 일련의 과정에서 감각도 섬세해진다. 감각이 섬세해진 만큼 신체 기능이 고도화된다. 그와 더불어 능동성도 강화된다. 알람이 시키는 대로 하는 생활과 스스로 알아서 꾸리는 생활이 같을 리 없다. 겉으로 벌어지는 양상은 비슷할지 몰라도 바탕에 깔린 메커니즘은 반대다. 대부분의 인간은 외부에서 던져준 형식에 맞춰 생활하게 된다. 학교나 직장의 스케줄에 맞춰 생활을 꾸릴 수밖에 없다. 따져보면 인간이 자신만의 고유한 생리에 맞춰 생활할 수 있는 시기는 유아기와 은퇴 이후의 시간이 거의 전부다. 때문에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신체의 생리는 수동적인 상태이기가 쉽다. 알람 사용 중단은 이러한 상황에 경각심을 주기 위한 조치였다. 지금도 아주 급한 상황이 있지 않는 한은 알람을 사용하지 않는다. 알람 사용 중단으로 엄청난 수준의 능동성을 갖추게 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성과는 있었다. 생리적인 변화보다 더욱 중요한 결과는 알람이 부재한 상황이 능동적인 삶을 계속 고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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