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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Nov 17. 2019

예술 도시에서 다시 시작하는 생활

나만의 보금자리에서의 일상이 시작되었다

구시가, 치앙마이, 태국




개인 공간은 자기 재생의 장소다


기분 좋은 속도로 창공을 가로질러 온 여객기가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치앙마이였다. 상승과 하강을 반복한 쿠알라룸푸르를 떠나 새로운 공간에 발을 들이는 마음이 아주 화창했다. 미리 예약해 둔 여행자 숙소 역시 기대 이상으로 쾌적했다. 젊은 주인 커플마저 더없이 친절하고 다정해 치앙마이에 안착하는 마음이 편안했다. 역대급으로 안락한 매트리스부터 푹신한 이불과 베개에 이르기까지 수면 시설이 너무 훌륭해서 잠도 잘 잤다. 신체 컨디션을 포함해 모든 게 아주 양호한 느낌이었다. 속히 거주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린 것만 빼고 말이다. 


바야흐로 치앙마이는 가장 좋은 계절에 접어든 상태였다. 먼젓번 여행에서 큰 고생을 안겼던 찜통더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낮에는 따뜻했고, 저녁에는 시원했다. 이 시기에 여행자들이 대거 쇄도하는 이유였다. 콘도나 아파트를 렌탈할 계획이었으나 성수기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치앙마이에서 적당한 숙소를 쉽게 구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 장기 체류를 위해 치앙마이에 온 여행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도 거처 확보였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일들이 추가로 대기 중이었다. 스쿠터 렌탈, 현지 오토바이 운전면허증 취득, 협업 공간 탐색과 등록, 생필품 구입, 기타 등등. 생활의 안정을 위해 서둘러 해결해야 하는 과제들이었다.


치앙마이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분주히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한 이틀을 부지런히 움직인 끝에 거처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치앙마이에서 문화적인 움직임이 가장 활발하다는 님만해민의 정중앙에 위치한 레지던스. 크고 널찍한 수영장을 보유했음에도 가격이 무난하기에 관리 사무원에게 바로 계약하겠다는 얘기를 전하고 현금을 인출하러 나섰다. 스쿠터 렌탈과 협업 공간 등록도 할 예정이라 거금을 한 번에 인출했는데 두툼한 지폐 다발을 들고 있자니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곧바로 레지던스로 돌아가 계약서를 작성한 후 보증금과 월세를 지불했다. 이로써 가장 중요한 숙제를 해결했다. 


그다음 과제는 현지 오토바이 운전면허증 취득. 예전의 치앙마이에서는 면허증 없이도 스쿠터를 마음껏 몰고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몇 년 전 당국이 규정을 강화했다. 단속도 빈번하게 실시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국제운전면허증으로 운전을 할 수 있을 줄 알았으나 무용지물이었다. 현지에서 발급하는 면허를 새로 취득해야 합법적으로 스쿠터를 몰 수 있다는 소식이었다. 


면허 취득 과정에 돌입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관련 서류 발급. 도시 반대쪽에 위치한 이민국을 드나들면서 거주지 확인증을 발급받았고, 인근 병원에서 건강검진서를 뗐다. 추가로 필요한 서류들까지 모두 갖춘 후 복사본을 한 부 더 만들어 면허 시험을 신청했다. 


곧이어 교통 교육, 필기와 실기의 순으로 진행되는 1박 2일간의 면허 시험이 시작되었다. 내가 속한 응시자 그룹에서 외국인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는데 덕분에 현지인 응시자들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했다. 시험 감독관의 얘기를 앞다퉈 통역해 주는가 하면 내가 한눈을 팔 때마다 옆구리를 꼬집어 시험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시험을 마친 후 어디 근사한 식당에 모두 데려가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을 정도로 다들 적극적으로 나를 도왔다. 덕분에 시험에 무사히 합격했다. 


그다음 과제는 스쿠터 렌탈. 흥정의 흐름은 매끄러웠다. 3개월 렌탈 요금을 일시불로 즉석에서 지불하는 조건으로 평균적인 장기 렌탈 요금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스쿠터를 빌렸다. 요금을 깎으려다 보니 연식이 오래된 스쿠터를 빌려야 했지만 기능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계기판을 확인해 보니 60,000km 이상을 주행했는데 직접 몰아보니 확실히 세월이 느껴졌다. 이 손 저 손을 타서인지 동체의 반응이 예민하고 섬세했다. 시험 주행을 하는 동안 섬뜩한 기분을 여러 차례 느꼈는데 다양한 사람을 두루 상대한 흔적이 여실했다. 반면 힘 차고 순발력 있는 움직임에서 믿음직스러운 느낌도 받았다. 기계의 세계에서도 연륜의 법칙이 통하는 모양이었다.


동체에 적응하고 나니 녀석의 진가가 더욱 분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추진력이 상당히 좋아 질주할 때마다 시원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계기판을 확인해 보니 최고 시속이 170km였는데 밟아보니 순간 가속력이 무척 훌륭했다. 짱구에서 타던 스쿠터가 중학생이었다면 우붓에서 타던 스쿠터는 고등학생, 이 녀석은 대학생이었다. 속도감이 좋아진 만큼 위험성도 커졌으니 안전 중심으로 운전하기로 했다.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협업 공간 등록. 치앙마이에서 가장 분위기가 활기차다는 협업 공간을 방문해 석 달 멤버십을 일시불로 끊었다. 이제부터는 마음이 바뀌어도 꼼짝없이 드나들어야 한다. 숙소에서 도보로 10분 거리라는 점도 만족스러운 데다가 구시가에 자리한 두 개의 지점까지 총 세 개의 지점을 동시에 이용할 수 있다기에 결재를 하는 마음이 더욱 흡족했다. 오전에 한 지점을 이용하다가 오후에는 다른 지점을 이용해도 된다기에 차후에 한 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협업 공간 덕분에 활동 반경이 넓어질 듯했다. 


내친김에 슈퍼마켓을 방문해 생필품도 구입했다. 레지던스에 기본적인 가구는 이미 비치돼 있는 데다가 요금을 조금 더 내고 정기 침구 교체 서비스도 요청해 둔 상태라 구입해야 하는 생필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침구를 교체하면서 방 청소도 해 준다니 청소용품도 구입할 필요가 없는 상황. 샤워용품과 몇 가지 비품과 군것질거리 구입으로 쇼핑 완료. 이로써 주요 미션을 모두 완수했다. 


며칠 지내본 바, 숙소의 환경은 꽤 만족스러웠다. 불편한 부분은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지역의 유흥 중심지이다 보니 밤마다 주변에서 소음이 들린다고 했는데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나름 조용하고, 쾌적하고, 무엇보다 주변 이동이 편리했다.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내 안 어딘가에서 술렁거렸다.


저녁 무렵, 동네 구경을 하려고 숙소를 나섰다. 중요한 과제들을 완수한 까닭인지 발걸음이 무척 가뿐했다. 선선한 저녁 바람을 맞으며 밤거리를 산책하다가 지역의 랜드마크인 마야몰에 발길이 닿았다. 쇼핑몰 앞 광장에서는 십 대로 구성된 3인조 혼성 밴드가 공연을 하고 있었다. 최신곡들과 함께 지미 헨드릭스, 비틀즈 등 레전드 뮤지션들의 곡을 자신들의 스타일로 연주했는데 솜씨가 상당히 훌륭했다. 연주력도 좋고, 쇼맨십도 화려해 한참을 공연에 빠져 있었다. 


경쾌한 리듬과 박진감 넘치는 사운드로 흥분감을 고조시키는 그들의 모습을 구경하다가 치앙마이가 태국을 대표하는 예술 도시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기분이 더 좋아졌다. 예술로 들썩이는 도시에 무사히 안착했으니 이제 잘 지낼 일만 남았다.




# 삶의 질을 높여주는 개인 공간

외부의 작용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삶 속에서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자기 보호와 재생을 위해서는 자신만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 개인 공간은 외부의 간섭을 차단해 줌으로써 나 자신으로 온전히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준다. 성장소설이 나만의 다락방, 주인공만 아는 비밀의 장소를 작품의 중요한 배경으로 삼는 이유도 그래서다. 개인의 고유한 서사가 움트는 곳이 바로 자기만의 공간이다. 칼 융은 개인 공간을 자신만의 성전으로 만들 것을 권한다. 창조적인 환경을 조성하라는 것이다. 개인 공간의 절대적 필요를 설명하는 이야기라 하겠다. 여행자 숙소와 개인 숙소에서 각각 3개월씩 생활한 끝에 얻은 결론도 그와 다르지 않다. 여행자 숙소보다 개인 숙소가 스스로를 돌보고 집중하기에 월등하게 좋았다. 외부의 작용이 날마다 밀려드는 여행자 숙소와 달리 개인 숙소에서는 불필요한 자극을 겪을 일이 없었다. 또한 모든 공간을 다른 이들과 공유해야 하는 여행자 숙소에서는 휴식을 취할 때조차 원치 않는 작용들에 부딪쳐야 했지만 개인 숙소에서는 필요에 맞는 방식으로 충분하고 온전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장기 거주 공간이 필요하다면 여행자 숙소보다는 개인 숙소를 선택하길 권한다. 비용이 조금 더 든다손 치더라도 생활의 질이 훨씬 더 높아진다. 추가로 몇 마디 더 덧붙이자면, 장기간 거주할 지역으로는 문화예술의 기운이 왕성하게 감도는 곳이나 자연과 가까운 곳이 좋다. 창조성이 풍부한 대표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정서적인 환경이 건조한 지역과 비교 체험을 해 보면 그 차이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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